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빌 체임벌린

아서 네빌 체임벌린(Arthur Neville Chamberlain, 1869.03.18 ~ 1940.11.09)는 영국의 기업인이자 정치인이다. 기업인으로도 정치인으로도 괜찮은 성과를 보였으나 뮌헨 협정으로 오늘날에도 나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오늘날에는 체임벌린의 이러한 판단을 단순히 멍청한 유화책이라고 평가할 수 없다는 견해도 힘을 얻고 있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체임벌린은 1869년에 버밍햄에서 정치인인 조지프 채임벌린의 차남으로 태어났다.[1] 1890년부터 사업에 뛰어들었고 처음에 시도한 사업에서는 큰 손해를 봤지만 1897년에 선박 회사를 구입하여 크게 번창하게 만들었다. 이 당시 체임벌린은 정치에 별로 관심이 없었으나 1900년에 아버지의 연설문을 작성하는것을 돕는 등의 일은 하고 있었다. 그리고 1911년에 본격적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1918년부터 1940년까지 하원의원을 맡으며 보건장관(1923, 1924 ~ 1929, 1931)과 재무장관(1923-1924, 1931 ~ 1937)을 몇번 역임하였으며 재무장관 시절 대공황 극복을 위하여 강도높은 긴축정책을 실시하였고 어느 정도 성과도 얻었다. 그리고 1937년부터 스탠리 볼드윈의 뒤를 이어 보수당의 지도자이자 영국의 수상이 되었다. 수상이 된 이후 그는 영국의 재무장을 가속시켰으며 특히 휴 다우딩 공군 대장을 신임하여 레이더에 기반한 강력한 방공체계를 구축하는데 힘을 실어주었다. 한편 나치 독일의 팽창에 대해서는 외교적으로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이는 뮌헨 협정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하자 프랑스와 함께 독일에 선전포고 하였으며 독일이 노르웨이를 침공하자 노르웨이에도 병력을 파병하였으나 폴란드가 독일과 소련에게 분할되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고 노르웨이에서도 축출되는 등 잇따른 실패로 정치적으로 위기에 몰렸다. 특히 노르웨이 파병을 강력하게 주장했던 윈스턴 처칠[2] 체임벌린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노동당은 체임벌린을 맹렬하게 비판해 결국 1940년 5월 10일에 수상자리에서 물러나며 윈스턴 처칠이 61대 수상이 되었고, 본인은 국회의장을 맡았으나 대장암으로 그 해를 넘기지 못하고 11월 9일에 71세로 사망했다.

뮌헨 협정의 결과로 오늘날까지도 악평을 듣고 있으며 그 직후 본인의 발언인 '우리 시대의 평화(Peace in our time)'까지 겹쳐서 대책없이 유화책만 고집하는 사람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온건책을 들고오면 항상 거론된다. 물론 그 당시 수상이 체임벌린이고 수상은 최종적으로 책임을 지게되는 자리인 만큼 비판을 피할 수는 없지만 모든 문제를 체임벌린의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건 아니다. 유화책의 경우에는 체임벌린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당대 영국 정계의 대체적인 분위기였고 오히려 처칠처럼 처음부터 강경한 주장을 한 사람이 소수라는것은 감안해야 한다. 당장 전임자인 램지 맥도날드와 스탠리 볼드윈이 대독일 포위망을 구성해야할 국가들에게 알리지 않고 영국-독일 해군조약을 체결하여 독일의 재무장을 사실상 용인해버린 전적이 있고 1차 대전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은게 20년 남짓 지난 시점에서 또 큰 전쟁을 하지는 결정은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총리시절 재무장을 가속시켰다는 점은 군사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으므로 최대한 비판적으로 평한다고 하더라도 생각없는 유화론자라는 평은 상당히 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체임벌린이 특히 신경을 썼던게 공군으로 체임벌린 집권 이전에는 목재와 캔버스로 만든 복엽기를 주력 전투기라고 굴리고 있던게 영국 공군의 현실이었는데(29개 비행대대중 24개 비행대대가 복엽기였다.) 체임벌린이 집권하고 신형 기종들을 대거 도입하기 시작해서 처음으로 전금속제 단엽기인 슈퍼마린 스핏파이어가 배치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항공기 생산량 또한 1937년에 2,200여대로 연간 5,600여대를 생산하는 독일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수치였으나 2년 뒤인 1939년에는 7,900여대로 8,000여대를 생산하는 독일을 거의 따라잡았으며 이에 필요한 자원 생산량도 함께 증가시켰다. 또한 전술했든 휴 다우딩 공군 대장에게 힘을 실어줘서 강력한 방공망을 구축하는데 힘을 썼고 이는 나중에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 효과를 보게 된다. 참고로 이 무렵 처칠은 볼튼 폴 디파이언트라는 괴작 전투기를 공군의 주력 기종으로 삼아야 한다는 망언이나 하고 있었다.[3]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국내에서도 대북유화책을 거론하면 심심하면 거론되는 인물이다. 물론 체임벌린이 군비를 대폭 증강시켰다는 사실은 무시된다.사실 국내에서도 온건책을 주장하는 쪽이 국방이는 더 들이붓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 체임벌린이 나치 독일에 온건책을 취한것에 대해서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체임벌린도 보수당 소속 정치인 답게 기본적으로 반공주의자였고 히틀러와 나치당도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소련과 공산주의를 견제해주기를 바랬다는 것. 하지만 독소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면서 망했다. 나중에 독소전쟁이 발발하기는 했지만 정작 체임벌린 본인은 이것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게다가 정작 소련이 이겨버리면서 소련의 영향력만 더 커졌다.
  1. 참고로 그의 형 오스틴 체임벌린과는 이복형제 사이였으며 역시 정치인이었다.
  2. 당시에는 해군장관이었다.
  3. 이 기종은 2차 대전 초반에 이미 그 한계를 보여주고 밀려난 기종이다. 처칠의 말대로 했다면 영국 본토 항공전은 독일의 승리로 끝났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