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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귀주 대첩''' '''한민족의 3대 대첩중 하나이자 가장 큰 회전''' '''고려'''와 '''거란'''간 벌어진 전투로 고려가 치른 대외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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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주 대첩'''


'''[[한민족]]의 3대 대첩중 하나이자 가장 큰 회전'''
== 개요 ==
[[1019년]] [[3월 10일]]([[음력]] [[2월 1일]])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구주(龜州)<ref>오늘날 평안북도 구성군</ref>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흔히 귀주대첩이라 하나 龜는 지명에 쓰일 때에는 주로 ''라 읽히기에 구주대첩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귀주대첩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고려]]'''와 '''거란'''간 벌어진 전투로 고려가 치른 대외 전쟁 중 하나이자 제2차 여요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규모 전투, 즉 대첩이다.
== 배경 ==
지금의 압록강 인근 귀주의 벌판에서 벌어진 회전으로 양측 30만, 총 20만의 고려군과 10만명의 요군이 정면 층돌한 전투로서 이 과정에서 고려군은 10만명의 요군을 전멸시키면서 요나라와의 전쟁에서 압승을 거두게 된다.
[[1010년]], [[강조]]를 징벌한다는 명분을 들어 [[거란]] [[성종 (거란)|성종]]이 몸소 40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고려 침공]]이다. 이 전쟁은 거란이 고려에게서 [[강동 6주]]를 반환함과 더불어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과 수교하겠다는 약조를 받으며 끝난다. 하지만 [[현종 (고려)|현종]]은 [[개경]]으로 돌아온 뒤에도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는 데다 거란과 맺은 국교도 끊고 계속하여 송나라와 교류하였다. 이에 [[1018년]] [[12월]] 거란 성종이 [[소배압]]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10만 군대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케 하니, 이것이 [[거란의 3차 고려 침공]]이다.
 
이에 맞서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고 20만 대군으로 하여금 적을 막게 하였다. 강감찬은 기병을 위주로 한 거란군이 2차 침공 때처럼 곧바로 개경으로 진군할 것이라 예상하고 기병 1만 2,000여 명을 차출하여 흥화진성 동쪽에 흐르는 삼교천(三橋川) 물길을 막게 하였다. 예상대로 거란군이 흥화진성을 피해 삼교천을 건너기 시작하자 미리 막은 물길을 일시에 터뜨렸고, 갑자기 불어난 물살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 전투가 [[흥화진 전투]]이다.
 
적잖은 피해를 받은 거란군은 고려군과 싸우는 것을 피하며 개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자주(慈州)<ref>오늘날 평안북도 순천군</ref>에 이르러 강민첨에게 공격을 받아 격파되고, 고생스럽게 개경 근처 신은(新恩)<ref>오늘날 황해도 신계군</ref>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펼친 [[청야 전술]] 때문에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019년]] [[2월]], 소배압은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달아 군사를 돌렸고, 이윽고 거란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주'''에 이르렀다.


이 전투의 결과로, 요나라는 고려를 재침공 할수 없었고 고려는 이 승리를 바탕으로 향후 백년 간 전성기를 구가하게 될수 있었다.
==배경==
==전개==
==결과==
[[분류:한국사]]
[[분류:한국사]]
[[분류:전쟁]]
[[분류:전쟁]]

2018년 2월 19일 (월) 19:09 판

개요

1019년 3월 10일(음력 2월 1일)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이 구주(龜州)[1]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친 전투. 흔히 귀주대첩이라 하나 龜는 지명에 쓰일 때에는 주로 '구'라 읽히기에 구주대첩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귀주대첩으로도 들어올 수 있다.

배경

1010년, 강조를 징벌한다는 명분을 들어 거란 성종이 몸소 40만 군대를 이끌고 고려를 침공한다. 이것이 거란의 2차 고려 침공이다. 이 전쟁은 거란이 고려에게서 강동 6주를 반환함과 더불어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과 수교하겠다는 약조를 받으며 끝난다. 하지만 현종개경으로 돌아온 뒤에도 강동 6주를 반환하지 않는 데다 거란과 맺은 국교도 끊고 계속하여 송나라와 교류하였다. 이에 1018년 12월 거란 성종이 소배압을 도통으로 임명하여 10만 군대를 이끌고 다시 고려를 침공케 하니, 이것이 거란의 3차 고려 침공이다.

이에 맞서 고려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있던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고 20만 대군으로 하여금 적을 막게 하였다. 강감찬은 기병을 위주로 한 거란군이 2차 침공 때처럼 곧바로 개경으로 진군할 것이라 예상하고 기병 1만 2,000여 명을 차출하여 흥화진성 동쪽에 흐르는 삼교천(三橋川) 물길을 막게 하였다. 예상대로 거란군이 흥화진성을 피해 삼교천을 건너기 시작하자 미리 막은 물길을 일시에 터뜨렸고, 갑자기 불어난 물살로 말미암아 혼란에 빠진 거란군을 크게 무찌른다. 이 전투가 흥화진 전투이다.

적잖은 피해를 받은 거란군은 고려군과 싸우는 것을 피하며 개경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자주(慈州)[2]에 이르러 강민첨에게 공격을 받아 격파되고, 고생스럽게 개경 근처 신은(新恩)[3]에 이르렀으나 고려군이 펼친 청야 전술 때문에 식량 공급도 원활하지 못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019년 2월, 소배압은 개경을 함락할 수 없음을 깨달아 군사를 돌렸고, 이윽고 거란으로 돌아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구주에 이르렀다.

  1. 오늘날 평안북도 구성군
  2. 오늘날 평안북도 순천군
  3. 오늘날 황해도 신계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