교훈

보면 보는 것만 알고 안 보는 걸 모른다.
본 것도 안 본 것도 다 봐야 다 안다.
모르는 게 없을 때까지 다 봐야 한다.
항상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하면 말이 가시가 된다.
모르는 게 있다고 생각해 말을 부드럽게 바꾼다.

틱톡 인스타그램 안 써요

구글링하니까 sabremantis라는 닉네임을 쓰는 사람이 전에 몇 명 있었는데
제 닉네임의 유래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짓다가 우연히 걸린 거에요

세상은 비관적인 아포칼립스야

  • Seventh Wonder - Exhale

주시 문서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궁예식 관심법을 쓰는 건 위험하고 허무하다 (부제: 뇌 기능의 이상 문제)

사회성의 기준은 객관적으로 보면 상대적이면서도,
주관적으로 보면 절대적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사회인은 절대적인 하나의 사회성을 찍어 맞춰야 한다.
사회성이라는 상대적 개념에 의해 자연스럽게, 인간의 고용, 해고, 자본은 획일성을 띤다.
사회성에서 어긋난 존재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돈을 덜 버는 방향을 향한다.

사회 적응을 잘하는 사람들은 말한다.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라고.
맞는 말이다. 반박할 수 없는 확실한 사실이다.

인터넷에선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확신하는 일이 많다.
의외로 인터넷에서 그렇게 진심으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네티즌들은 사람을 대할 줄 몰라서 진짜로 저렇게 확신한다.
세상에는 생각보다 사람을 대하는 데에 서투른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사회생활의 비주류라 주목받으려면 노이즈 마케팅이라도 해야 한다.
노이즈 마케팅을 좋아하는 사회인이 누가 있겠는가.
하지만 사회의 비주류가 사회 문제를 공론화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힘도 자본도 용인술도 리더십도 부족한데 공론화 따윌 어떻게 하겠냐는 냉정하고 정확한 자아비판과 자괴감으로 판단한 것이라
억지로 공론화하자고 말할 수도 없다.
비주류가 공론화한 사회 문제는 사회생활의 이해관계에 의해 쉽게 묻힌다.
법 조항의 해석의 모호함이라는 법의 영원하며 선천적인 문제 때문에
거대한 판결을 내리기 부담스러워하는 검사, 변호사, 판사들이 많다.
문제는 일반적인 공론화가 이해관계와 법의 선천적 문제 때문에 묻히는데
극단적으로 본의 아니게 일어난 공론화조차 법의 선천적 문제 때문에 묻힌다.
법조계에서 욕을 먹어도 이 부분에 대해서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고민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자각이 있다면 언젠가 인터넷에서 얼굴도 안 봤는데
왜 사람을 자기 멋대로 판단하느냐는 잘못된 생각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늦게 벗어나면 그 폐해는 결국 자기 자신에게도 돌아오고 남에게도 상처를 입히게 된다.

문제는 '얼굴도 안 봤는데 그 사람이 그럴 거라고 어떻게 확신하는데?'라는 질문에
자각이 없는 사람이 있다는 것.
판단력이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부족한 상태기 때문에
정말 심각하면 의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겠지만
여기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찰하는 사람은 얼마 없다.
사람들이 고찰하지 않으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현대의학으로 뇌 손상을 어느 정도 치유할 수 있어도 모든 사례에서 완치의 영역까지 도달하진 못한 상태다.
뇌가 선천적으로 손상되어 정상인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장애인
혹은 뇌 기능이 선천적으로 나쁜 상태라 정상인의 일부분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정신이상자.
정신적으로 약한 약자를 돌보기엔 아직도 인류의 기술과 체계가 부족하다.
정신적 약자를 돌보는 걸 사명감이 강한 소수의 사람에게만 맡기는 상태다.
이 상태가 고착되지 않게 하려고 과학자들이 많이 연구하는 것이다.

우린 인터넷에서 무의미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악플러와 다툼을 뇌 기능의 이상이라는 관점에서 처음부터 바라봤어야 했다.
과학자들에게 뇌 기능의 이상이 오지 않도록 장기적으로 투자할 필요가 있다.
이걸 뒤늦게 생각한 건 인류에게 있어 가혹한 실수였다.
언제 뇌 기능의 이상이 인간관계의 불화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사람들이 이해할 날이 올까.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대인기피증에 고통받는 비주류 노동자: 일부 룸펜, 프리터, 히키코모리 등

룸펜과 프리터와 히키코모리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의 목차가 아니다. (X)
룸펜과 프리터와 히키코모리가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다는 의미의 목차다. (O)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는 간단하다.
사회 속 배신이 무섭기 때문이다.
비뚤어졌다는 자각이 있는 일부 비주류 노동자는
가해자와 방관자가 섞인 사회 속 배신에서
회피하거나 공론화를 택한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은 이유를 다르게 말하면
'내가 수많은 사람과 원만히 소통할 수 없는데 소통할 자격이 있는가?'라는 자기혐오, 죄책감과 같다.
회피하면 세속의 풍파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한 번 공론화를 택하면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사람이 된다.
특히 노동환경이나 법적으로 불려갈 일이 발생할 때
히키코모리 기질을 일으키는 트라우마가 사람들과 마주하기를 거부하는 원인이 된다.
원래부터 괴로운 일을 겪으려고 열심히 달려온 것이 아닌데
결과가 법적 대응이라는 괴로운 일이라면 대인기피증이 오기 쉽다.

대인기피증이라도 사회에서 가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사회에서 원만히 적응하지 못한 대인기피증은 오프라인의 공론화를 거부한다.
오프라인 쪽은 공론화의 정당성 문제라기보다 사람이 많이 모이면 잘 이끌 수 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토론이나 논쟁을 이끌게 된다.
인터넷 방구석 여포 혹은 방구석 폐인 문제와 연관이 있다.
인터넷 쪽에선 사람들과 마주치지 않고 자신의 가난한 환경과 부적응으로 인한 한을 토로하지만
정치적 분쟁이 일어 법적대응이 일어나 갑자기 수많은 사람과 마주하게 될 가능성이 생기면
도망친 곳에 낙원이 없다는 베르세르크의 명대사와 비슷한 심정을 느낄 수 있다.

고역이다. 사회생활을 잘하려면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면서 믿음직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그조차도 안타깝게 못하는 중증의 대인기피증을 앓는 일부 약자는 예술계를 고민한다.
그들이 갈 수 있는 곳은 인문계(특히 순수문학이나 에세이)나 서브컬처, 일본 오타쿠의 영향을 받은 곳(남성향 아닌 순정만화풍)밖에 없었다.
소비자가 되는 건 꺼려지지만 좋은 생산자가 되고 싶다는 순수한 초심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막상 그곳으로 가면 대인기피증을 위한 낙원이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진보와 좌파의 정치인들과 어쩔 수 없이 만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오기 때문이다.
아직 정치적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벌써 정치적 영향에 입문해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문화계의 소비층이 대인기피증에 고통받는 일부 약자와
사회인으로서 잠깐 쉬다 갈 곳으로 여기는 일부 상식적인 네티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생산층으로서의 낙원이 없다는 사실에도 좌절했는데 소비자와 소통할 수 있는 낙원도 없다.

결국 일부 대인기피증은 인권 운동과 친환경 사상의 힘을 빌렸겠지만
바깥에서의 평가와 상관없이 내적으로만 살펴보면 대인기피증을 극복하려고 절박하게 달려왔지만
이전부터 공론화가 서투른 나머지 오해를 사기 쉬웠고
배신감 때문에 분노와 증오에 매몰되기 쉬울 만큼 정신건강이 악화되어
더욱 사회에서 이해받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생각보다 옛날은 잘 모르겠지만 대인기피증이 왕정 체제에 적절하지 않았다는 것 정도는 사실인 것 같고
적어도 현대에서 대인기피증을 심하게 앓는 사람을 위한 길게 쉬어갈 낙원을 만드는 진보좌파와 문화계에서의 운동은 아직 성공하지 못한 상태다. 그들이 위선적이라 비판받아도 대인기피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약자를 건강한 사회인으로 만들고 싶다는 취지만은 진심이었다. 취지만은 진심이었지만 어디서부터 꼬인 것인가. 일이라는 것은 시작할 땐 큰 포부를 품다 막상 진행하고 끝날 즈음 감당할 수 없는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어른의 사정이라는 말은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대인기피증. 대인기피증을 심하게 앓는 사람을 위한 낙원은 어디에 있는가.
진보좌파와 문화계와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은 그런 낙원을 세우는 데에 성공할 것인가.
공론화가 서투른 사람들에게 공론화의 부담을 덜어줄 낙원은 언제 성공할 것인가.

배신하고 싶지 않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지만 배신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약자란

약자는 강자를 부러워한다.
'어떻게 믿었던 혹은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마저 배신당할 수 있는 상황을 잘 피했지?'라고.

강자는 특별히 비법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사람을 직접 본 것도 아닌데 함부로 판단하기 싫다고 일관적으로 대했을 뿐이다.
말로 들으면 쉬울 것 같지만 사회적응이 느린 자들에겐 너무나 가혹하고 어렵다.
서로의 처지를 겪지 않으면 정말로 모르는 일이다. 심하면 서로 이해하지 못하고 대립한다.

약자는 배신하고 싶지 않고 배신당하고 싶지 않아서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는 편이다.
광신도나 빠나 호구는 비판 받을 만하지만 그들의 행동원리 중 하나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인 사랑을 주지만
안타깝게도 그들은 사기꾼의 목표물이 되기 쉽다.
사회에선 진짜 사기꾼과 방관자가 모호하기 때문에 약자 입장에서 방관자마저 사기꾼이라 의심하기 쉽다.
억울함이 심해지면 공론화를 한다. 그리고 증거가 부족하면 무고죄가 되어 악의적인 관심법이라는 역풍을 맞는다.

배신이 싫어서 사랑을 하고 공론화를 하고
주변이 극단적이라 말리다 하나둘씩 떠나가고
고립되고 절망하고 속죄하다
속세에서 다소 멀어질 수 있는 무난한 삶을 바라거나
아직 속세 속 배신의 굴레에서 고통받는다.

약자에게 아무도 남지 않을 가능성이 높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상을 원망하기만 해야 할까? 원망하면서 파괴하는 삶은 비참하다.
속세에서 멀어지되 관심법이 없는 삶이야말로 진정한 평화다.
그렇게 되고 싶겠지만 문제는 돈. 돈이 없으면 자급자족이다.

속세에서 멀어지고 싶은 약자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법적대응을 마주한다고 해도 약자에게 돌아오는 것은 없다.
법적대응의 당사자가 될 즈음이면,
돈을 받아도 물질적인 가치가 있을 뿐 마음에 한 번 난 구멍이 메워지지 않는다고 깨닫는다.

약자의 마음에 메워지지 않는 구멍.
의로웠지만 의롭다고 평가받지 못한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 증명하기 위해
약자는 세속화가 나쁘다고 비판한다.

하지만 세속화에 적응한 강자 입장에선 공감하기 어렵다.
강자는 세속화가 문제가 아니라 관심법이 문제라고 한다.

배신은 관심법에서 오는구나.

속세에서 벗어나서, 혹은 죄를 지어 속세에서 추방당해 자유가 되었다

자유가 되었다.
속세에서 초심을 잃고 남을 내 편견으로만 바라보는 것에서 자유가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심적인 자유고 금전적인 자유가 아니었다.

죄인이 죄를 짓고 나서 자유가 되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비판한다.
하지만 반 정도는 진실이다.
금전적으로는 양심적으로도 비참해도
심적으로는 나 자신의 오지랖도 타인의 오지랖도 멈췄기 때문이다.

속세로부터의 자유는 늦게 오는 것이 현명해보인다.
금전적인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속세에서 오기를 부렸다간 후회하겠지.
그러한 오기는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데 오지랖을 부리면 참작되지 못하지만,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데 오지랖을 부려서라도 돈을 벌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참작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의 싸늘한 시선은 감수해야겠지만.

수사관, 법조계, 교도관의 무게와 PTSD

수사관, 법조계, 교도관을 사람들이 욕하는 일이 많다.
정말 욕먹을 만해서 욕먹을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혐의가 모호해보일 때, 무죄, 무혐의, 유죄, 기소유예로 확정짓는다는 것.
한 사람의 목숨을 마음대로 다룬다는 것은 법조계에서조차 괴로워하는 것이다.

수사관과 교도관의 PTSD는 재조명될락 말락 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법조계의 PTSD, 트라우마에 대해 조명되는 일은 없다.
법조계인들에게 사회의 정점에 올랐으니 트라우마야 아무렇지 않게 극복할 것이란 분위기가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조차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을 리는 없는데.

능숙하게 일하지 못하는 자를 해고하는 능력주의, 온건하게 사회화해야 한다는 계몽주의의 본능

사회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는 가장 큰 분기점이다.
능숙하게 일하지 못하는 자(주로 약자)를 징계해야 한다는 능력주의.
온건하게 사회화해야 한다는 계몽주의.

진솔하게 말하건대
진보좌파와 페미PC는 약자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면 될 수가 없다.
죽어도 약자를 못 버릴 거고 온건하게 사회화시키기보다 능력이 없다고 징계를 내리는 것이 더 나쁘다고 판단한다.
징계를 내리는 순간 자신이 남의 가치를 함부로 판단한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능력주의적 관점에선 이해할 수 없지만 인권운동은 그렇게 컸다.

어느 쪽이 옳은 걸까.
철저한 능력주의로 관심법 같은 감성을 배척하는 사회적응을 잘한다고 여겨지는 사람?
관심법이라는 조롱을 들어도 약자를 버리느니 차라리 내가 내부고발자급으로 욕을 먹고 나 혼자 잊혀지는 사람?

예전의 나는 어중간했다.
약자한테는 사회인의 철저한 능력주의에 대해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하고
강자한테는 약자의 존중받지 못하는 비참함에 대해 모르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지금도, 어중간하다.
약자가 약자를 구하기 위해 이론이 아닌 구원의 본능으로 뛰어갔더니 어느새 진실과 거짓을 모르게 되었고
강자가 일에 치여 약자를 구하지 못하는 현실이
IMF부터의 신용불량자가 양산되어 미국 서브모기지 대공황부터 가속화되었는데
인터넷은 약자와 강자의 진솔한 토론이라기보다 능력주의의 본능과 구원의 본능으로 나뉘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의 일부분이 되었다.

간혹 약자와 강자가 하는 공통적인 증언은
'믿었던 자에게 배신당하기 전까지 나는 내가 믿는 진영의 좋은 면만을 보고 있었다'라는 거였다.
세계 각지의 이름난 진영들은 이런 아픔을 수없이 겪어왔던 것일까.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일반인한테 '너는 남의 얼굴도 모르는데 멋대로 이렇다고 판단하는 사람이다'라는 비판을 듣기 전까지
정치적으로 나름 포부를 품은 사람들은 자신이 그렇다는 걸 모른다는 것이다.
누군들 그런 조언을 안 하고 싶었겠나. 하고 싶은 사람은 많았다.
단지 인터넷에서 그런 조언을 하겠다는 발상을 이름난 사람들도 네티즌들도 못했을 뿐이다.
인터넷에서 중요한 조언을 들을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상한 것이긴 하지만
악성 이용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나름 포부를 품은 이용자도 있는데
자신이 믿는 거창한 것이 아닌 소박한 일반인에게 이러한 조언을 듣는 경우가 오프라인에 많다.
그때쯤이면 법적 문제가 생겨 일반인한테 폐쇄적이었던 과거의 자신이 일반인과 대화를 하게 되고
일반인 입장에선 사람과 소통하는 방법은 절대 관심법이 아니라는 평가를 하는 것이다.

확실한 건 나는 자본주의자도 인권운동가도 될 수 없었다.
사회인의 능력을 동경하면서 되고 싶으면서, 약자를 구하고 싶다?
양쪽 진영을 다 이해하려 하다가 나는 양쪽 진영의 치부가 보이면 용서하지 못했다.
양쪽 진영의 좋은 면만을 보고 나쁜 면을 부정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말하는 나는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고,
남을 궁예식 관심법으로 보기만 했지.

적어도 약자도 강자도 오랫동안 건강하게 노동하고 싶어한다.
세상에 노동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고통 받으면서 노동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현대의 노동은 고통을 견디는 강자만이 살아남는다.
약자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약자, 언어와 소통의 걸음마, 소통의 창구의 개방과 폐쇄

약자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조차 걸음마를 떼야 한다.
옛날에도 지금에도 능력주의로 인해 약자가 후천적으로 악영향을 받아도 선천적인 책임이 있다고 했고,
약자에 대한 구원의지로 인해 악영향을 일으키거나 방관한 사람이 있다면 책임이 있다고 했다.

현실의 능력주의는 질문을 닫는다.
질문에 개방적인 서양에서도 능력주의의 질문을 닫는 특성 때문에 소외자가 많이 나왔다.
인터넷 위키가 토론방해가 없어야 한다는 것도 현실의 능력주의에 시달린 반작용이기도 하다.
일에 집중해라. 하나에 집중해라. 스펙과 눈치에만 집중해라. 관심법은 쓰지 말라.
관심법을 쓰면 일에 불이익을 받는다.
실수를 수습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머릿속이 하얘지지 않고
실수하지 않고 일처리를 확실하게 해야 신용을 잃지 않는다.

전부 인싸와 아싸가 진솔하게 대화를 나눌 계기가 없으면 의외로 모르는 일이다.
인싸는 말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고 선전활동을 해도
직접 온건하게 대화를 나누고 그 사람이 누군지 얼굴을 보지 않고 알지도 못하고 먼저 평가를 내리는 건
그 사람에게 무례한 일이라고, 그것이 과열된 인터넷이 아닌 현실 속 진실이라고 한다.

걸음마를 떼야 하는 히키코모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는 괴롭다.
괴롭지만 히키코모리의 이야기를 들어줄 곳은 없다.
히키코모리는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이상적으로는 약자가 존중 받아야 한다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뒤쳐진 자신을 되돌아보면서 절망하면서도 어떻게든 스스로 길을 찾아내야 한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없으니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증오하기 쉽다.
마음을 닫으면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되고 범죄를 받아들인 비정상인을 제외한 정상인의 참회욕구와 성장배경을 거부하게 된다.
설령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더라도 못난 자신이 후견인에게 부흥해야 한다고 몰아붙인다.
애정을 나누고 싶은 욕구는 충만한데 스스로 브레이크를 걸고 멈추는 데에 서툴다.
애정이 분노와 증오로 바뀔 때 어떻게 멈출지 모르는 사람은 한 번 말해놓고 자괴감을 느낀다.
한 번 말실수 하면, 잘못하면 바깥에서 능력주의를 믿는 인싸들은 믿어주지 않을 거야.
그런 심리가 기원전부터 자리잡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인터넷이 생기면서 인싸와 아싸가 소통할 창구가 단절되고 둘로 나뉘어져서? 이원화돼서?
인터넷이 생기기 전에는 혼자 절망하고 따라잡지 못했지만 인터넷을 통해 겨우 사회를 따라가는 처지.
인터넷 커뮤니티의 도움은 못 받지만 지식을 다루는 칼럼과 네이버 지식백과나 위키를 통해 겨우 사회를 따라가는 처지.
이마저도 실제 현실과 괴리감이 있어 인권운동계 중 시민단체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
시민단체의 도움을 받는다 해도 거기에 보답할 능력을 단기간에 기를 수 있을지 절망하는 처지.
못 기르면 인권운동에서마저도 버림 받을 것이라는 공포심.
도망칠 대로 도망치다 더 이상 도망칠 곳도 없고 스스로의 빈약한 힘으로만 증명해야 하는 처지.
사회에서 버림받을 것이라는 공포는 약자 입장에서 살아 있음과 죽음의 경계를 느끼게 한다.

왕정부터의 약자만을 위한 소통 창구

현실적으로 전세계에서 약자만을 위한 소통 창구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왕정 시대까지는 왕과 기사가 농민을 가혹하게 대하면 식량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어지간한 막장 암군이 아닌 이상 소통 창구가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부터 뭔가 잘못됐다.
농민과 육체노동자의 가치가 과소평가되고 기업의 가치가 과대평가됐다.
이를 뒤집어 엎을려고 공산주의가 생겼지만 공산주의는 독재정치로 망했다.
농민과 육체노동자를 대변한 대표적 사상이 독재를 대변했다는 것은 진보좌파에게 치명적이다.
진보좌파가 평판을 어떻게든 되돌리려면 러시아와 중국 공산당을 무너뜨리고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아무튼 프랑스 혁명은 농민이 분노해서 시작한 일인데
정작 농민이 소작농이 되고 땅 주인(지주)가 잘 먹고 잘 사는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두 가지 태동이 필연적이었다 해도 이것만은 납득을 못하겠다.
농민을 위한 길이 왜 둘 다 실패한 건지 납득을 못하겠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왕과 귀족이 망했으니 대신 관리해줄 사람이 필요했으니 지주들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지주들은 농민을 먹여 살리겠다는 의무감이 왕정 때보다 부족하니까 막말로 농민을 막 다뤘다.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차라리 왕정 때가 나았다고 복고 운동을 벌이고 싶어도
프랑스 혁명의 수혜를 업은 지주와 산업혁명의 수혜를 입은 근현대인은 반대한다.
지주의 경우 욕을 박아도 할 말이 없는 적폐들이 현대까지 가격을 부풀리는 중간유통업자나 건물주까지 되기를 바라고,
근현대인은 왕정 때로 돌아가면 개방적으로 사는 사람이 통제당하는 것을 반대하기 때문에 납득이 간다.

시대는 발전할수록 인간이 육체노동부터 피와 땀을 흘리며 시작했다는 것을 모르는 세상으로 변질되고 있다.
과학의 발전은 고무할 만한 일이지만 육체노동을 과소평가하는 세태가 계속될수록
인간은 원시시대부터의 본받을 만한 가치마저 구시대적이라고 경멸하는 이상한 동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칭은 사라지는 거지.

근현대에선 자본주의, 공산주의, 흑인 인권, 여성운동으로 한때 약자를 위하거나 현재까지 약자를 위한 소통 창구가 나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프랑스 혁명이라는 같은 뿌리에서 시작해 혁명적이다 보수적으로 변했기 때문에
적응이 잘 된 사회인(자본) 혹은 폭력독재(공산)를 서민의 대표로 대변하면서 질문의 여지를 스스로 봉쇄했다.

결국 히키코모리계 약자가 필연적으로 가지는 사회를 향한 질문의 여지를 봉쇄하지 않은 것은
흑인 인권과 여성운동, 성 소수자 인권, 장애인 인권, 동물권, 채식주의, 생태주의, 환경단체, 정치적 올바름뿐인데
약자를 위한다는 마음은 농민 인권을 연상시키는데 농민 인권을 대변하는 세력 중
원래는 독재 숙청과 학살로 붕괴되었어야 마땅할 공산주의의 잔재가 러시아에 푸틴 파벌로 남아 있다는 것이
진보좌파의 아킬레스건이 되었다.
약자의 인권을 위한다는 이야기를 하면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보수에게서 살 수 있는 실정이다.

공산주의의 문제로 인한 아킬레스건, 공산주의의 낙인으로 인한 모든 정치계의 강경파화와 고통, 질려버린 국민의 특히 진보좌파 관련 주제에 대한 정치적 무관심, 법조계의 냉전의 영향을 받을지도 모르는 두려움

하지만 공산주의의 삽질이 컸으니 진보좌파 측에선 타개책을 세우기 어려운 실정이다.
공산주의를 붕괴시키는 것은 농민을 위한 문제 있는 기존 사상을 붕괴시키고 새로운 사상을 세워야 하는 것인데
새로운 사상이 제2의 공산주의 독재가 되면 어떻게 될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공산주의 독재정권은 공장노동자를 지들 멋대로 대변해놓고 입맛에 안 맞으면 숙청했다.
심지어 서양의 대안우파 중 일부는 푸틴을 숭배하기까지 하여 시진핑은 안 되고 푸틴은 되는 이중잣대를 왜 보이는 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진보좌파 측에선 공산주의의 변질을 막기 어려운 실정이라
우선적으로 쉬운 목표이자 현재까지 남은 약자를 위한 소통 창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이는 육체노동자의 원천이자 중심인 농민을 위한 소통 창구가 되지 못하여
정신노동만을 추구하는 원인이 된다. 공장노동자를 위한 소통 창구는 될 수 있었지만
결국 법이라는 것이 체계가 잘 잡혀 있어도 문구의 모호성 때문에 인간이 결정하는 것이라
법을 모르는 공장노동자가 변호사가 있는 기업에 비해 상당히 불리하다.
아마 진보좌파 측에서 보수우파 측에 대응하려고 변호사를 쓸 때
공장노동자의 고통을 떠올리며 트라우마에 빠진 적이 많았을 것이다.
진보좌파가 보수우파에 저항하려고 변호사를 쓰는 것은 필연적이지만,
검사와 변호사 입장에서도 공평한 심판을 원하지만 이념 분쟁에 휘말렸다가 이력에 흠집이 나서 보이지 않는 불이익을 받는 것이 싫고,
한 번 변호사를 쓰면 대기업과 재벌과 다를 것이 없는 일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결국 공산주의로 유명한 소련, 러시아, 중국이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 인권의 첫 단추를 잘못 끼웠기 때문에
다른 인권운동이 공산주의의 낙인에 괴로워하고 있다.
소련 붕괴를 계기로 국가간 이념, 이데올로기 분쟁은 끝났다.
하지만 상흔은 개개인에게 남았다.
인권 운동에 참여했다가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자신은 공산주의자가 아닌데 공산주의자라는 낙인이 찍히면.
의외로 이러한 점을 조명하는 사람은 없다.
한 번 조명하게 되면 이념 분쟁이 재발할까봐 보수우파 측에서도 진보좌파 측에서도 부담이 크다.

국가간의 이념 분쟁을 재발시키면 피로감이 있는데
그렇다고 가만히 두자니 온건파나 중도파가 목소리를 내다가 마녀사냥으로 낙인 찍힐 수 있는 상황이다.
좋든 싫든 강경파가 되거나 강경파를 연기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정치판을 국민들이 싫어하게 되었다.
자세히 고찰한다고 해도 결국 공산주의의 삽질 때문에
보수우파와 진보좌파가 평생 이념 분쟁의 낙인과 굴레에 시달리게 생겼으니
건설적인 토론이 나올 리가 없다.
이는 보수우파식 반공이 본의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남기지만,
역시 이를 조명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정치인들을 정상적인 국민들이 싫어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다.
결국 정치인들이 얘기만 나오면 반공이냐 아니냐로 싸울 게 뻔하니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자본주의나 공산주의나 농민을 위한 프랑스 혁명을 기점으로 출발했는데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 운동과 공장노동자 인권 운동을 대숙청에 악용하는 바람에
관련 주제를 온건하게 꺼내는 것조차 금기시되는 사태가 벌어지다니.
이게 평생 갈 거라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정치계와 정치병의 입버릇: 본의가 아니었다

공산주의의 낙인이 모든 정치계를 강경파로 만들 수밖에 없었고 괴롭게 했다.
정치계는 입버릇으로 '본의가 아니었다'를 달고 살고 있다.
이유는 본의가 아니라는 진심이 담긴 것이기도 하고,
본의가 맞다고 단정짓기도 그렇고,
자기 혼자 본의가 맞다고 말해버리면 다른 고통받는 정치계에게 실례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의가 아니었다'라는 정치계의 말버릇은 국민에 대한 기만으로 비칠 수 있다.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조명한 것까진 좋은데 건설적인 토론이 안 나오고
결국 반공이냐 아니냐의 감정싸움으로 끝나버리기 십상이니
국민에게 무능하다고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이는 서민을 위한 정치를 표방한 모든 정치계가 짊어져야 할 책임이다.
서민, 농민, 공장노동자를 대변했으면 말에 무게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결국 말에 무게가 없다.
보수우파는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를 방패로 삼아 대숙청과 문화대혁명(이라는 이름의 학살)을 벌였으니 그 영향을 받은 사상에 납득하지 못하겠다고 하고
진보좌파는 공산주의의 폐해를 빌미로 농민 인권과 공장노동자의 인권을 탄압하지 말라고 하고
실질적인 타협이 아닌 상호간의 절규만 남았다.

이젠 이게 의미 있는 싸움인지 무의미한 싸움인지 구별조차 안 갈 지경이다.
한 번 인권운동이 학살을 정당화하는 방식으로 실패하면 이렇게 되는 것인가.
만회하려고 얼마나 많은 절규와 분노와 증오를 반복해야 이 일이 끝나는 거지?

인권운동과 복지센터의 인식과 실제에 대한 고찰

인권운동이 점점 과격해진다는 이미지라
직접 들어가기 무서워 일반인들의 외면을 받는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실제 돌아가는 방식은 다소 다를 것이다.
일자리를 제대로 구하고 싶어도 구하는 것조차 힘든 사람에게 복지 관점에서 조치를 취한다.
복지센터에는 인생이 망가진 약자가 찾아오기 때문에 진상손놈이 오기도 한다.
진상손놈이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닌 경우도 있다만...

그나마 인권운동 쪽 약자는 진상손놈을 싫어해서 정중하게 되려고 한다.
하지만 약자는 사람을 사랑하고 싶은데 자신을 제어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온건하게 지도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운동가의 지원을 받아도 부모가 못해준 역할을 운동가에게 기대한다.
삭막한 현실 속에서 처음 받은 사랑에 대한 순수한 기대.
힘들게 살아온 사람 중 극복할 능력이 있다면 과도한 기대가 부풀지 않지만
능력이 없는 아싸나 히키코모리의 경우 건전한 사회인이 되고 싶다는 조급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바깥에서 보면 빠나 씹덕이나 폐녀자나 정치병자라고 욕먹는 행동 속에는 그런 심리가 어느 정도 있다.

운동가들은 필연적으로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할 것이다.
누구는 카르텔이나 커넥션이라고 트집을 잡고 운이 나쁘면 걸리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세금을 인권운동에 운용하는 데에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하는 것 자체는 당연한 것이다.
진보좌파 쪽 정치인과 유명인과 접촉을 많이 한다고 해서 그게 카르텔까지 무조건 가는 거라면 너무 나간 것이다. 어쨌든 운동가들은 정치인과 접촉을 하면서 현실감각이 어느 정도 몸에 익었을 것이다.
강자의 입장과는 조금 다르지만 적어도 강자와 완전히 동떨어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운동가들이 약자를 사회화하려고 받아들일 경우.
정치인과의 접촉이 아직은 낯선 약자 입장에선
인권운동이 생각보다 삭막하다고 느낄 여지가 있다.
사람과 접촉을 아직까진 잘 못해서 덜하고 싶어서 인권운동의 지원을 받았는데
막상 정치인과 접촉을 많이 하는 경우.
인권운동 속에서도 능력주의까진 아니지만 어느 정도 엄한 규칙이 있어
정해진 서류제출 과정을 거치지 못하면 퇴거 절차를 밟게 되는 경우
법에 대해서 모르는 약자가 잘 알아보이는 운동가에게 분노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운동가들은 강제퇴거를 반대하지만 절차에 따른 퇴거의 경우 지켜야 한다는 태생적 한계를 겪는다.
준법 정신을 지키고 성과도 내야 세금 지원이 줄어들지 않는다는 운동가들의 부담감.
그러한 부담감이 의외로 법을 모르는 약자에게 잘 알려지지 못한다는 현실적 사정.
누군들 약자를 퇴거시키고 싶겠는가.
아나키즘이나 무정부주의를 고집하기엔 세금 지원이나 법적 절차라는 사정이 크다.

약자의 심리

사람의 얼굴이 무섭지만 소통은 하고 싶다

히키코모리 같은 약자는 사람이 무섭다.
사람이 무서워서 만나기 싫어한다.
무서운 이유는 각자 다르겠지만 사회 문제 때문에 고통받아서
혹은 사회적응에 힘들어해서가 대부분이다.

사람을 이끄는 방법을 모르다 보니 소통은 하고 싶다.
하지만 딜레마(역설)가 있다.
이끄는 방법을 알려면 소통을 하면서 실수를 제어해줄 후견인이 필요한데
한 번 치명적인 실수를 하면 감싸줄 사람이 없다.
가정에서 있다고 해도 사회에서는 남남이다.
자신의 실수 때문에 여러 사람이 엮일 거라면 차라리 나 혼자 감당하자.
그런 심리가 약자에게 없지는 않다.

하지만 사회에서 이는 이상하게 여겨진다.
인싸들에게 있어 얼굴을 직접 보고 대화하지 않는다는 건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것과 같다.
현실에서 메시지만으로는 빈약하기 때문에 실제로 통하는 재능과 지도력이 필요하다.
아싸들도 그것을 안다. 하지만 재능과 지도력이 부족해 메시지를 찾게 된다.

그리고 메시지를 이용한 시도는 실패한다.
메시지의 정당성이라기보단 능력주의와 약자를 향한 구원이라는 두 가지 관점의 간극을 메울 수 없다.
그걸 메울 수만 있다면 인권운동계와 사회인의 갈등이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인권운동계에서 아무리 고민해도 해결하지 못했던 걸
일반인들이 많은 네티즌들이 해결할 수 있을 리가 없는 실정이다.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가 교육의 장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공산주의에 낙인에서 벗어나지 못한 공간이라 일반인에게 장기적인 공포와 정치적 무관심을 가져다줄 뿐.

인싸들에게는 이것이 말도 안 되는 심리라 여겨진다.
체벌 세대까지만 해도 오프라인에서 선생들이 학생들 교육을 제대로 못했는데
그들이 온라인으로 간다고 이루어지겠냐는 한숨어린 시선이었다.

하지만 아싸들 중 히키코모리계에게는 절박한 관점이었다.
오프라인에서 이루어지지 못한 교육이
온라인을 이용하는 스펙과 사회성이 좋은 사람에게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불안한 기대로 인터넷에 입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히키코모리밖에 없다는 걸 깨닫고 절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싸가 가난을 막연하게 도피하기 위해 인터넷에 입문하진 않으니까.

히키코모리계에 먼저 주목한 것은 진보좌파와 인권운동 진영이었다.
대한민국의 젠더 분쟁까지만 해도 진보좌파와 인권운동 진영이 히키코모리계 네티즌들에게 기대를 많이 받았다.
후손들한테는 '그렇게 기대받은 시절이 있었어요?' 하고 들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다. IMF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면서 일어난 가난으로부터의 절망을
히키코모리들은 진보좌파와 인권운동이 해결할 것이라고 1997년부터 2016년까지 20년 동안 기대해왔다.

젠더 분쟁 이후로 남초 커뮤니티에서 진보좌파와 인권운동에 배신감을 느낀 것은 이것 때문이었다.
인터넷에서 좌절한 히키코모리들에게 성별에 상관없이 좋은 취업 교육을 제공할 줄 알았는데
처음 한다는 짓이 남성혐오 용어를 먼저 정당화했으니 화가 안 날 수가 있나.
노동 의욕이 있지만 사회병폐 때문에 사람 얼굴 보기도 무서워진 절망한 청춘들에게 희망을 줄 줄 알았던 진보좌파와 인권운동 진영이
남성혐오 용어를 먼저 정당화하는 게 말이 되냐는 것이었다.
결국 분노가 가라앉지 못할 상황이 되자 남초 커뮤니티에선 진보좌파와 인권운동 진영에 등을 돌렸다.
20년 동안 취업이 두려운 약자들이 기대했는데 남녀를 먼저 갈라놓으니 누가 좋아하겠나?
20년 동안의 기대가 배신당해 분노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20년 동안 헛되게 기대했으니 적어도 20년은 갚아야 한다는 기세로 마음을 닫았다.

남초 커뮤니티 중 일부는 진보좌파,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 진영이
공산주의의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성별에 상관없는 공정한 취업을 보장할 때까지 외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여초 커뮤니티에선 남초 커뮤니티를 반공을 외치면 보수우파에게 힘을 실을 수 있다는 것도 모르는 머저리로만 취급했다.
하지만 여초 커뮤니티는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
남초 커뮤니티가 바란 것은 취업의 공정함이지 혐오가 아니다.
남초 커뮤니티가 완전히 마음의 문을 닫자
여성계에서는 남성 히키코모리의 분노를 감당하지 못해 여성 히키코모리부터 먼저 도와줄 수밖에 없는데
이것도 공정한 취업과 거리가 머니 분노가 가라앉을 리 없다.

그 결과 공산주의가 농민 인권 운동과 공장노동자 인권 운동을 대표하다가 독재정권이 되어
대숙청과 문화대혁명과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를 퍼뜨려놓고 배째라식으로 호주의 석탄 수입 금지로 전력난에 처하는 삽질을 저질렀다는 게 재조명되어
인권 운동을 하기만 하면 공산주의의 낙인이 찍혀 취업 이력까지 지장이 갈 수 있다는 공포가 끝나지 않았다는 것도 재조명되어
냉전의 후유증이 국가적으로 끝났어도 개인 영역에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재조명되었다.

본인들도 이렇게 되었다고 예상하지 못했겠지. 책임지기 싫겠지.
프랑스 혁명과 산업혁명부터 시작된 대장정이 공산주의의 삽질을 겪으면서
보수우파가 공산주의의 폐해에 영향을 받은 인권운동을 믿을 수 없다고 하고
진보좌파는 공산주의와 엮지 말라고 하고, 의미 있는지 없는지 모를 무의미한 정치분쟁만 지속되어선
일반인들은 혹시라도 공산주의 관련 주제와 엮여 불이익을 받을까봐 정치계를 거부할 전망이고.
정치 분쟁과 가까운 법조계와 시민단체는 한 번 엮이면 일반인들처럼 피할 수도 없고.

여기서부터는 의분에 매몰된 시절의 목차다

양쪽 언론을 처음 살펴보는 습관 뒤 첫 회고

처음 언론에서 보도하는 걸 봤더니 각자 다른 소식을 전하고 있더라.
심지어 둘 다 여러 관점에서 보면 일리가 있어.
인터넷과 인터넷 언론 소식 중 뭐가 진실이고 뭐가 거짓인지 처음 혼란스러웠다.

미련했지. 네티즌을 이상적으로 과대평가했었다.
그리고 네티즌 중 하난 나도 포함되니 자아비판이다.

직접 경험하고 실수를 잘 수습해야만 행복한 삶.
실수를 수습하지 못하면 행복하지 않다.

인터넷이 직접 경험한 사실의 산물이라 할 수 있을까?
검증 없이 언제든지 날조할 수 있는 사실로 보이는 것의 산물이라면
미련하게 내가 인터넷에서 믿어왔던 이상은 부질없는 거 아닌가.
이념과 이데올로기의 광신과 맹신을 비판해왔던 나는
어느새 이데올로기에 미친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나는 무엇 때문에 과거 위키와 인터넷 커뮤니티와 SNS에서
네티즌이 날조를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막연한 이상을 가져왔던 사람이 되었었는가?
이상하잖아.

경우에 따라 다르지만 인터넷이 소수자에게 취업과 교육의 문턱을 여는 역할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문턱을 소수자에게 한 번이라도 열지 않는다면 그런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영원히 죽은 것이고
한 번 죽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두 번 다시 살아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취업과 교육의 문턱을 일부분이라도 닫은 이념과 이데올로기는 스스로를 깨끗하다고 말할 자격조차 없다.
어떻게 해도 그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 죄는 사라지지 않고 평생 속죄하다 운명해야 할 따름이다.

언어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은 믿을 수 없다.
심증이 아닌 물증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어째서 심증이라는 것이 있는 건가.
알 수 있는 건 언어에서 언어로 이루어지는 소통이
심증만 낳고 여론 조작에 유용하다는 것.
고의적이면서 눈에 안 띠는 여론 조작에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넘어간다.
그리고 그걸 직접 경험하기 전까진 조작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이라 자신감을 갖지.
미래의 나 자신은 과거의 자신에게 허세 부리지 말라고 했지만 이미 물은 엎지른 후지.

고의적인 눈에 안 띠는 여론 조작에 당하기 전에
거기에 넘어가지 않는 자세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한 후 깨달으면 너무 늦다. 당하기 전에 깨달아야지.
일종의 자책인가.

여론 조작에 당한 사람은 선택을 해야만 한다.
조작을 극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적은 선택을 하던가.
조작을 극복할 수 없으니 물증중심주의로 안전한 삶을 살아가던가.
조작을 극복할 수 없다면 직접 말하긴 무례해도
양비론적 관점을 계속 유지할 수밖에 없겠지.
한쪽 관점만 생각하다 그런 비극을 또 되풀이하고 싶진 않으니까.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지만 어려운 선택은
조작을 극복할 수 없으면 조작하는 주체를 없애면 된다는 것.
이건 내가 싫어하는 선택이다.
심증중심주의가 없어지지 않는 한 조작을 극복할 수 없는데
조작을 없애겠다는 사람들마저 심증중심주의를 택하면 헛수고다.
머리 아플 필요는 없다고 무책임하게 뭔갈 없애면 다 끝나나.
PTSD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항상 전쟁이 일어나기 전엔 사람은 전쟁을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무책임하게 단언한다.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면서 남이 울부짖는 소리엔 무감정하게 구는 것이 현실이다.
내면의 심정이 어떻든 겉으로 드러나는 사회는 그렇다.
집안에서 화기애애한 가정도 사회밖으로 나가면 모순적이 될 수 있다.
머리가 덜 아프다고 해서 안 아픈 게 되진 않는다.
단지 안 아프게 느껴지는, 언제 갚을지 모르는 빚더미가 될 뿐이다.

조작하는 주체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는 단순한 생각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지혜롭다고 자칭하는 네티즌들, 기자들, 정치권은 그런 단순한 생각에 많이 넘어갔다.
배웠다고 말하는 사람들조차 자신들조차 조작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는 조작의 주체니 반성해야 해요.'라는 뜬구름 잡는 소리만 가득하다.
말만 하면 끝날 일이 아니다. 조작을 못하게 구체적으로 막아야 하지.
아마 그들도 해결방안이 없으니까 한탄하는 심정으로 말했겠지만 무책임한 건 다를 게 없다.
이럴 거면 참가하지 말았어야지. 돈과 명예를 잘못 걸어서 빼고 싶어도 뺄 수 없다는 건가.
한 번 악을 바로잡으려면 조직을 만들어야 하고, 거기에 들어간 기회비용은...
그건 이해하지만 바깥 사람이 볼 땐 감성팔이로 해석된다.
정의를 바로잡으려는 사람도 수많은 사람의 생계를 책임지는 상황이 되면
왠만한 리더십을 가지지 않은 이상 무너진다는 것. 그런 건 이해하지만...
적폐가 되라고 한 건 아니었어. 재원 고갈 등의 원인으로 무너질 위기가 기업보다 오기 쉽다는 걸 몰랐겠지만
뒤늦게라도 알았으면 하지 말았어야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살려달라는 목소리와 단죄의 펜과 키보드는 많은데
그러한 것들 중 믿을 수 있는 것이 없다.

소위 양비론충이라고 불리는 상황이 있다.
하나는 반사회적인 사상도 일리가 있다고 말하다 비판 받을 때.
하나는 반사회적이지 않은 양쪽 의견이 대립할 때 타협을 보자고 하다가 누구 편을 들으냐고 욕먹을 때.
내가 목표로 하는 건 잘못을 옹호하는 양비론이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물증중심주의에 근거한 납득할 수 있는 양비론을 말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그런 사회가 될까.

심증을 너무 많이 믿는 사람과 양비론충의 공통점은
범죄를 바로잡고 모르는 분야를 통제하기 편한 상태로 만들어야 성미가 풀린다는 것이다.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안정적인 교화 체계를 마련하기 귀찮으니까
명령 등의 간단한 장치로 통제하면 움직이기 쉽게 하는 게 편해서
편하게 살다가 복지가 마련되지 않는 허점 때문에 의식주를 누리지 못하고 죽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걸 무시한다.
심지어 자기들도 한때 그랬는데 남한테는 남일이라고 무시한다.
머리 아프게 양쪽의 말이 안 맞을 가능성을 생각하고 물증을 제시하기 답답하니
'물증으로 검증되지 않았는데 불도저처럼 다 밀어버리면 해결되지 않는 거야?'라고 하고 앉았다.
한쪽을 믿는지 양쪽을 믿는지 빼곤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모르는 분야를 자신의 것으로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는, 적응이 느린 불쌍한 사람이 많다.
완전히 모르면 누군가에게 사회에서 살 방법을 가르쳐달라고 울부짖다 외면만 받고 원망을 받다가
분노와 증오를 먼저 배우고 사회 문제에 화내다 뒤틀린 취향에 빠지거나 다단계나 사이비 종교의 말에 저항할 힘조차 잃어버린다.
감정조절로 어떻게든 해결하겠다는 단계가 되면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약자보다 강하면서 왜 약자에게 스펙과 감정조절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지 이해를 못한다.
자신의 행동이 남에게 악의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단계가 되면
나 자신의 악의에도 조종당하지 않으려 하고 남의 말도 함부로 믿지 않고 내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스펙을 기르는 방법을 알게 되면 그제야 사회인들이 약자를 도울 힘이 없는 또 다른 약자에 불과했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경찰서 등의 치안을 유지하는 사람들과 직접 만날 일(대개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면
현장에서 일하는 육체노동자와 서류 작성하는 사회인들이,
군인과 무사 계급이 얼마나 대단하고 대단했고 힘있는지 느끼게 된다.
동아시아의 나이 제한 문제가 눈에 들어오는 나이가 되면
노후자금을 예상하다가 고뇌하게 되고 사회인이 된다는 것의 대단함, 좌절감,
물 흐르듯 실수하지 않고 실수하더라도 수습해내어 사람의 신뢰를 사는 편안한 마음가짐이라는 능력을 갖고 싶어하게 된다.
계속 층간소음이 안 되는 낮은 동네에 살다 보면
사회인으로서의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되면 나 자신도 이렇게 사는 건지 회의감이 들며
예의범절이 결여된 낮은 동네에서 산다는 것의 비참함과 불안함을 느끼게 되며
진상손님과 꼰대와 불합리한 명령을 두려워하고 같은 사람이 되길 싫어하게 된다.
노력함에도 복지 정책이 취업능력이 부족한 사람에겐 여전히 제공되지 않는다고 한탄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노력하지 않는 자신에게 복지 정책이 올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인터넷의 수많은 악플러와 극단주의자들은 앞서 말한 과정을 겪어도 겪지 않아도
적응이 느려도 굴하지 않거나, 적응이 느린 상태 그대로 포기한 사람이 많다.
포기한 사람의 심정을 나는 모른다.
포기해서 남에게 숨기고 싶은 성격과 취향을 절제하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모른다.
그들이 어떤 사회를 만들었건 난 낄 수 없다. 그들을 모르니까.
그들의 용어를 알아도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뭉치는지 나는 모른다. 낄 수 없으니까.
정서적 관점에서 그들은 비주류지만 나는 비주류와 거리가 머니까.
경제적 관점에서 비교하긴 싫다. 다 같은 사람이니까.

하지만 적응이 느려도 굴하지 않으려는 약자조차
실수를 수습할 방법을 빨리 배우지 못했다.
모든 비극은 그런 능력을 약자가 어느 정도 타고나서 시작됐다.
약자라고 일을 잘하고 싶어하지, 못하게 타고나고 싶진 않았을 거다.
좋은 사회인처럼 좋은 리더십을 가지려고 아득바득 노력하지만
가르쳐줘도 모르고 가르쳐줘도 모르고 자책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공부해서 기억해도 까먹고 또 까먹고 반성하면서 자기 점검을 하면서
좀 더 나아지고 싶다고 희망고문이 아닌 희망고문을 스스로에게 가하는 삶.
인권운동계에선 사회의 냉정한 기준을 약자에게 적용하기 싫어 내부비판조차 부담스러워하지만
결국 내부비판을 가해야 하는 시기가 여러 번 와서 지쳤을 것이다.
사회의 냉정한 기준을 맞출 수 있는 사람은 맞출 수 없는 사람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실수를 수습할 방법을 모르면 모든 걸 불도저처럼 밀고 싶은 불안감에 빠진다.
그런 허상을 진짜 해결책이라고 믿어버리는 순간 극단주의가 탄생하지.
모르면 밀어버리지 말고 알아서 무난하게 가르치는 게 정상적인 평화다.
몸이 피를 흘리면 닦아낼 수 있을지 몰라도 마음이 피에 물들면 그 절규는 누가 책임져야 하는가?
나 자신인가? 선동자인가? 명령자인가?
인간의 존엄성을 한 번이라도 짓밟았다면 그 피는 악몽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실수를 수습한다는 건 타고난 리더십의 영역이라 타고나지 않은 사람은 배로 힘들어한다.
빚더미 등의 후천적 원인으로 노력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은 사람,
복지 정책의 허점에 의해 지원받지 못한 사람일 경우 더하다.
본인들도 괴롭겠지. 실수를 지적한다고 해서 될 일도 아니고, 방치할 수도 없고.
리더십을 타고난 사람의 입장에선 가르침을 전하는 건 자유지만
만에 하나 잘못된 가르침이면 실수 하나로 사람이나 일터를 골로 보낼 수 있기 때문에
수십 년간 가르쳐도 실습이 더딜 수밖에 없다.
가르치기만 해서 쉬웠으면 제왕학이라는 말이 나오지도 않았을 거고

일하기 힘들어하는 약자들이 많다.
키보드에서 신세를 한탄하지만
정작 일터에 생각하거나 시도하면 몸이 굳는다. 마음이 굳는다.
뭐라도 수습해야 하는데 굳는다.
진상손님을 만나면 불의를 못 참아서 저항권을 행사한다는 의미로 때렸을 경우에도 황당하게 한국식 정당방위로 인정받거나,
말하는 모양새가 열받지만 묘하게 일리는 있는 상황에서 자기 분을 못 참고 폭행죄를 저지를까봐.
감정조절이 심각해 조롱하지 말아야 할 약자들이 갈 수 있는 곳은 결국 인권운동 단체뿐이다.
인권운동 단체조차 믿지 못하는 사람은, 그보다도 자기가 폐가 되기만 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가지 않는다.
히키코모리 하면 인터넷에서 조롱받는 분위기지만 그 이면에는 누구보다도 일하고 싶은 마음에 절망한 한 명의 인간이 있다.
설상가상으로 사이비 종교나 다단계는 수시로 인권운동 단체로 접근해 첩자가 되어 빼갈려고 한다.
이건 성별에 관계없는 인간이 고뇌할 만한 것이다.

보수와 우파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
QAnon이 어이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것은 안다.

트위터에서 약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
여초 커뮤니티 안에서 약자들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
캣맘, 개 기르는 약자, 채식주의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나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도 일하기 힘들어하는 약자들이 많다는 점을 괴로워했다는 점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고 있다.
사회 교화 시설은 부족한데 유흥가라는 것 자체가 아직까지 왜 있는지 이해하지 못했겠지.
나도 이해하지 못하겠다. 유흥가라는 데가 대체 왜 있는 건지.
성적 욕구라는 것 자체가 주관적이지 않았더라면 비극이 없었을 거다.
인간은 누구나 미지와 금기의 영역까지 다 알아야 성미가 풀리는데
그게 왜 성적 욕구에만 주관적으로 적용하는지 진짜 이해를 못하겠다고.
차라리 성적 욕구가 위험할 때 자동으로 차단되는 객관적인 영역이었더라면 좋았을 거다.
인위적인 수단 없이도 인체가 성적 욕구를 자동으로 차단하면 모든 게 일사천리인데 왜 그런 구조가 아닌 건지.

일이라는 것 자체를 하지 못하는 약자가 있다는 것.
일을 열심히 하고 싶어도 손에 익지 않아 절망하는 약자가 있다는 것.
그런 약자를 이끌어주는 일이야 말로 사회에서 가장 해야 할 일이었을 텐데...

결국 난 언더도그마 같은 생각을 할 뿐이야.
난 언더도그마 같은 생각으로 말한 회고가 아닌데
이것조차 언더도그마로 남게 되겠지.
내가 극단적인 양비론으로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길 빈다.
진짜로 그렇다면 난 위선자야. 내가 위선적인 짓을 하는 게 제일 싫어.
발언할 때마다 한마디 한마디가 두려워. 나도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겠지.
용기와 순수함은 참 절망으로 바뀌기 쉬워. 나도 모르는 위선과 거짓말 한마디 때문에.

첨언

출신이 하나의 정치적, 이념적, 이데올로기적 상징이 되어서
특정 이념만을 따라야 하는 지역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비참한가.
밖에서는 반대되는 다른 특정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에게 지역드립을 듣고
안에서는 내부 이념을 지지하는 사람의 삽질을 보고도 막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화상을 입었는데 안전불감증은 생각보다 일상적이고 심하며 인터넷에는 실감이 없다

중증 화상은 아니다. 경도 화상이다.
식수를 끓여먹을 때 냄비나 주전자를 써서 예상치 못한 화상을 입었다
그리고 화상으로 인한 물집을 방지하는 과정에서
인터넷에 실감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화상을 입었을 땐 머리가 하얘진다
차가운 물로 식혀야 해. 안 그러면 내 몸이 죽어.
이런 생각으로 가득해서
화장실 문을 다짜고짜 열 때
다른 사람이 안에 들어가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다
만약 문 손잡이가 복부를 세게 쳐서 다른 사람의 건강을 내출혈로 악화시킨다면?
나는 위험하다는 생각에 두려워서 찬물로 씻으려고 한 일이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있다. 그런 감각,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재난과 안전불감증에 관한 단어를 늘어놔봤다.
지진, 책, 책장, 책장의 무너짐.
화상, 주전자, 냄비, 컵, 텀블러, 종이컵, 유리컵, 유리컵을 깨뜨림, 접시, 접시를 깨뜨림, 유리.
전자레인지, 생각 없이 잠이 덜 깼다는 등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뜨거운지 확인하지 않고 컵을 들이마시기.
생각보다 안전불감증은 예민한 사람들의 과민반응으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
'그런 거 신경 쓰느니 상사한테 안 찍히게 조용히 하겠다'라는 인식이 아직까지 가득한 사회다.

재난을 당하면, 한 번 전쟁에 휩쓸리면, 피를 보면,
인터넷에서 사상을 극단적으로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몸소 느낀다.
그리고 인터넷에서 끔찍한 재난재해와 안전불감증을 다룰 방법은 없다.

인터넷을 교육적 목적 혹은 사회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두 목적을 온라인계는 간과하고 있다.

인간은 천재지변과 전쟁을 직접 몸으로 겪고 나서야 깨닫는 동물이다.
인터넷은 전 세계 사람들에 의해 비폭력주의와 평화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천재지변과 전쟁을 지속적으로 다루지 못한다.
직접 겪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천재지변과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할 것으로 인식되지만
꺼림칙한 것이며 이미 알고 있으니 재조명할 필요가 없다고 여겨진다.
전쟁이라는 것은 동기가 선해도 비정상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비정상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배타적이고 정상적인 것을 선호한다.

화상으로 인한 고통과 질병으로 인한 고통은 똑같이 인간의 머릿속을 하얗게 만들고
그로 인한 몸부림을 치는 것은 환자나 피해자의 고의가 아니다.
사람은 아파서 살고 싶다고 절박하게 몸부림 치는 사람이 자신이 아니면 무서워하고
정작 그런 상황이 자신이 되면 살려달라고 외치다 주변 사람의 무서워하는 시선을 목격하게 된다.

첨언: 편의성, 다양성, 애착, 증오

인간은 비정상적인 것에 본능적으로 배타적이고 정상적인 것을 선호한다.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다양한 성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증오하게 된다.
'네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어?'라고
각 성향의 사람에게 진정한 사랑이 있다고 경험하지 못해 마음의 문을 닫아 증오하게 된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위험하다.
돌봄 받아야 마땅할 존재지만, 위험하다.
모든 성향을 증오하는 상태에서 한 성향의 후견인에게만 먼저 도움을 받으면
먼저 도움 받은 특정 성향에 은혜를 품어서
나머지 성향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으니 숙청해도 좋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정작 그들은 다른 성향에 먼저 은혜를 입으면
지금 성향에 숙청해도 좋다는 마음을 품을 자기 자신의 다른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있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모든 것의 객관화를 위해서 움직이지만
자신만의 삶이 없다는 것에 공허함을 느껴 주관적으로 행복한 삶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객관화를 위해서라면 사회악이라도 알아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욕망 때문에 고통 받는다.
이러한 삶은 당사자가 아닌 이상 모른다.
인터넷의 극단주의자들이 온건주의자들에게 마음을 닫은 원인이기도 하다.
세상에 극단주의자들의 본거지로 연구하겠다고 용기를 낼 연구자도 없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이 순수한 연구 및 극단주의자의 온건화로 재조명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난 사람은
여러 사람에게서 진정한 사랑이 있다는 걸 알기에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상관없다. 범죄를 자발적으로 즐거워하는 자가 아닌 이상 마음의 문을 닫지 않는다.
여러 사람과의 건강한 애착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나 건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신이 그러한 후견인이 되는 것도 중요하다.
다른 사람이 건전한 애착관계를 가르쳐줘도
자신이 그렇게 되지 못하면 반쪽짜리 건전한 애착관계다.
수많은 사람 앞에서 실수하지 않고 뒷수습을 평온하게 할 줄 아는 사람.
그것이 모든 사람이 바라는 목표 아닌가.

다양한 성향의 훌륭한 후견인을 만난 사람은 말한다.
'세상은 혼자서 사는 게 아니고 같이 돕고 살아야 한단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이를 무시한다.
'다른 사람과 어울리느니 나 혼자 살아야지' 하고서 나중에 후회한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은 정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실은 믿지 않는다.
본인이 정의로운 애착관계를 모르니 불안해서 정의에 집착하는 것이다.

모든 것을 증오하는 사람 중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은
그나마 이러한 점을 자각하고 좌절하겠지만 너무 늦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
건전한 애착관계를 오랫동안 몰랐던 사람이
갑자기 다양한 사람과의 애착관계를 형성하기란 힘든 법이니까.
알기 힘들고, 알기 전엔 모르고, 안 후에는 옛날의 약자였던 나를 모르게 된다.
의외로 사람은 같은 처지를 잘 알지 다른 성장하지 못한 약한 처지를 모르게 된다.
실패한 길은 자연스러운 습관의 변화에 의해 잊혀질 수밖에 없다.

첨언: 당뇨, 간, 관절, 늙음

흔히 당뇨, 간 건강 악화, 관절에 문제가 생기고 나서야
젊음만 믿고 나댄 걸 후회한다. 그런 경우는 의외로 꽤 많다.
난 아니겠지. 난 영원히 젊을 거야.
관리만 잘 하고 사회에서 위험한 부분만 피하면 문제 없어.

정말 그럴까? 경력단절과 나이 제한이 사회적 문제인 이유와 연관이 있는데.
설령 뒷배가 있어도 나이는 못 이긴다.
나이가 들면 뒷배라도 불안정해지고 서로를 버린다.
지금까지 나이가 들어도 비상사태에 처해도 보호해주겠다고 단언하는 기득권 집단을 본 적이 없다.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건강 문제가 생겨도 정신 못 차리는 사람은 못 차린다.
자기 행동과 불의의 사고에 의해 자기 몸에서 피라도 흐르거나 남에게 상처를 입혔을 경우 정신 차리겠지만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면 답이 없다.

이슈에 먼저 분노하는 것은 비정상적이다

분노한 사람이 있다. 이유가 있을 것이다.
걱정하는 사람들이 눈치를 줄 것이다.

분노한 사람은
이슈에 먼저 분노하는 것이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모른다.

논란 및 사건사고에 먼저 화냈다고 치자.
처음에는 정의로운 의도였을지도 모른다고 치자.
하지만 다 지나고 보면
'대화로 해결할 수 있는 일에 화를 내서 신상털이까지 번지는 일이 부지기수인데
이게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가 돌아간 결과란 말인가?'라는 회의감에 빠지게 된다.

의외로 사람들은 내 관점과 다른 사람의 관점을 비교하기 전까지
내가 몰랐던 걸 다른 사람이 알고, 다른 사람이 몰랐던 걸 내가 알고,
나와 다른 사람이 서로 주장하는 게 다른데 둘 다 일리가 있는 상황이 반드시 온다는 걸 전혀 깨닫지 못한다.
내 관점만 옳다고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지고 남에게 근거 없는 잔소리나 하는, 나이에 상관없는 꼰대로 전락하는 것이다.

이슈를 조용히 덮자고 하면 피해자에게 억울한 것이 맞다.
하지만 조용히 덮자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악인이 아닌 게 바로 이것 때문이다.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사람의 정의감을 인정하지만
그 정의감이 비판자 본인에게 부메랑으로 돌아올까봐 걱정하는 덮으려는 자가 없는 것이 아니다.

피라미드 사회에 약점은 없다

피라미드 사회는 상위층으로 부가 집중되어
상위층에서의 조건 및 요구사항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중산층, 하위층, 빈민층, 히키코모리의 좌절에 의해 생기는 당연한 현상이다.
병폐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피라미드 사회가 사라질 일은 없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능력주의를 중시하며 능력에 부합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은
자연스럽지만 안타까우며 멈추지 못할 현상이다.

누구나 한 번쯤 생각해봤을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은 그만한 능력이 돼서 위로 오른 거야'
'나는 아래에 있을 만해서 아래에 있는 거야'
'내가 분수를 알고 천천히 공부해야지. 서두르지 말자.'
약자마저도 부정하지 않는 사실이다. 오히려 약자는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어디서 같은 약자인 주제에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거야'
'약자라면 성격이 착하던가. 성격이 나쁘면 벌을 받아야지.'
자신의 성격이 나쁜지 아닌지 구분을 못하는데 남의 성격은 구분할 수 있다고 근거 없는 삿대질을 하기도 한다.

피라미드 사회에선 상위층이 생사이탈권을 쥔다.
중산층 이하의 나머지 계층의 지지를 받아야 하지만,
법에 관해선 상위층이 나머지 계층보다 훨씬 잘 알고 있다.
나머지 계층조차 법을 잘 아는 사람은 잘 알고 모르는 사람은 사기계약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선 법 앞에 상류층도 평등하다.
하지만 민주주의가 인간의 악의에 의해 무너지기 쉬운 불안정한 체제 중 하나라는 걸 감안하면
독재의 씨앗을 품은 신분제라는 원점으로 퇴화할 가능성까지 생각해봤을 때
필연적으로 반란을 막기 위해 법은 상류층에게 유리하게 되어 있다.

법도 나머지 계층에게 불리한데 다른 부분에서도 그렇다.
왕족과 귀족이 군사력과 공문서로 이룩해놓은 질서를 평민이 손댈 수 있을까?
시민 혁명 후 의식주에 필요한 물품을 생산하는 공업을 다루는 기업이 중요 위치가 되어 질서의 중심이 된 것을
노동자가 노조를 통해서 체제를 전복한 후 손댈 수 있을까?
취업준비생 이하의 아직은 사회적 잠재력이 낮아 높다고 증명되지 못한 계층이
공업을 다룬 경험이 많은 육체노동자나 공업 체계를 수십 년간 이끌어 온 경력직 사원의 노하우를 따라갈 수 있을까?

실무 적성이 불안정한 피라미드 사회의 중산층 이하의 전략은
결국 경력직의 노하우를 일찍 따라가거나,
따라잡지 못해 절망한 나머지 상류층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노조를 인륜마저 버린 불법적 조직이라고 욕하고
다른 누군가는 노조를 궁지에 몰린 약자의 절망이라고 말한다.

상류층이 질서의 중심에 있는 상황에서
정서적 관점을 제외하고 경제적 관점에선 약점이 없다.
능력주의에 근거해서 자연스럽게 움직인 결과가 그렇다고 말한다면
도의적으로는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리는 아무리 약점을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다.
상류층은 의식주 측면에서 중산층 이하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고,
중산층 이하에게 책임을 미룰 선택만 하지 상류층 자신들이 책임질 선택은 하지 않는다.
손해를 안 보려는 자연스러운 성향이 인류에게 장기적인 독이 된 것이다.
게다가 중산층 이하의 계층이 상류층에게 반박할 수도 없다.
반박할 순 있지만 상류층이 일찍 만전의 준비를 갖추면
전 세계에 통하면서도 명분이 사는 항의 방법을 마련하기 힘든 나머지 계층은
뒤늦게 당하거나 저항해도 자본과 준비의 차이에 절망한다.

자본과 의식주 관리 체계 속 입지의 차이 속에서
비폭력시위에 지친 나머지 무력시위가 힘을 얻은 비정상적인 사태가 일어나기 쉬워졌다.
중산층 이하가 비폭력시위에 먼저 지쳤든, 상류층이 이를 먼저 모른 척했든, 결국 결과는 같다.

상류층의 논리가 경제적으로 난공불락에 가까워
중산층 이하의 나머지 계층을 대표하는 집단의 논리가 애를 먹는다.
상류층의 부패를 고발할 합당한 논리를 고민하지만
현실적인 방법은 부패한 자본을 몰수해 뺏는 것밖에 없다.
그런데 뺏는 쪽이 상류층보다 국가와 기업을 경영하는 노하우가 부족하므로
필연적으로 국력과 경제력이 약해지는 걸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상류층 입장에선 나머지 계층이 무서울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산주의는 프롤레타리아의 힘으로 부르주아의 자본을 뺏는다는 강수를 두다가 독재로 퇴화했다.
나쁜 결과로 정해진 것을 되풀이하는 건 비효율적이다.

5ch(前 2ch)는 뒷세계 스레가 있다고 한다

한국에 알려진 다른 나라 커뮤니티 중 5ch, 前 2ch에 뒷세계 스레가 없다.
야쿠자가 지배하는 일본 특성상 나올 수 있었던 스레겠지.

서양에선 불가능하다. 뒷세계 얘길 하면 추적해서 체포한다고 들었다.

진정 자유로운 걸까?
처음부터 자유로운 인터넷 문화는 불가능하지 않았나.
어릴 때라면 호기심에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한 번 인터넷을 하는 순간
실질적으로 보호막이 뚫린다.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는 사람은 잘 없다.
애초에 안 하는 게 나았다고 후회하는 담론이 나오는 건 불가능하다.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돌아다니는 게 잠재시장이었다가 돈이 되었다.
돈을 벌 수 있을지 모르는 시장이 돈이 되었다.
일거수일투족이 다 뚫렸는데 돈이 오가니 철회할 수도 없다.
자유, 평등, 평화,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는 수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증오는
이제 와서 인터넷에서 벗어나고자 하지 않는다.

국민이 국가에서 벗어나는 건 불가능했다.
이민을 가더라도 난민이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민주주의와 인터넷의 끝

과거에는 양비론자가 의견을 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지금은 가능하다. 지구 전역의 전 국가가 화합할 수 있는 의견을 내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어떤 진영에도 구애받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자칭 양비론자는 잊혀질 것이다.

양비론자가 의견을 내는 것은 조건이 필요하다.

1. 현실에서 각오하고 모두까기 인형이 될 것 (소수의 위인만 가능)
2-1. 민주주의 사회가 올 것
2-2. 뒷세계의 힘이 약한 국가에 속할 것
2-3. 인터넷이 발달할 것
3. 어떤 사상에도 호의적이지 않을 것
4. 특정 사상이나 다른 사상에 빠지면 모든 장단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둘 것
5. 기록이 소실되지 않을 것

조건을 만족시켜 양비론자가 인간이 모든 사실과 거짓을 구분할 수 없어
모든 이념의 수명이 끝났다고 단언해도
인터넷은 기계를 조작하는 것이므로 조작되기 쉽다.
보존하는 것은 어렵지만 지우거나 조작하는 것은 쉽다.

부질없게 끝날 것이다.
해보는 게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다.
전부 부질없게 끝날 것이다.

인간이 목숨을 거는 때

섣불리 목숨을 거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그런 교훈을 깨달을 때까지
미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거는 이유는
약자를 도와주지 못하는 강자에게 분노하기 위해서다.

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걸 때 비난받지 않는 이유는
순수하게 위기에 처한 사람을 위해 희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성숙한 인간이 목숨을 걸 때 비판 받는 이유는
자국민에게 약자를 도와주는 강자에게 분노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강요는 사람이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며
본 사실이 있는 그대로의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걸 미성숙한 인간이 모르는 상태에서
대체로 이미 아는 성숙한 인간에게 강요하는 경우가 많다.
인간관계가 좁아서 진실된 마음조차 남에게 독이 될 수 있다는 걸 모르기 때문이다.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할 때를 모른다.
그리고 모른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목숨을 함부로 걸라고 말하다
책임지지도 못할 일을 벌인다.

인간이 고발하는 때

인간이 고발하는 때는 두 가지다.
조직에 문제가 있어서 내부고발한 경우.
조직에 앙심을 품어서 고발한 경우.

첫 번째 경우는 국익을 위해서일 수도 있지만
허언증일 수도 있다.

두 번째 경우는 커뮤니티, SNS, 인맥의 단점을 보고 고발하는 경우지만 먹히지 않는다.
오프라인에선 고발하면 압박이 드니까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온라인에선 익명성의 힘 때문에 압박이 덜 들어 고발하기 쉽다.
하지만 정치권과 엮인 중요 문제가 아닌 이상 묻힌다.
다른 커뮤니티는 내가 고발한 문제에 관심이 없고 끼어들기 싫으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기 고발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모르는데 고발하는 경우가 많아 착잡하다.
애초에 인터넷으로 엮지도 엮이지도 말았어야 했는데.

길고양이의 약 15%가 살인진드기병에 걸렸다고 하며 개에 물리면 몸이 괴사할 수 있다고 한다

길고양이쪽은 서울대학교 수의과대학에서 2016년 8월 22일 연구 결과에서 그렇게 나왔다고 한다.

캣맘, 개빠, 동물권, 채식주의, 생태주의, 환경단체, 페미니즘, 정치적 올바름의 심리는 이상하다.
길강아지와 길고양이와 길에 다니는 야생화된 동물 때문에
사람이 길동물한테 물리면 죽을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아예 모르거나 알아도 부정하는 것 같다.

저들의 행동원리는 백신 거부 음모론과 다를 바 없다.
책임은 다른 사람한테 미뤄놓고 다른 사람이 죽으면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저들이 바라는 것은 물증중심주의가 아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진실인지 거짓말인지 검증하지도 않는 비틀린 심증중심주의다.
도덕적인 말이라도 물증이 불충분하면 남한테 악의적인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런 가능성을 저들은 생각하지 않는다. 도덕은 면죄부가 아니다.

악의 평범성에서 파시즘의 평범성으로

인터넷을 교육적 목적 혹은 사회화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처음부터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진 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안다.
하지만 두 목적을 온라인계는 간과하고 있다.

그렇다고 인터넷에 평생교육 체계가 마련된 국가기관 사이트를 세운다고 하면
정치적 올바름마저 반대할 것이다.
'국가 검열이다.', '인터넷에 숨겨둔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들키기 싫다.'라는 논리로 반대할 것이다.

그런데 네티즌들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나 있나.
현실의 어두운 면을 들키기 싫어서 꽁꽁 숨겨서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고 파시즘 친목질 집단을 만드는 건강하지 못한 집단으로 전락한 주제에
대화 주제가 안 맞으면 다양성 따위 버리고 맞는 주제만 말하라고 압박을 넣는 집단으로 전락한 주제에
현실의 사람들에게 훈계나 하고 앉아 있는 것인가.

네티즌들은 자신들이 인터넷 독재까진 안 갔다고 부정할 것이다.
하지만 인터넷에선 다수가 다수를 독재하는 이상현상이 벌어지기 쉽다.
오프라인 독재가 중앙집권이라면 온라인 독재는 독재자 꿈나무들끼리 숙청을 지속하는 끝없는 싸움이다.

이러한 인터넷 독재 속 숙청은 평범하다.
오히려 평범해서 무섭다.
비정상적인 사람이 독재하면 그렇다고 납득이라도 하지.
자칭 정상적인 사람이 독재를 정당화하고
도덕과 윤리를,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는 기준점을 훼손한다.
기준점 중 가장 정확한 물증중심주의를 훼손한다.
나중에 문제가 생겨도 회피하면 되니 먼저 공론화하고 보자는 무책임한 태도들.
자신의 뒤를 봐주는 이익집단 앞에선 한마디도 못하는 위선자들.
한마디를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고 잘못되었다고 생각이라도 하고 입을 다물기라도 해야 할 것을.

더욱 가관인 것은 이런 인터넷 독재를 보고도
기자들과 사이트, 커뮤니티, SNS 운영자들은 돈이 된다는 이유로 자유의 존중이라는 명목으로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
솔직히 그들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
인간이 한 번 주관적인 숙청의 기준을 객관화하려고 노력해봐도 거듭할수록 자기 진영까지 돌아온다.
숙청에 숙청을 거듭한 결과 자기 편마저 피해망상으로 의심해버리면
누가 돈을 대줄까. 누가 광고 클릭수를 채워줄까. 누가 제휴 사이트에서 구매해줄까. 누가 선거에서 표를 대줄까.
인터넷의 갑은 을들에게 과감하지 않다. 왜냐하면 네티즌들은 이미 충분한 슈퍼 을들이기 때문이다.

더욱 가관인 것은 네티즌들이 슈퍼 을이면서 슈퍼 갑이라는 것이다.
조금만 자신보다 낮다 싶으면 슈퍼 갑으로 변모해서 슈퍼 을을 물어뜯는다.
토론, 논쟁, 비판이라는 권리를 가진 슈퍼 갑이자 슈퍼 을들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물증중심주의에 근거한 교차검증을 하지 않는다.

인터넷의 갑은 세계적 대기업을 제외하면 경제적 서열이 낮다. 대체로 자영업자들이다.
자칭 슈퍼 을들은 세계적 대기업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몰래 구매하는데
자영업자들에게는 허위 별점 테러를 하는 등 가혹하기만 하다.
대기업은 소송이 무섭지만 자영업자들은 소송비도 돈이라 자기한테 함부로 못 대할 거라고 비웃으면서 계산하는 속물들이 많다.
정작 네티즌의 위치는 자영업자보다 조금 낮은데도 동족혐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진상손놈짓을 확실히 막지 않으면 자기가 영업직을 할 때 피해를 볼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
소비자일 땐 정당한 물증 없이 생산자를 비웃을 생각이나 하면서
생산자가 되고 나서야 소비자들의 자정작용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깨닫는다.

네티즌들은 무책임하다.
생산자가 되기 전 소비자로서 생산자에게 가난의 고통과 애정결핍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과도한 친목질과 비위 맞추기만 강요하면서
스펙과 다양한 사람에게 건전한 애착관계를 형성하는 방법은 뒷전이다.
불건전한 애착관계를 맺은 사람들끼리 끌려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망상하는 팔푼이들에 불과하다.

민주주의는 파시스트를 키우는 요람이 되었다.
파시즘을 키우는 요람이 되었다.
민주주의는 살려달라고 빌고 있지만
자기가 파시스트가 된 것도 모르는 팔푼이들은 민주주의의 투사라고 자칭하면서 민주주의를 죽인다.

인터넷 방송보다 TV 방송이 차라리 낫다

TV 방송과 인터넷 방송의 차이는 중요하지만 사소한 것 딱 하나다.
서양 다큐멘터리가 육체노동자, 노가다 하는 사람의 노동을 보여준다는 것.

사소하지만 왜 중요하냐면
신문과 TV 방송이 대세일 시절에는
적어도 자기가 보는 신문이 배달부의 피땀으로 만든 것이고
TV 방송 속 노가다 하는 사람을 소개한다는 자각이라도 있었다.
육체노동자를 무시하는 풍조가 적었다.

그런데 인터넷 방송에선
항상 안전한 컨텐츠만 보여달라고 한다.
TV 방송에선 간신히 허가를 받아 기업 속 육체노동자의 삶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인터넷 방송계는 그런 데에 관심이 없다.
이는 한국 방송과도 관련이 있는 공통점이다.
안전한 컨텐츠만 중시한 나머지
실제 노동자들이 어떤 삶을 사는지는 하나도 다루지 않는다.
내가 의식주를 충족시킬 수 있는 이유가
송전탑에서 전선을 관리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피땀으로 이루어졌다고
공업 노동자가 만든 시설 덕분에 이루어졌다고 하나도 감사해하지 않는다.
그리고 한국 방송계와 시청자들과 인터넷 방송계는 그런 타성에 젖어 있다.
예능으로만 눈을 가리면서 실제 노동자의 힘든 삶을 하나도 보여주지 않는다.
내가 소비하는 물건이, 내가 쓰는 물건이 노동자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보여주지 않는다.

도대체 뭔 거부감이 있길래 육체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는 것을 천대시할까.
뭐 때문에 한국 방송계에선 삶의 어두운 부분을 보여주지 않는 자기검열에 일상적일까?
반사회적 방송을 하지 말라고 어르신들과 학부모층이 항의를 넣을까봐?
현실을 있는 그대로 아이한테 가르쳐주지 않으면 아이는 적나라한 말로 어른들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살 뿐인데
정서에 안 좋다고 무조건 육체노동자의 피땀이 흐른 부분을 배척하고 무시해야 하는 것인가?
아이는 당신들 생각보다 똑똑하다.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거였으면 왜 방황하는 청소년들이 생기겠는가?
조선 시대 때도 사농공상으로 육체노동자를 천대시하더니 한국은 그때 편견에서 변한 게 하나도 없었다.
혹시 부모 세대가 자식 세대한테 욕먹을까봐 검열하는 것인가?
사회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내부고발자가 될까봐?

인간은 타성에 젖어도 너무 젖었다.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만 물증 없이 보면 기분 좋겠지.
시청률이 그렇게 나오니까 동서양 차이가 있다고 변명하겠지
그러면 취업 다큐멘터리와 범죄 조사 다큐멘터리를 중점적으로 방송하는 서양 방송계가 바보란 말인가?
중점적으로 다루지 않는 한국 방송계와 그 시청자들은 똑똑한 거고?

평생 보기 좋고 듣기 좋은 것만 보고 싶다면
인간이 진실과 거짓조차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을 모른
과거와 지금의 쓰레기 같은 자기 자신에게 죄책감이라도 느끼고 후회라도 해야 할 것이다.

방송과 언론의 문제점

내가 생각하는 각국의 문제점

한국의 경우 허구한날 연예계의 친목질, 정파 싸움만 강조하는 언론,
캣맘과 개빠의 입맛에 맞지만 정작 비판을 하지 않는 예능 프로그램.
시청자가 얼빠라서인지 정치병자라서 이렇게 된 건지,
프로그램 기획자들이 이를 유도한 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뭐가 먼저든 둘 다 문제라는 점은 변함없다.

일본의 경우 몸과 말로 때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는 기괴한 문화 때문에
막말 개그식 개그맨(게닌)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주류 시청자라는 근거 없는 자부심을 가지며
야쿠자들의 비밀 공작에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도 자성하지 않고 침묵하는 넷 우익이 고정 시청자층으로 있다.
그래서 넷 우익의 입맛에 맞는 방송만 한다.
히키코모리가 많은 넷 우익을 돈으로 내치고 싶지만 야쿠자한테 맞아죽을까봐.

중국과 아프리카와 이슬람과 중동은 생략한다.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아니까.

대기업과 재벌의 광고 강요에 의한 언론계, 출판계, 촬영팀, 온라인 업계의 노동이 너무 과중하다

언론계의 노동이 너무 과중하다.
신문 기자든 아나운서든 촬영팀이든
양질의 프로그램을 하루마다 계속 소개해야 하니 번아웃이 온다.
그런데 전 세계의 어느 언론사도
양으로 승부할 수밖에 없는 현 체계를 개선하려 하지 않는다.

방송계에선 편법을 썼다.
사실관계를 보도할 시간을 휴식 시간으로 벌지 않고
연예인 신변잡기나 정치인 인터뷰로 버는 기괴한 편법.
관행이었으니까 이해해달라는 무언의 부정적인 집단지성의 비참한 말로다.
정치인이나 좆문가는 이름을 알릴 수 있고 방송계는 날로 먹으며 쉴 수 있으니 일석이조다.
컨텐츠를 객관적으로 정리할 여유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휴식 시간을 갖지 않고
미성숙한 어린 아이들과 취업 좌절로 정신이 나가 판단능력을 상실한 히키코모리 등의 약자한테
잘못된 가치관을 심어줄 수 있는 컨텐츠를 만들어놓고서
아직도 검열론을 외치면서 정신을 못 차리는 게 한국 방송계다.
저것들이 하는 검열론은 착한 검열이고 무고한 시청자가 선동당하는 건 검열하지 말라는 건가?
이런 게 언론계에서 바라는 표현의 자유인가?
적어도 매일 밤 새는 건 일기예보와 공공의 가치가 달린 국가적 사안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왜 기레기가 기레기 소리를 듣겠어?

대기업과 재벌

대기업과 재벌도 문제다.
매일 방송계한테 광고해달라고 반강제로 강요해놓고
거부하면 불이익을 받을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놓고
방송계에 문제가 생기면 방송계 책임이라고 돌릴 분위기다.
이게 건전한 기업 생태계인가?

결국 방송계에선 대기업의 광고를 발주하길 반강제로 강요 받는 분위기 속에서 고뇌했다.
연예인과 음악인을 데뷔시켜놓고 불공정계약으로 삥땅치는 악습을 해결하는 건 뒷전인 개판 5분 전 상태.
연예인과 음악인 만큼 대기업의 광고를 잘 발주할 사람들이 없다.
외모지상주의와 음악으로 멋 부리는 것에 시청자들은 생각보다 매우 약하다.
그 이면에 대기업과 재벌부터 피라미드 구조로 악습이 형성되어 망가졌다는 건 생각하지도 않고
빠질을 하거나 까질을 하거나 진실과 거짓조차 구분을 못하는 시청자층만 많아졌다.

게다가 대기업의 광고 발주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방송계, 연예계, 음악계에만 영향을 준 것이 아니다.

출판계

출판계의 노동도 과중해졌다.
솔직히 말해서 순수문학 쪽은 돈이 안 된다.
옛날엔 순수문학이 유행이었지만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순수문학이 약자라는 건 사실이다. 불법계약 문제가 많이 심각해서 구제불능인 약자일 뿐.
서열이 낮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어쨌든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 지지 작가들이 말하는 것조차 딱 하나 맞는 게
작가에게 강요되는 노동 강도다.

대기업의 광고를 항상 발주해야 한다.
순수문학은 긴 시간 공모전을 들여 출판이 너무 느리고
대기업과 재벌의 문제에 저항정신을 가진 이미지라 발주가 어렵다.
n간잡지로 광고를 요구한다.
일본은 주로 만화잡지에서, 한국은 잡지계에서 이런 문제가 강조된다.

알게 모르게 순수문학계에서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증오가 많이 쌓였을 거다.
일개 네티즌이 고뇌한 것을 출판계라는 집단지성은 더욱 오래 고뇌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도서정가제라는 해결책을 준비했겠지만
계약 구조가 불공정하게 고착되어 고치기 힘들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분위기인 듯하다.
대기업과 재벌의 과도한 광고 발주는 아직까지는 법조계에서 불법이라 판단하지 않았는데
출판계의 계약서가 불공정계약을 내포했을 가능성이 높은 건 불법적이기 때문이다.

한국 출판계는 트위터를 통해 대기업과 재벌에 대해 쌓여온 스트레스와 증오를 연설했다.
진보좌파 언론계와 같이 연설했다.
대기업과 재벌의 과도한 광고 발주 문제가 진작에 공론화되었어야 하는 건 맞는 일이다.
일본에서는 야쿠자가 뿌리 깊게 유착되다 보니 불가능하겠지만
한국이라면 가능성이 있는 건 맞다.

결국 페미니즘과 정치적 올바름은 진보좌파 언론계와 출판계의 입장을 대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러다 보니 프레임이 꼬였다.
여성인권 해방과 대기업과 재벌에 대한 항의는 전혀 다른 문제다.
진보좌파 언론계와 출판계의 노동강도를 줄이자는 메시지가 여성인권과 연계되어 뷔페미니즘으로 외부에 인식되었다.
노동강도를 줄이기 위해 온갖 프레임을 끌고 오다 보니
여성에 대한 노동강도를 줄여야 한다는 프레임이 강조되는데 거기에 근거는 부족하거나 이상하다.
대기업과 재벌 타도를 위해 프레임을 무작위로 끌고 왔으니 그 중 먹히는 게 있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겠지.
역풍을 감수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겠지만...

하지만 대기업과 재벌은 꼼짝하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과도한 광고 발주 문제는 일단은 합법이기 때문이다.
공정위 같은 데서 조사하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겠지만
노동 강도를 줄여달라고 호소하는 진보좌파 언론계와 여성계는 일단은 합법인 부분에 섣불리 파고들어가기 어렵다.
무엇보다 대기업과 재벌에서 광고 수주가 떨어지는 걸 반길 리 없고,
현실과 타협한 직장인들이 공정위를 불러들였다고 진보좌파 언론계와 여성계에게 증오를 품을 것이다.

무엇보다 대기업과 재벌 타도에 연예계와 출판계(특히 순수문학계)의 불공정계약이 아킬레스건이다.
심증으로 따지면 신입 작가를 들여야 하는데 대기업의 광고를 받지 못하니 원가 절감도 해야 한다는 원인과 결과였을 것이다.
하지만 정의를 외치는 쪽이 불공정계약 문제의 당사자가 되면 누가 지지하겠는가.
그나마 연예계는 불공정계약을 개선하려는 움직임에 적극적이니 낫지만
역시 출판계의 불공정계약 문제가 아킬레스건이라는 건 변함이 없다.

진보언론의 문제

보수언론이야 대기업과 재벌에 옹호적이니 길게 적지 못한다.
길게 적으면 세 줄 요약 어디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다.

반대로 진보언론의 문제는 메시지의 정당성보단 투명성이다.
진보언론은 대기업의 후원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시민후원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후원자를 공개할 수 없다. 후원자의 보복을 방지하기 위해서 공개할 수 없다.
후원자를 공개할 수 없다는 것은 후원금의 출처를 공개할 수 없다는 것과 같다.

동물권, 채식주의, 흑인 인권 운동도 비슷한 문제를 지닌다.
동물권과 채식주의는 진보와 연관이 있고
흑인 인권 운동은 백인우월주의자들에게 보복당할 위험이 있다.
투명성 있게 공개하면 보복 위험이 있고, 공개하지 않으면 후원금의 투명성이 문제가 된다.

진보계는 반성해야 한다.
일반 시민보고 자신들을 버리지 말아달라고 하지만 일반 시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자.
아무 생각 없이 혹은 순수하게 모르거나 미성숙해서 진보계에 시민이 후원했다가
갑자기 내부고발자로 몰리는 일은 방지해야 할 것 아닌가.
괜히 힘 없는 시민에게 질타해서 후원 감소를 겪지 말길 바란다.
당신들에게 그들은 내부고발을 감수하면서까지 후원한 소중한 고객 아닌가.

당신들은 내부고발을 감수하지 못할 거면 꺼지라고 말한다.
당신들의 관점에서는 맞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당신들은 일관성을 가졌어야 했다.
시민이 후원을 끊었다고 자신들을 싫어한다는 피해망상에 빠지지 말았어야 했다.
시민은 당신들을 배신한 것이 아니다.
당신들 곁에 있다가 사회에서 매장당하기 싫다는 것이다.
당신들은 시민이 아니라 대기업과 재벌에게 일관적으로 화를 냈어야 했다.
같은 피해자로서 섭섭하다는 감정을 피해망상으로 확대하지 말라.

웹툰 및 웹소설

이쪽은 출판계보다 사정이 낫다.
휴재하기 충분한 타이밍이다 싶을 때 휴재하면 되는 분위기다.
다만 책임은 작가가 지는 분위기다.
대기업 광고에 휘둘리는 오프라인 언론과 출판계와 달리
웹툰과 웹소설은 그런 게 처음부터 적었으니까.

오히려 대기업 광고와 웹툰과 웹소설은 시너지를 낸다.
대기업만 광고를 넣는 게 아니라 온라인 시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중소기업도 넣는다.
왜냐면 웹툰과 웹소설은 원래 정파 분쟁과 노사갈등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시작되었으니까.
출판 타이밍이 자유로워 노동 강도가 오프라인 출판계보다 덜해
대기업과 재벌의 광고 발주를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구조상 웹툰계와 웹소설계는 대기업으로 인해 고생한 적이 적을 가능성이 높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시작된다.
오프라인 진보좌파 언론과 출판계는 웹툰계와 웹소설계에게 대기업을 타도하라고 한다.
기존 출판계와 언론이 없었으면 웹툰과 웹소설은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빚과 은혜를 갚으라고 호소한다.

하지만 정파 분쟁과 노사갈등과 동떨어졌으며
그냥 작가들과 독자들이 현실의 고난함을 잠시 쉬어가려고 만든 곳이 웹툰과 웹소설이다.
오프라인 진보좌파 언론과 출판계의 움직임에 동참해서 피난처를 전쟁터로 만들자는 논리는 설득력이 없다.
무엇보다 오프라인 출판계는 한때 불공정계약 문제의 주동자였다.
웹툰계와 웹소설계에서 오프라인 출판계를 믿으라는 것이 말이 안 된다.

웹툰계와 웹소설계의 독자들은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는 정치병자들이 싫어서
정파 분쟁이 싫어서 피난을 온 사람들이다.
정파 분쟁에 아직도 매몰된 오프라인 진보좌파 언론과 출판계의 사실상 정치병자가 되라는 강요에
분노해 반대할 수밖에 없다.

인터넷의, 웹툰과 웹소설의 주역은 네티즌이다.
정파 상관없이 언론과 출판계는 적나라하게 말해서 이념을 퍼뜨리려고 네티즌에게 숟가락을 얹은 것에 불과하며
본인들의 문제를 네티즌까지 퍼뜨린 주범들이다.
그렇다고 네티즌들의 문제가 없다는 것은 전혀 아니지만
오프라인 정파의 문제에 네티즌을 끼어들이는 것은 억지 논리에 불과하다.

온라인 거래&민원, 택배기사와 민원 처리 담당으로의 부담 전가

온라인 거래와 민원이 흥한 것도 문제가 된다.
온라인의 물품, 컨텐츠 생산자, 민원 처리 담당 공무원에게 소비자와 국민으로서 책임을 요구한다.
오프라인 시절에는 요구가 일정해 정량화라도 할 수 있었지
온라인 시기에는 변덕스러운 소비자나 네티즌이 많아서 정량화도 객관화도 불가능하다.

빨리빨리 보내기만을 추구한다.
업체라면 그럴 수 있다. 생필품만 주문한다면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생필품이 아닌 문화적 과시용도의 물품을 주문하는 문화가 문제가 된다.
모든 것을 노동자의 피땀이 흐른 소중한 물건으로 보지 않고,
택배를 빨리 받지 못해 자랑질하지 못해 항의할 것만 생각하는 소비자와 손놈들이 많아졌다.
육체노동이 없으면 정신노동과 문화도 없다는 법칙을 모르는 건지 무시하는 건지 모를 손놈들이 많아졌다.
원시시대 석기시절로 돌아가면 을질조차 못할 손놈들 주제에 현대 시대에 참 대책 없이 적응하고 앉은 것이다.

원시시대 석기시대부터 시작해서 중세 근대 현대까지 힘겹게 거쳐온 길을
왜 사람은 쉽게 생각하는 것인가?
손놈 본인들이 그럴 수준이 안 되니까 생각도 못하고 자기혐오와 열등감을 부정하는 것일까?
장신구로 화려하게 치장한 것이 아니면 멸시하는 천박한 속물들이다.

결국 자원 고갈이나 원시시대 석기시대로 퇴화될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천박한 손놈 속물들이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성장하지 않고 책임을 지지 않아서 과도한 물품 배송을 요구하는 바람에
택배기사들과 민원 담당과 고객센터한테 온갖 욕설이나 지껄이는 것이 아닌가.
옛날 전쟁터였으면 도태돼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인물군상들이 왜 현대 시대가 편하다고 타성에 젖는 것인가.
자기들이 유언비어를 퍼뜨린 걸 정말로 객관적인 전문가가 다 수습해야 한다는 건 생각도 안 하는 것인가.
만만한 택배기사들과 민원 담당과 고객센터에게 욕설할 깡이 있으면 대기업과 재벌의 병폐도 좀 까봐라.

인터넷 방송과 세금

인터넷 방송인이 돈을 잘 번다고 해서 그게 다 수익으로 들어간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고 그런 얘기는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잘 나오지 않는다.

최근 버추얼 유튜버가 유행하면서 몇몇 버튜버가 말했다.
누진세가 붙어서 실 수령액은 세간의 예상보다 적다고.
시청자들은 장비에 투자하는 것까지 합해서 계산해야 한다고 한다.

아프리카tv와 트위치와 유튜브 시절에는
시청자층이 세금에 관심이 없었다.
키리누키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라 알려질 일이 없었다.

그런데 버추얼 유튜버가 세금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하면서
키리누키로 알려지면서 세금 관련 정보의 진입장벽이 조금 낮아졌다.

세금이 효율적으로 쓰인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없는 자에게 깡패짓으로 돌아오는 게 돈인 게 현실이니까.
어차피 어용으로 다 갈 거 아냐.

ROID와 니코니코 동화

VOCALOID. 보컬로이드. 니코니코 동화. VOICEROID. 보이스로이드.
한때 네티즌들이 희망을 걸었던 문화 중 하나였다.
뭐하고 있냐 몸통아 같은 창작물이 나오기 쉬운 분위기의 서브컬처.
합성물과 MAD.

합성물과 MAD는 고갈되기 쉽다. 석유 고갈보다 중요성이 낮지만 비슷한 문제다.
한정된 물건을 어떻게 개그와 자원으로 어떻게 쓰는가의 문제다.
실시간으로 웃긴 것일수록 재미있다는 인간의 습성에 의해
영상 서브컬처는 합성물, MAD, 인터넷 방송, 버추얼 유튜버로 발달했다.
정적인 영상물일수록 한계가 있다.

니코니코 동화 시절이 좋았다고 말하는 서브컬처 팬들은
버려진 장소(Abandoned)와 폐허(Ruin)와 고딕(Gothic)과 플레이스테이션 2까지의 몽환적이며 슬픈 포스트 아포칼립스 3D 감성도 좋아했다.
언제라도 세상이 멸망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안개 같은 희망을 가진다.
720p, 1080p의 고화질 시대에선 느낄 수 없는 감성이 되어버렸다.
아직 일본 사회가 극우화되기 전 반전주의가 가득했던 그 감성이었다.

초창기 버츄얼 유튜버는 니코니코 동화 시절의 정서가 있었다.
아직은 불안정한 시장이라 가능했던 현상일지도 모른다.
지금이야 시장이 커져서 세상이 멸망해버릴 것 같은 고통 속에서 희망을 가진다는
슬픈 안개 같은 정서는 없어졌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일이다.
방송인이 행복한 걸 싫어할 팬은 없다.

언제부터인가 스마트폰 시대화 고화질 시대가 오면서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다.
세상이 깨끗해져서 멸망할 일이 없을 거라고. 장미빛 미래만 가득할 거라고.

그런 미래 따윈 오지 않는다.
언제든지 원시시대와 석기시대로 세상이 퇴화하거나 멸망할 수 있다고 경계하지 않으면
현실을 부정하는 데에만 안주할 뿐이다.
우연히 운석이 심하게 떨어져내려 유혈과 고통이 낭자할지도 모르는 사태조차 대비하지 못하는 게 인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