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혁명: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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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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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05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총 파업이 전국으로 번졌고, 이해 [[6월]]에는 포툠킨 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루 8시간 노동제, 민주적 권리, 제헌 의회 소집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과 농노의 반지주 운동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의 소집을 하는 등 양보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톨리핀의 반동정책이 강화되면서 2년 만에 종료되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05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총 파업이 전국으로 번졌고, 이해 [[6월]]에는 포툠킨 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루 8시간 노동제, 민주적 권리, 제헌 의회 소집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과 농노의 반지주 운동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는 [[두마]]의 소집을 하는 등 양보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톨리핀의 반동정책이 강화되면서 2년 만에 종료되었다.
===2차 혁명 ===
===2차 혁명 ===
[[1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17년]]에 일어난 2차 혁명으로 [[3월]] 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부터 시작하여 병사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서고 제정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양분되어 혼란이 잇다르게 되었다.
[[1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17년]]에 일어난 2차 혁명으로 [[3월]] 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부터 시작하여 병사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서고 제정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양분되어 혼란이 잇다르게 되었다.

2017년 7월 8일 (토) 22:26 판

개요

1905년부터 1917년사이에 러시아에서 일어난 혁명을 총칭한다.전제정치 타도, 농노 해방, 민족차별 철폐가 주된 과제였다. 부르주아 혁명에서 시작하여 사회주의 혁명으로 끝나게 된 세계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 중 하나

진행

1차 혁명

피의 일요일 사건이 발단이 되어 1905년 제정 러시아의 수도인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시작된 총 파업이 전국으로 번졌고, 이해 6월에는 포툠킨 호의 반란이 일어났다. 하루 8시간 노동제, 민주적 권리, 제헌 의회 소집 등을 요구하는 노동자 파업과 농노의 반지주 운동이 일어나자 니콜라이 2세두마의 소집을 하는 등 양보를 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스톨리핀의 반동정책이 강화되면서 2년 만에 종료되었다.

2차 혁명

1차 세계대전 끝무렵인 1917년에 일어난 2차 혁명으로 3월 혁명이라고 하기도 한다. 노동자, 학생, 시민들의 봉기로부터 시작하여 병사들의 반란으로 이어졌고, 부르주아 임시정부가 서고 제정이 무너지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이 임시정부와 소비에트로 양분되어 혼란이 잇다르게 되었다.

배경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이전부터 러시아에는 혁명적 분위기가 감돌았다. 1905년 혁명이 실패하고 줄어들었던 파업규모는 1912년부터 연간50만명에 달했으며 1914년 상반기에는 1905년 이후 최대규모인 105만여명이 파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애국적 분위기가 고조되었으며 1914년 11월 볼셰비키파 두마의원들이 반역죄로 체포되자 이런 분위기는 일단락 되었다. 또한 기존 공장 노동자들이 전선에 동원되고 그 자리를 농민, 여성, 어린이들로 채워지면서 기존 노동조직들이 무력화 되었다. 1915년 러시아 정부는 파업, 태업과 같은 노동쟁의는 독일을 이롭게 하는 반역이며 조국방위를 위해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혁명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은 전쟁이 다시 혁명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계속된 패배와 후퇴로 러시아군의 조직력이 약화되자 병사들을 통제하기 어려워졌다. 그 와중에 제정러시아 정부는 병력이 부족해지자 사상범들까지 전선으로 보냈고, 이 병사들이 전선의 병사들을 선동하기 시작했다. 한편 후방에서는 식량부족으로 봉기가 일어났고, 전쟁으로 인해 노동조건이 악화되자 다시 파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1915년 8월 10일에는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지역에서 파업노동자들에 대한 발포로 16명이 사망했다. 이 와중에 일부 병사들이 파업에 동참했다. 1916년 말이 되자 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이 이어졌다. 시간이 갈수록 파업하는 공장들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몇몇지역에서는 군대가 경찰을 공격하였다. 1917년 1월이 되자 봉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3차 혁명

1917년 11월 레닌이 일으킨 혁명으로 레닌이 이끄는 볼셰비키 정부가 임시 정부를 무너뜨리면서 세계에서 두 번째로[1]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10월혁명으로 불리는데 이는 러시아제정이 쓰던 달력이 그레고리력이 아니라 율리우스력이었기 때문이다.[2]

결과

혁명으로 볼셰비키는 모스크바,페트로그라드와 같은 주요 대도시와 혁명을 지지하던 러시아군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농촌지역과 극동, 시베리아, 우크라이나등 제정러시아의 변방은 장악하지 못했으며 당시 농민들의 지지를 받던 사회혁명당과 결별하면서 농촌지역에 대한 장악력도 떨어졌다. 이 결과 러시아혁명은 적백내전으로 이어지게 된다. 또 정치경제적으로는 전시공산주의체제의 등장으로 이어졌다.

  1.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정권은 파리 코뮌으로 보고 있다.
  2. 러시아에서 그레고리력은 혁명 다음해인 1918년 1월 31일부터 사용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