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식 (1880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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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圭植.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金圭植.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 생애 ==
== 생애 ==
김규식은 1882년 1월 15일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본적은 경상남도 동래군이나 부친이 관리로 집무하던 중 태어난 출생지는 강원도 홍천군이다. 그는 1907년 경북 안동에서 [[류인식]]·[[김동삼]]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의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러던 도중에, 일제에 의해 군대가 해산 당하자, 그는 경기 북부지역에서 의병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이후 만주로 망명한 후에는 김좌진ㆍ이범석 등과 함께 청산리전투에 참가하여 일본군과 격전을 치루었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한 그는 1911년 김형식(金衡植)·이형준(李衡濬)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에 노력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인사들을 구금했지만, 그는 사전에 해외로 이주한 덕에 화를 모면했다.
1880년 8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경북 안동에서 [[류인식]]·[[김동삼]]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의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한 그는 1911년 김형식(金衡植)·이형준(李衡濬)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에 노력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인사들을 구금했지만, 그는 사전에 해외로 이주한 덕에 화를 모면했다.


이후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던 그는 1919년 3월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이후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던 그는 1919년 3월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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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그는 한족회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부는 1926년 말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과 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87,000명을 관할하였다. 한편 봉천성 무순역에서 동아관(東亞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1921년, 그는 한족회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부는 1926년 말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과 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87,000명을 관할하였다. 한편 봉천성 무순역에서 동아관(東亞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오상현 안가촌으로 이주하여 중국 관내와 러시아 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소환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노력의 일환으로 1931년 5월 10일, 자신이 살던 마을인 연수현 태평촌에 학교를 설립하고 선생이 부족하여 주하현 하동 3계 마을에 살고 있던 황포군관학교 출신 이붕해를 초빙하기 위해 방문했다가 반대파의 공격을 받고 순국하였다.
이후 오상현 안가촌으로 이주하여 중국 관내와 러시아 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소환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023년 11월 18일 (토) 17:04 기준 최신판

金圭植.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0년 8월 27일 경상북도 안동군 임하면 천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7년 경북 안동에서 류인식·김동삼 등이 설립한 협동학교(協東學校)의 교사로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신민회에 가담한 그는 1911년 김형식(金衡植)·이형준(李衡濬) 등과 함께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군기지 개척에 노력하였다. 이후 국내에서 일제가 신민회를 탄압하기 위해 105인 사건을 조작해 수백 명의 인사들을 구금했지만, 그는 사전에 해외로 이주한 덕에 화를 모면했다.

이후 경학사(耕學社)·부민단(扶民團) 등에 가담하여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노력하던 그는 1919년 3월 부민단을 한족회(韓族會)로 확대 개편할 때 학무부장으로 선임되어 만주 이주 한인들의 생활 안정에 기여하였다. 또 같은 해 4월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여기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그는 한족회와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를 대표하여 활동하였다. 그후 남만주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정의부(正義府)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정의부는 1926년 말에는 17개 지방총관소를 설치하고 봉천성과 길림성에 살고 있는 한인 17,000여 호, 87,000명을 관할하였다. 한편 봉천성 무순역에서 동아관(東亞館)이란 여인숙을 운영하며 독립운동의 연락거점으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후 오상현 안가촌으로 이주하여 중국 관내와 러시아 지역 동포와 연락하며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된 뒤 국내로 소환되어 옥고를 치렀고, 출옥 후 안동에서 조용히 지내다 1945년 8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6년 김규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