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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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寅植. 자는 성래(聖來), 호는 동산(東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8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5년 5월 3일 경상북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 삼산마을에서 류필영(柳必永)과 청주 정씨(淸州 鄭氏) 사이에서 2남 1녀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대대로 관직에 오른 이가 많은 안동의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영민하고 재주가 뛰어났다고 한다. 6살 때 할아버지 용재공(容齋公, 류성진의 별칭)에게서 한학을 배웠는데, 어느날 할아버지에게 "대간 할아버지(대사간을 지낸 6대조 류정원)의 호는 왜 삼산(三山)이라 했습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할아버지가 “마을 앞에 아름답게 보이는 저 삼봉을 보고 호를 삼산이라 했다”고 하니, 류인식은 "저는 집이 동녘에 있으니 호를 동산이라 하겠습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아버지 류필영은 퇴계학통을 계승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였다. 정재학파는 주로 안동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면서 퇴계의 정통을 자처하였다. 류필영은 정재학파의 학통을 이음으로서 훗날 영남 유림들로부터 '남쪽에는 곽종석, 북쪽에는 류필영'이라는 찬사를 들을 만큼 학문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1881년에 영남 만인소에 참가했고, 1919년에는 유림들의 독립운동인 '파리 장서'에도 참여했다.

류인식의 스승은 척암 김도화였다. 그는 김흥락과 함께 류치명의 제자로서 학파를 형성했는데, 휘하에 든 문인이 322명에 이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는 1895년 안동의진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의병을 일으킨다. 류인식은 이렇듯 철저한 유학자인 아버지와 스승의 영향을 받으며 서양의 문물과 사상을 철저히 배격하는 위정척사파로 자랐다.

1893년, 류인식은 29세의 나이로 과거 시험을 보러 상경했다. 그러나 그는 선비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한 경쟁에만 급급하여 염치를 잃고, 과거 급제가 청탁과 문벌로 결정되는 부패한 현상을 봤다. 당시의 과거제도는 문란해질대로 문란해져 있었다. 과거시험에는 수많은 부정행위들이 동원되었다. 본래 과거시험장에는 응시자 외에 다른 사람은 들어갈 수 없었다. 그러나 한양의 권세가문 자제들 가운데에는 답안지 글씨를 대신 써줄 사람 등 10여명이 넘게 데리고 들어오는 사람도 생겨났다. 그밖에 온갖 부정행위가 판을 쳤으나 조정은 이를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다.

이런 꼴을 본 류인식은 크게 실망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전념했다. 그는 자신의 저술 <태식록(太息錄)>에서 정부의 부패 중 하나로 과거제도의 폐단을 지적하고 문벌의 타파를 강조했다. 이듬해인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 도처에서 동학군이 봉기해 관군과 싸웠다. 이때 조정에서는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여 동학군을 진압하려 했다. 그는 이같은 조정의 처사에 대해 "어찌 외세를 끌여들어 내란을 진압하고서 망하지 않겠는가?"라고 탄식하며 동지들과 함께 대책을 강구했지만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1895년 일제가 을미사변을 일으키고 이후 단발령을 공포했다. 이에 안동을 비롯한 각지에서 을미의병이 일어났다. 류인식은 이중재, 이상룡, 권재중 등과 왜적을 토벌하여 원수를 갚기로 하고 각 군에 격문을 보내 동지를 규합했다. 이때 조정에서 관군을 보내 의병을 진압하자, 그는 청량산으로 들어가 의병을 일으켰다. 이때 동문인 류시연과 김도현도 함께 가담해 의병장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그는 관군에게 패했고, 이후 약 10년간 산 속에 은거한 채 동지들과 연락하며 구국의 방도를 논의했다. 또한 산수를 찾아다니고 험준한 지세를 직접 살피며 민족의 길을 찾는 데 몰두했다.

1903년, 류인식은 성균관에 유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이때 그는 신채호, 장지연 등과 교유했고 그들로부터 근대사상을 전수받았다. 또한 러일전쟁이 곧 발발할 조짐을 보이자, 그는 계몽운동을 벌여야 할 필요성을 자각했다. 이리하여 류인식은 1904년부터 '혁구종신(革舊從新) 열심교육(熱心敎育)'의 기치를 내걸며 본격적인 계몽운동을 시작했다.

그러자 그의 주변 사람들이 크게 반발했다. 아버지 류필영은 아들이 머리를 자르고 돌아오자 "오늘부터 넌 내 자식이 아니다."며 부자의 연을 끊었고, 스승 김도화는 절교와 파문을 통보했다. 또한 친지와 이웃들은 그를 미치광이라고 손가락질하고 배척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한탄했다.

친척이 꾸짖고 향당(鄕黨)이 성토하고 집안 식구와 마을 아낙네도 놀라고 성내니 하늘이 높고 땅이 두터워도 도망할 곳이 없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그는 구학과 신학은 같은 성격의 것이라고 인식했고, 구학을 혁신의 대상으로 설정하되 구학에 바탕을 두고 신학을 지향했다. 또한 자신의 논리를 주역의 '시대에 따라 변하고 바뀌어라'는 구절을 근거로 삼고 "시세에 합당한 것은 유신을 하는 것이며 그 방법은 신학을 교육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차라리 한 고을의 완고한 유림들에게는 죄를 지을지언정 한 나라와 사회에는 죄를 짓지 않겠으며, 일시 고향의 유림들에게는 죄를 질지언정 백세(百世)의 공의(公義)에는 죄를 짓지 않겠다.

1907년, 류인식은 유림들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근대식 중등학교인 협동학교를 설립했다. 이 설립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의성 김씨의 김동삼, 고성 이씨의 이상룡의 힘이 컸다. 두 사람은 집안의 재산을 털어 류인식에게 지원해줬고, 류인식은 이를 바탕으로 내앞마을 김대락의 가옥을 빌러 임시 교사로 사용하다가 가산서당으로 옮겼고, 1913년 한들로 옮겨 작년에 돌아가신 스승 류치명의 종택을 교사로 이용했다. 학교의 이름 '협동'은 “나라의 지향은 동국이요, 향토의 지향은 안동이며, 면의 지향은 임동”이므로 ‘동(東)’자를 따고, 안동군의 동쪽에 위치한 7개면이 힘을 합쳐 설립한 것이므로 ‘협(協)’자를 따서 정한 것이다.

협동학교의 교육과정은 3년제 중동과정이고 초등과도 있었으며, 본과 진학을 위한 예비과도 두었다. 교과 내용은 신교육을 위주로 하되 서구의 신학문도 수용하여 가르쳤다. 그는 협동학교 설립취지서에서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아! 우리 안동의 인사들이시여! 우리 안동은 옛날부터 학문을 쌓는 훌륭한 선비가 많이 배출된 곳이고, 학문의 운기가 일찍이 열리어 나라의 예우가 있었고, 온 국민이 기대하던 희망이 가장 두터운 고을이었다. 그러한 즉 우리 안동인사는 국가에 대한 책임이 가장 무겁지 아니한가, 우리 안동인사가 가장 무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다른 여러고을의 사람들이 다투어가며 개화를 소리치는데, 우리는 홀로 이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겠는가!

그러나 1910년 7월 18일, 협동학교가 의병의 습격을 받는 불상사가 발생하였다. 이날 오후 3시경 안동 등지에서 활동하던 의병이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학교를 기습하여 교사와 학생을 살상한 것이었다. 의병들은 협동학교를 "서양 오랑캐들의 더러운 교리를 학생들에게 주입시켜 순수한 조선 정신을 더럽히려는 패악한 학교"로 단정하고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 하지만 류인식은 이 정도로 굽히지 않고 자신의 뜻을 밀어붙였다.

협동학교는 1908년부터 1918년까지 80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졸업생들은 대부분 만주로 망명하거나 고향에서 전개된 3.1운동이나 신간회 지회의 핵심인물로 활동하는 등 독립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특히 김동삼은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의장으로 활동했고, 이상룡은 1926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에 선임되어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교사진은 동산이나 김동삼, 김형식 등 지역 인물들이 중심을 이루었으나, 신민회가 추천하여 서울에서 내려 보낸 인물들도 여기에 가담했다.

1910년 말, 류인식은 협동학교를 류동태에게 맡기고 망명길에 올랐다. 그가 간 곳은 서단도 유하현 삼원보의 추가가(鄒家街) 일대였다. 이곳엔 안동 유림들이 정착하고 있었는데, 1911년 음력 4월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 등 300여 명의 한인들이 대고산 아래에 모여 경학사를 조직하기로 했을 때 류인식은 교무부장을 맡았다.

경학사는 청년들에게 군사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신흥강습소를 설치했다. 신흥강습소의 초대 교장은 이동녕이 맡았다. 이후 신흥강습소는 합니하로 옮겨 중등과정의 신흥무관학교로 발전했다. 이주한 안동 사람 가운데에는 이상룡, 김동삼과 혈연적 연고가 있는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하고 무장투쟁에 나서 봉오동과 청산리 대첩의 주역이 되었다.

류인식은 1912년 일시 귀국했다가 일제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다시는 만주로 돌아가지 못하고 국내에 머물며 민족운동을 주도했다. 1912년부터 <대동사(大東史)> 저술에 착수해 1917년 초고를 마쳤고, 1920년까지 수정 및 보완 작업을 수행했다. 대동사의 저술 목적은 반만년의 고유문명을 지닌 역사가 노예사가들에 의해 말살된 현실을 개탄하고, 젊은이들에게 조국정신을 심어주고 국수를 발휘하게 하는 것이었다. <대동사>는 단군 이래 경술국치까지의 통사를 편년체의 순한문으로 정리한 사서로,<단씨조선기>, <남북조기>, <고려기>, <조선기> 순으로 정리되었다.

류인식은 <대동사>에서 단군을 국조로 하고 배달족을 종족으로 하는 단일 민족사를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그는 정치조직과 나라가 아닌 민족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했다. 특히 그는 단군기원을 기년으로 삼아 그때까지 단순히 신화적 존재로 여겨지던 단군을 매우 중요시했다. 또한 그는 상당히 독특한 남북조 사관을 보였다. 그는 단군 이후 고려의 후삼국 통일까지를 남북조로 구분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선 통일이 아닌 발해와 신라로 양분되었다고 봤고,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서야 민족이 완전히 통합되었다고 봤다.

또한 그는 시대사별로 본인의 주관적 사론을 논리적으로 전개했고 인과 관계가 모호한 사건에 대해서 가능한 명료하게 규명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근대사에서 일제의 침략을 을사조약-정미7조약-한일병합의 3단계로 이해했고, 의병과 계몽운동, 의열투쟁에 대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서술했으며, 신채호와 박은식도 하지 못했던 통사의 체계로 한국사를 서술했다. 그러나 그는 <대동사>에서 유교가 최고의 학문임을 강조하면서 불교, 도교 등 다른 종교들을 비합리적이며 유교보다 못한 것으로 간주했다. 게다가 임나일본부를 역사적 사실로 서술해 후대에 두고두고 비판받았다.

류인식은 대동사의 저술을 마친 후 1924년 겨울 <대동시사(大東詩史)>를 저술했다. 이 책은 고려 말부터 조선 말까지 500년간에 걸쳐 302인의 시 445수를 선정하여 편년 순으로 평론을 붙이고 원문을 소개한 것이다. <대동시사(大東詩史)>는 시와 역사는 모두 시대의 상황과 인식을 반영하는 산물로서 동일시하였던 시사일체론(詩史一體論)의 입장에서 정리한 것이다.

1920년 6월 조선교육회가 조직되었을 때, 류인식은 한규설, 이상재 등과 함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이어 1923년 3월 29일에 개최된 민립대학기성발기총회에서는 중앙집행위원 30인 중 1인으로 선임되었다. 1920년대 초 그는 안동지역의 교육운동에 진력했다. 1921년 9월 <개벽>에 기재된 기사에서, 류인식은 "한 사람의 힘으로 지방을 일으켰다."는 찬사를 받았고, 그가 협동학교를 설립해 인근 지역의 신교육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찬사를 받았다.

류인식은 안동 지역의 사회운동도 적극 지원했다. 그가 세운 협동학교 졸업생들은 1920년 9월 조선노동공제회 안동지회를 설립했고, 안동지회의 운영에 있어 류인식의 영향력은 지대했다. 또한 1923년 물산장려운동이 확산될 때 안동에도 이러한 운동이 일어나도록 지원했고, 노비 출신들의 사회적 신분 개선 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형평사의 안동 지부 설립에도 영향을 끼쳤다. 비록 형평사 참여 인물란엔 그의 이름은 없었지만 그의 제자들이 많이 참여했기에 그가 관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1927년 신간회 안동지회가 설립될 때 초대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27년 겨울, 류인식은 병으로 몸저누웠다. 이듬해 들어 병세가 위중해지자, 그는 다시 일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종손인 기태를 불러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는 나는 죄가 많은 사람이다. 내가 죽은 후 절대로 과장하여 장사를 지내지 말라. 이는 내가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무거운 죄이니 너희들이 힘써 금지하거라.

1928년 4월 29일, 그는 혼수 상태에 빠져 숨을 거두었다. 이후 5월 1일 예안동 읍전 사염에서 1천여 명의 조문객이 움집한 가운데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이날 각계각층으로부터 130여개의 조기와 조문이 보내졌으며, 언론은 장례식 광경을 "예안 지방 초유의 성의(盛儀)"라고 보도했다. 또한 형평사에서도 조기를 보내왔는데, 장례식에 참가한 유림의 일부 인사가 "천한 종자들이 무슨 염치로 이런 걸 보냈냐"며 치워버리려 하자 장의위원회는 류인식이 형평사 운동에도 참여했으니 형평사의 조기는 당연한 것이라며 반발을 물리쳤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류인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