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공화국: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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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
17세기 초에는, 카톨릭의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카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각주==
==각주==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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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19일 (일) 12:32 판

베네치아 공화국의 국기

이탈리아어 : Serenissima Repubblica di Venezia


한국어 : 가장 고귀한 베네치아 공화국


영어 : the Most Serene Republic of Venice


에스파냐어 : Serenísima República de Venecia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 북서부에 위치하던 이탈리아계 해양 공화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697~1797)
비잔티움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치살피나 공화국[1]
프랑스 제1제국
오스트리아 제국

역사

초기

베네치아에 최초로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5세기 경으로 추측된다. 베네치아 공화국의 건국 설화에 따르면 로마 말기 야만인 들의 침공으로 벌벌 떨던 마을 주민들이 그 도시 사제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그 때 사제가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하자 하나님이 개펄로 도망쳐라고 했고, 그 마을이 그렇게 도시가 되었다고 한다. 697년 최초로 도제[2]로 파올로 루치오 아나페스토를 선출하였다.

초기 중세

810년에 베네치아에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서로마 제국[3]의 황제인 피핀이 침입해 온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탈리아에 존재하는 마지막 비잔틴 제국령이였다. 육지와 가까운 편이었던 베네치아의 수도[4]를 점령하고 그들을 추적하였으나.... 베네치아의 복잡한 개뻘에 갇히고만 함선들은 결국 화살 공격을 받고 모두 불타버린다. 그 뒤 베네치아 공화국이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덤

1000년 그리스도 승천일에 출발하였으며, 도제 피에트로 오르세올로 2세가 이끄는 베네치아 함선들은 과거부터 베네치아를 꾸준히 괴롭혀 왔던 아드리아해 연안의 해적들을 소탕하는데 성공한다. 이에 대한 치하로 비잔틴 제국은 베네치아의 도제에게 달마티아 공작위를 제공한다. 그 이후로 아드리아해 동안은 베네치아가 멸망할 때까지 베네치아령이 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시작한 축제가 바로 바다와의 결혼식으로, 이 역시 베네치아가 멸망할 때 까지 지속된다.

십자군

십자군 이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은 사실상 동지중해의 교역을 독점하여 엄청난 부를 쌓고 있었다. 제1차 십자군 원정 이후 수백척의 베네치아 함선이 도시 내에 베네치아인 거류구를 얻는다는 조건으로 팔레스타인의 해양 도시를 점령하여, 그들을 돕기도 하였다.

그리고 1202~1204년의 제 4차 십자군 원정에서는... 악마와 계약한 듯한 모습을 보여준다.

  1. 이집트의 파티마 왕조와 교역 계약을 갱신하면서 숨은 조항으로 이슬람교도를 공격하거나 십자군에 참가하지 않는 다는 조항을 넣었다.
  2. 그 뒤 제 4차 십자군을 위해 프랑스의 제후들이 그들에게 접근해 왔고, 돈을 받고 그들을 당시 파티마 왕조가 점령하고 있던 예루살렘에 드랍해 주기로 한다.
  3. 제 4차 십자군이 그 돈을 못내고 있자[5]채무 기간을 유예해 준다는 조건으로 당시 카톨릭 교도 였던 헝가리 왕의 통치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하게 했다. 다름아닌 십자군[6]
  4. 자다르를 점령한 뒤 비잔틴 제국에서 왕위 계승에서 밀린 왕자가 찾아온다.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 부탁을 하는데 그 왕자가 부탁한 것은 다름아닌 같은 기독교도(종파가 다르기는 했지만)이자 당시 유럽권 최대의 도시였던 콘스탄티노플의 공격
    • 도시 점령시 십자군이 베네치아에게 지고 있던 모든 빚을 비잔틴 제국이 대신 지불한다.
    • 도시 점령시 비잔틴 제국의 성지 수호를 위해 천 명가량의 기사를 십자군 국가에 파견한다.
    • 카톨릭과 정교회를 통합한다.[7]
  5.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는데 성공한다. 콘스탄티노플의 육지 쪽은 대포 발명 전까지는 함락이 사실상 불가능 하였지만 함선들을 이용해 금각만 쪽으로 공격한 것.
  6. 하지만 전임 황제가 돈을 흥청망청 써대서 빚 변제도 못하고, 군대도 못 보내고, 교회 통합은 사실상 불가능 하였으니... 계약조건을 이행하지 않는 모습을 본 십자군은 베네치아 거류구와 군사 주둔지가 큰 화재를 당하자, 이를 명분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재점령 한다. 산 마르코 대성당 앞에 있는 네 마리의 청동말도 이 때 가져온 것이다.
  7. 그 뒤 성립된 것이 라틴제국. 제 4차 십자군의 성공으로 베네치아는 크레타, 에우보이아, 코르푸 섬, 베네치아령 이오니아, 필로폰네소스 반도 등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경쟁자였던 제노바나 피사 등의 나라를 동지중해 무역에서 격리시키는데 성공하였다. 라틴제국이 존속할 때 까지 '동로마제국의 3/8의 주권자'란 칭호도 덤.
  8. 그렇게 베네치아는 동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15세기

15세기 초에는 이탈리아 내륙부와 달마티아 연안의 영토를 넓히는 데 주력했다. 밀라노 공국을 쳐서 포 강 연안을 따라 유럽행 교역로를 완성하는 한편, 헝가리가 내전에 휩싸였을 때 이스트리아 반도에서 알바니아에 이르는 아드리아해 동안을 장악하였다.

1489년, 십자군 왕국 중 하나였던 키프로스 왕국 전역을 흡수한다

15세기 말의 대 터키 전쟁

1463년 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의 모도네에서 터키 소속의 함선이 사라졌다는 이유로 터키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아르고스[8]를 함락 당하였으나, 헝가리, 알바니아, 페르시아와 동맹을 맺고 페라라 제후국의 에스테 후를 고용하여 터키를 공격한다.

하지만 1468년 알바니아 군의 지도자였던 스칸데르베그가 사망하고, 터키군에 의해 1469년 베네치아의 영토였던 에우보이아가 함락된다.[9]

1472년에 사실상 용병화[10]되어 있던 헝가리 군이 터키랑 강화 협상을 체결하였으며, 1473년에는 페르시아가 터키에게 크게 깨지는 바람에 전선에서 탈출 하였다.

그 뒤 1474년에는 터키군은 베네치아의 알바니아 거점이던 스쿠타리(오늘날의 알바니아에 위치한 슈코더르)[11]를 공격하나 실패한다. 동시에 이스켄테르베그가 이끄는 터키군 기병대가 이탈리아 내륙부를 공격하여 프리올리(현 이탈리아의 프리울리베네치아줄리아 주)를 공격한다. 그 불길이 산 마르코 대성당의 종루에서 보일 정도 였다고...

제 1차 스쿠타리 공방전 이후, 1475년 베네치아 공화국과 터키 간의 강화 협상이 진행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 그 결과로 6개월 간의 휴전 을 얻었으나, 그 도중에 터키가 흑해 연안의 타나(현재의 러시아 돈 강 삼각주에 위치했던 도시로 당시 베네치아령)[12], 카파(현재크림 반도에 위치한 페오도시야로 당시 제노바령)[13]가 터키군에 함락되어 러시아-흑해 교역 루트가 막힘과 동시에 강화 역시 물 건너 가게 되었다. 1476년 헝가리가 재 참전하였다. 1477년에는 이스켄데르베그가 이끄는 터키 기병대가 베네치아 본토 속령을 다시 유린하기 시작했으며 터키군이 스쿠타리를 두번째로 공격하나 실패하고 만다.

1477년 말 베네치아 공화국의 첩보는 중대한 정보를 얻었다. 이는 나폴리 왕국이 헝가리 왕국과 손을 잡아 터키 제국과 강화에 나선다는 내용이었다. 그렇게 되면 아드리아해 서안을 장악하고 있는 나폴리 왕국에 의해 아드리아 해를 통한 교역이 막히게 되고, 또한 헝가리 왕국과 터키 제국이 각각 에게 해 방면과 달마티아 방면으로 쳐들어오는 최악의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이에 베네치아 공화국은 터키와 단독 강화를 결정하게 된다. 협상은 1년 간 난항을 격었고, 중간에 터키군이 다시 스쿠타리를 공격하였으나, 1479년 1월 25일 강화 협상이 타결되었다.

그 결과로 베네치아는

  1. 베네치아는 필로폰네소스 반도 내륙 지방, 에우보이아, 그리고 스쿠타리를 포함한 알바니아 지방을 터키령으로 인정한다.
  2. 또한 터키는 코르푸, 모도네와 코로네(필로폰네소스 반도 남단에 위치한 도시, 각각 현재의 메소니와 코로니)[14]의 기지, 그리고 크레타를 포함한 에게해 상의 섬을 제공한다.
  3. 베네치아는 과거 터키령에서 발굴한 백반광의 전매료 미불에 대한 배상으로 15만 두카토 중 10만 두카토를 2년 이내로 분할상환으로 지불한다. 또한 관세[15]로 매년 1만 두카토를 지불한다.

엄청나게 굴욕적인 결과였다. 아직 빼앗기지 않았던 스쿠타리를 주어야 했고...[16]그리고 베네치아는 이교도랑 손을 잡았다는 이유로 욕을 오질나게 퍼먹는다. 자기랑 같이 평화협상을 준비하던 헝가리에게 마저도. 그래도 베네치아로써는 동방 무역을 유지할 수 있었으니 다행이었던 셈

캉브레 동맹 전쟁, 키프로스 함락, 그리고 레판토 해전

1499년에서 1503년 까지의 터키 제국과의 전쟁의 걀과로 코로네와 모도네를 상실하였으나 케팔로니아 섬[17]과 이타카 섬[18]을 얻었다.

그리고 1508년에 캉브레 동맹 전쟁이 발발한다. 기존의 로마냐 지방을 두고 교황령과 경쟁하다가 최악의 사태가 온 것이다. 돌린 적국만 해도 교황청,신성 로마 제국,.프랑스,스페인,페라라 공국 등. 당대 유럽의 슈퍼파워라 할 수 있는 나라들이 다 모여서 순식간에 베네치아는 본토 속령을 상실하였다.

그 뒤 베네치아가 외교력을 총 동원하여 먼저 아풀리아(현 이탈리아 풀리아 주)의 항구를 스페인에게 할양하여 전쟁에서 나가게 하였다. 그 뒤 교황청이 베네치아 공화국이 사라질 시 스페인과 프랑스가 교황청을 공격할 것을 우려하여, 다시 베네치아랑 동맹을 맺는다. 그 결과 1509년에는 교황청과 스페인과 함께 프랑스를 공격하였고, 다시 본토 속령을 수복하게 된다.

그리고 1570년, 키프로스제 포도주가 너무나도 먹고 싶었던 셀림 2세는 당시 베네치아 령이었던 키프로스를 공격한다. 이에 넓은 키프로스에서 터키 군을 상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 베네치아는 파마구스타[19]를 중심으로 방어에 나선다. 그 뒤 유럽 국가들과 함께 신성 동맹[20]을 발족하여 터키를 공격한다. 주요 국가는 스페인과 베네치아 공화국, 그리고 교황청인데, 목표[21], 함대장[22], 함대수[23]로 대립하였고, 그 와중에 파마구스타가 함락되고 말았다. 2개월 후 터키 해군을 레판토에서 무찌르기는 하지만 스페인에게 완전히 질려버린 베네치아는 터키랑 단독으로 강화한다.

1575년에는 베네치아 전역에 흑사병이 돌아서 17만 5000명에 이르는 인구가 1581년에는 12만 4000명까지 줄어들게 된다. 이후 베네치아의 인구는 다시 수복하지 못하였다.

17세기

17세기 초에는, 카톨릭의 주교가 베네치아 안에서 가지는 지위를 두고 교황청과 대립하게 된다. 당시 반종교개혁의 바람이 카톨릭 세계에서 불고 있었지만 베네치아는 세속적인 편에 속해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재판소에 경우 판사 3명 중 1명은 성직자가 아닐 정도로 말이다. 당시 본토 속령에서 농업을 통해 세를 불리던 교회에 세금을 거둘려던 베네치아 공화국에 교황청은 베네치아에 성무 금지 명령을 내린다. 이에 베네치아는 강제로 성직자 들에게 성무를 하게 하는 것으로 응수하였고, 이 대립은 베네치아가 세금을 '소극적'으로 걷는 것으로 끝이 났다.

각주

  1. 프랑스 제1공화국이 베네치아를 점령하고 그 영토에 세운 괴뢰국가
  2.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도자 명칭
  3. 오도아케르의 멸망 이후에 세워진 서로마 제국을 의미한다.
  4. 당시의 수도와 지금의 수도는 위치가 달랐다.
  5. 그 돈의 량이 많은 것은 아니었다. 다만 프랑스 쪽에서 쪽수 계산 - 왕 급의 제후가 여러 명 참가한다지만 프랑스 왕이 동원 가능한 군데의 몇 배 가량은 되었다. - 을 잘못해서 생각보다 사람들이 덜 오자, 자연스럽게 낼 수 있는 돈이 줄어들었고, 그 결과 베네치아 인근의 섬에 틀여 박힌 채로 십자군이 공중해체될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6. 이 때 교황 특사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무것도 아닌 정보를 주고 로마로 보낸 뒤에 목적지를 알려주지도 않고 떠나버렸다. 찾아오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7. 이 때문에 자다르를 점령하자 십자군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파문에 처한 교황도 이 때에는 다른 카톨릭 도시를 점령하지 않는 조건으로 허가한다. 가는 길에 카톨릭교도의 도시는 없었으니 사실상 아무런 조건도 없었던 셈
  8. http://ko.wikipedia.org/wiki/아르고스
  9. 이 때 베네치아의 수뇌부가 받았던 타격은 꽤나 되었었다. 압도적인 해군력으로 적에게 오는 보급을 막음과 동시에 요새에 틀어박혀 방어전 때리면 상대가 먼저 GG하리라고 생각했었지만, 해군이 아무것도 못하고 후퇴만 하자, 그대로 함락되어 버린 것. 그 때 해군 제독은 종신 추방형 및 전 재산 몰수를 받았다.
  10. 당시 헝가리는 이슬람 교도 침략을 막는 방파제라는 명목하에 베네치아랑 교황청이 받는 돈으로 정예화 되어 있었다.
  11. http://ko.wikipedia.org/wiki/슈코더르
  12. http://en.wikipedia.org/wiki/Tanais
  13. http://ko.wikipedia.org/wiki/페오도시야
  14. http://en.wikipedia.org/wiki/Methoni,_Messenia
    http://en.wikipedia.org/wiki/Koroni
  15. 사실상의 연공금이었다.
  16. 이 때 스쿠타리 인들은 베네치아의 도움을 받아 이탈리아로 가서 정착한다.
  17. http://ko.wikipedia.org/wiki/케팔로니아_섬
  18. http://ko.m.wikipedia.org/wiki/이타카
  19. http://ko.wikipedia.org/wiki/파마구스타
  20. 베네치아 공화국, 스페인, 제노바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우르바노 공국, 병원 기사단, 사보이 공국, 교황청
  21. 스페인의 북아프리카와 베네치아의 키프로스 구원이 대립하여 결국 터키 함대의 격멸로 결정 되었다.
  22. 스페인은 자기네 용병대장인 잔안드레아 도리아를, 베네치아는 자기네 해군제독인 세바스티아노 베니에르를 추천하였고, 교황청은 대안으로 자기네 마르칸토니오 콜론나를 추천하였고, 결국 오스트리아 공 돈 후안으로 결정되었다.
  23. 당장 급하던 베네치아는 자기네 조선소를 총동원 하여 목표량을 맞추었으나 스페인은 당초 약속의 절반만 가지고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