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명활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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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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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화재청의 고시로 2011년에 공식 명칭은 명활산성에서 명활성으로 변경되었지만, 통상 사극이나 안내표지판 등에는 아직 명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명칭도 명활산성이었고.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화재청의 고시로 2011년에 공식 명칭은 명활산성에서 명활성으로 변경되었지만, 통상 사극 등에는 아직 명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명칭도 명활산성이었고.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짐잫할 수 있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짐잫할 수 있다.

2020년 9월 28일 (월) 08:34 판

틀:문화재

개요

경주의 동쪽 명활산 꼭대기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둘레 약 6㎞의 신라시대의 산성이다. 문화재청의 고시로 2011년에 공식 명칭은 명활산성에서 명활성으로 변경되었지만, 통상 사극 등에는 아직 명활산성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남아있다. 애초에 당시 신라사람들이 부르던 명칭도 명활산성이었고.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신라 실성왕 4년(405년)에 왜병이 이 성을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적어도 그 이전에 만들어진 성임을 짐잫할 수 있다.

특성

성을 쌓는 방법에서도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한 신라 초의 방식을 보이고 있다. 눌지왕 15년(431)에는 왜구가 이 성을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신라의 수도인 금성(경주)을 지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곳임을 말해준다. 현재는 보문호가 산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형을 완전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이 명활산의 위치 자체가 경주시내 동쪽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일종의 감제고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산 정상에서 왕성인 월성까지는 불과 4km가 채 되지 않은 거리이며, 산성에서 왕성을 바로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이다. 이러한 이유로 남산성, 선도산성, 북형산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에 대항하여 경주를 지키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산성이다.

역사

  • 이 성은 진흥왕 15년(544)에 다시 쌓았고, 진평왕 15년(593)에는 성을 확장했다. 현재는 대부분의 성벽이 무너져 겨우 몇 군데에서만 옛모습을 볼 수 있지만, 당시에는 꽤나 규모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 진흥왕 당시 "명활산성작성비"가 발견되어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고 있으며, 이외에 "명활산성비"로 보이는 비석조각이 안압지에서 발견되었다.
  • 선덕여왕 때는 비담이 이 곳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유신이 진압하였었다. 이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비담의 난 참조.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