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판토 해전

레판토 해전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571년 10월 7일
위치 코린트 만 입구
결과 기독교 연합군의 승리
교전단체
기독교 연합군(교황령, 스페인, 베네치아, 사보이, 제노바, 몰타, 나폴리 오스만 투르크 제국
돈 환(Don John Austria)
알리 파샤(Ali Pasha)
병력:
갤리선 209척, 갈레아스 6척, 수송선 30척
보병 28,000명, 선원 12,920명 노수 43,500명
대포 1,815문
병력:
갤리선 229척 소형 함선 60척
병사 34,000명, 선원 13,000명, 노수 41,000명
대포 758문
손실:
전사 7,656명, 부상 7,784명
손실:
갤리선 8척 침몰, 117척 나포
소형 함선 27척 침몰 13척 나포
전사자 총사령관 알리 파샤 포함 40,000여명, 포로 8,000여명
  • Battle of Lepanto

배경[편집 | 원본 편집]

7세기 이후 비잔틴 제국은 이슬람 세력이 유럽을 침공하는 것을 막는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1453년 콘스탄티노플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하여 함락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지중해의 서쪽으로 이슬람 세력권이 직접 진출할 수 있게 되는 통로가 열리게 되었다. 이후 오스만 투르크의 지중해 진출이 가시화되자 교황을 비롯한 스페인, 제노바, 베네치아 등을 비롯한 기독교 국가들이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기 위하여 연합함대를 편성하였으며 1571년 10월 7일 그리스의 코린트 만 입구인 레판토에서 양측의 대규모 함대가 맞붙으면서 노선시대의 마지막이자 최대의 해전이 벌어지게 되었다.

전투경과[편집 | 원본 편집]

기독교 함대는 터키 함대와의 함대결전을 위하여 그리스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오스만의 함대 역시 기독교 함대를 찾기 위하여 코린트 만의 기지를 떠나 서편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오스만 투르크는 숫적으로 우세할 뿐 아니라 33년 전에 있었던 프레베사 해전에서 기독교 함대를 격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렇게 서로 항해하던 두 세력의 함대는 레판토 근해에서 조우하게 되면서 레판토 해전이 시작되게 되었다.

기독교 함대의 배치[편집 | 원본 편집]

오스만의 함대와 접촉하자 기독교 함대의 사령관이었던 돈 환은 함대의 주력을 횡열진으로 전개하고 각 함선의 깃발색에 따라 지정된 3개의 전대를 편성하였다. 중앙에는 61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청색전대가 배치되었으며, 여기에 돈 환의 기함과 교황령, 사보니, 베네치아, 제노아의 기함이 배치되었다. 우익에는 제노아의 도리아의 지휘 아래 53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녹색전대를 배치하였으며, 좌익에는 바르바리고가 지휘하는황색전대가 갤리선 55척으로 구성되었다. 기독교 함대의 갤리선들은 겨우 노를 저을 수준의 밀집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두오도의 지휘 아래 6척의 갈레아스가 2척씩 3개의 전대를 형성하여 전방에 배치하였으며, 10척의 갤리선이 중앙의 청색전대의 기함 5척을 지원하기 위하여 후미에 배치, 다시 1마일 후방에 스페인의 산타크루즈의 지휘 아래 3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백색전대가 후위전대 겸 예비대로 배치되었다.

오스만 투르크 함대의 배치[편집 | 원본 편집]

오스만 투르크 함대의 배치 역시 기독교측과 마찬가지로 3개의 전대와 1개의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사령관인 알리 파샤가 지휘한 중앙전대에는 94척의 갤리선이 배치되었고, 시로코가 지휘한 우익전대는 60척의 갤리선이 배치, 좌익전대는 알제리의 왕 울루치 알리의 지휘 아래 65척의 갤리선이 배치되었다. 알리 파샤가 지휘하는 중앙전대의 후위에는 드라구트의 지휘 아래 1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소형 함선으로 구성된 예비전대가 배치되었다.

전투 전개[편집 | 원본 편집]

10월 7일 오전, 양측 함대는 북뽁으로 부터 시작하여 남쪽 방향으로 서로 진형을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해상에서의 위치는 기독교 함대가 서쪽, 투르크측이 동쪽에 포진을 하게 되었다. 이 때 숫적으로 불리했던 기독교 함대는 포위당할 것을 우려하여 좌익의 황색전대를 해안선 가까이에 붙여서 배치하였다.

해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투르크 함대에게 유리한 남동풍이 불어왔다. 숫적으로 우세하여 자신감이 붙어있던 투르크 함대는 바로 기독교 함대의 중앙을 공격하기 시작하였으며, 동시에 우익의 시로코 전대의 일부를 동원하여 기독교 함대의 중앙인 청색전대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하였다. 마침 바람도 유리하였기 때문에 투르크의 갤리들은 모두 돛을 이용하여 기독교 함대의 중앙을 향해 전진하였다.

기독교 함대측에서는 역풍을 맞는 상황이어서 노를 이용하여 서서히 전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상황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종료되게 된다. 갑자기 남동풍이 멈추어 버린 것. 이 덕분에 돛을 펴고 신나게 달려오던 투르크 함대의 속력이 갑자기 느려지고 심지어 방향을 상실하는 함선들까지 발생하여 사실상 전열이 정지되어버렸다. 이후 정오 무렵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 기독교측에 유리한 서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이 때 마지막으로 전열을 확인한 돈 환은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였고 중앙의 청색전대와 좌익의 황색전대는 곧 전개를 완료하였다. 그런데 우측의 녹색전대의 갤리선들은 따로 떨어져 기동하고 있었는데 이는 우익전대의 지휘관인 도리아가 전열을 이탈하려고 한 것으로 의심되는 상황이었다.

본격적인 전투는 정오부터 시작되었다. 알리 파샤의 기함이 돈 환의 기함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면서 접근하였던 것. 돈 환도 즉시 함수포를 발사하면서 응사를 시작하였으며, 이때까지 서로 대치중이던 양측 함대는 서로 상대를 향해 노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투르크 함선들은 곧 무지막지한 포격을 받게 되는데 두우도가 지휘하는 6척의 갈래아스들에이 바로 이들을 마중나온 것이었다. 이에 화들짝 놀란 투르크의 함서늘은 진형을 변경하여 갈래아스들과 거리를 벌리려고 하였으나 지속된 포격으로 손상을 입기 시작하였으며, 이 와중에 전열이 흐트러지면서 바로 돌진해 온 기독교 함대의 갤리선과 충돌하게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양측의 함대가 서로 뒤엉키기기 시작하면서 전황은 전술적 기동이 아닌 개싸움(...) 상황으로 흘러가기 시작하였으며 해상에서의 전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함상에서 백병전을 벌이면서 마치 지상전투를 방불케 하는 상황이 곳곳에서 이어졌다.

또한 양측의 총사령관이 승함한 기함끼리 서로 접촉하여 치열한 백병전이 벌어지게 되었는데 이 덕분에 기독교 함대나 투르크 함대나 너나 할것없이 자신들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하여 사력을 다하게 되었다. 두 기함간의 전투는 투르크의 총사령관인 알리 파샤가 전사하면서 기함이 나포되었으며, 존 황은 나포된 기함에다가 투르크의 녹색 기를 떼어내고 그 자리에 십자가기를 달아 올렸다. 이에 중앙측에서 싸우던 투르크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지게 된다.

한편 중앙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와중에 북쪽에서 맞붙은 기독교 함대의 좌익과 오스만 투르크의 우익 역시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투르크의 시로코 전대가 기독교 함대 좌익의 기함인 베네치아의 바르바리고의 기함을 포위하려고 하자 오히려 자신의 예하 갤리선을 이끌고 역으로 돌격을 시도하여 투르크의 함선들을 육지쪽으로 도주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에 시로코는 아직 전투에 가담하지 않았던 38척의 갤리선과 함께 재차 바르바리고의 기함을 나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번번이 격퇴당하고 말았다. 특히 3차 공격때는 화살이 바르바리고의 눈을 명중시키는 치명상을 입혔었으나 다른 베네치아의 갤리선들이 지원을 하여 시로코는 천금같은 기회를 날려버리게 되었다.

기독교 함대의 중앙과 좌익에서는 전투가 기독교측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으나 어째서인지 우익에 배치된 도리아의 녹색전대는 전투 이전부터 이상한 기동을 하면서 전열에서 이탈해 있는 상황이었다. 이 틈을 타서 투르크 함대의 좌익인 울루치 알리가 빈 공간을 노리고 들어와서 기독교 함대의 중앙전대를 협공할 수 있게 되었는데 때마침 후미에 예비대로 배치되어있던 산타 크루즈가 개입하는 바람에 중앙의 황색전대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또한 우익전대에서 몰타의 기함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갤리선 17척이 도리아의 명령에 불복하고 울루치 알리 전대의 퇴로를 차단하는 기동을 하면서 이쪽에서도 기독교 함대가 승기를 잡게 되었다.

전투 결과[편집 | 원본 편집]

오전부터 시작하여 저녁까지 계속된 이 해전은 기독교 함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알리 파샤의 갤리선 229척 가운데 8척은 완파/혹은 격침당하였으며, 117척의 함선이 나포당하고 말았다. 또한 후미에 있던 투르크의 소형 함선들 60척 중에서도 27척이 침몰하고 13척이 나포되어버렸다. 또한 투르크 함대의 좌익의 지휘관이었단 울루치 알리를 제외한 오스만 투르크의 지휘관들이 모두 전사하였으며 병사와 선원 4만명도 함께 전사하였다. 포로의 숫자만 8천명에 달하였으며, 이외에 투르크측의 함선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묶여있던 약 1만여명의 기독교인 포로가 자유를 찾게 되었다. 기독교 함대측의 피해는 좌익 전대의 지휘관인 바르바리고를 포함하여 7,656명이 전사하고 7,784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이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가 승리하였으나 해전 직후 기독교의 동맹이 무너져 내리면서 이후 지중해의 제해권을 기독교측에서 제대로 확장하거나 이용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었다. 다만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한동안 지중해의 서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면서 지중해에 기독교인 해적들이 날뛰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이 해전을 기점으로 노선시대의 해전이 종식을 고하고 이후부터는 함포를 본격적으로 사용하는 범선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이 해전에서 대포가 사용되기는 하였지만 대부분의 전투 양상은 기동전이 아닌 충각 및 함상 백병전이었기 때문에 일종의 과도기적 해전으로도 볼 수 있다.

뒷 이야기[편집 | 원본 편집]

  • 이 해전은 돈키호테의 작가인 세르반테스가 참전하였던 전투이다. 그는 이 전투에서 한쪽 팔을 잃었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