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진 (1908년)

Battlehistory2122 (토론 | 기여)님의 2021년 10월 22일 (금) 18:13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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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命鎭.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

1908년 12월 15일 경상북도 영천군 진혈면 수도동(현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수도동)에서 출생했다. 1927년 3월 영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농업에 종사하였고, 영주청년동맹 평은지부에 참여하여 1928년 4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또한 출생지이자 거주지인 수도리에서 1928년 10월 아도서숙의 운영위원을 맡아 문맹 퇴치, 우리글 교육, 민족정신 양양 등을 꾀했다.

1929년 영주 농민조합에 가입하여 활동하다가 1932년 7월 영주, 봉화지역 농민 청년층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있을 때 그를 비롯한 아도서숙의 관계자 18명이 경찰에 연행되어 60일간의 취조를 받은 후 석방되었다. 이 일로 아도서숙은 1933년 7월경 일제에 의해 폐쇄되었다.

이후 농민조합의 재건을 꾀한 김명진은 1932년 9월 안동의 사회운동가 안상윤(安相潤)이 검거를 피해 수도리로 숨어들자, 박승서의 집에서 김종진의 소개를 통해 안상윤을 만나서 영주의 사회운동 상황에 대해 논의했다. 이때 안상윤이 "영주 운동의 소장이 남아 있는 여러분의 활동 여하에 달려 있으니, 수도리를 중심으로 소수라도 재건조직을 도모하자"고 제안했다. 김명진은 이에 동의하여 안상윤, 김종진 등과 함께 재건 조직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이리하여 1932년 10월 5일 영주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를 조직하였고, 김명진은 반제부 위원, 안상윤은 지도부 위원, 김종진은 적농부 위원을 각각 맡았다. 지도부는 적색농조, 반제운동에 대한 당면 전술을 지도하였으며, 적농부는 정기적으로 농민강좌회를 개최하여 계급의식을 주입하고 의식분자를 획득하여 적색농민조합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반제부는 소부르주아지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여 반제동맹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1932년 10월 6일 안상윤이 안동으로 돌아간 뒤, 김명진은 동지들과 함께 독서회를 조직하여 마르크스-레닌의 사회주의 이론을 습득하였고, 1932년 11월 17일 러시아 혁명일에 기념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32년 12월 7일 영주청년동맹과 신간회 영주지회에서 활동하던 족친 김계진과 함께 혁명적농민조합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1933년 5월 혁명적농민조합은 노동절를 맞아 봉화의 적색농민조합재건투쟁위원회와 함께 연대 투쟁을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면서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34년 7월 2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300일을 본형에 산입),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1] 이후 영주에 조용히 지내다 1955년 6월 2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김명진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2009년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