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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張, 章, 莊, 蔣)씨는 [[성씨]]의 하나이다.
{{다른 뜻|장 (중국 성씨)}}
'''장'''(張, 章, 莊, 蔣)[[한국의 성씨]]이다.


== 베풀 장 張 ==
== 베풀 장 張 ==
====중국====
'''장'''(張)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92,72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위이다.  
'''장'''(張, Zhang) 성은 중국 국가 통계국의 2010년 제6차 전국인구일제조사(第六次全國人口普査)에서 약 8,480만 명으로 조사되었다. 중국 성씨 인구 순위 3위이며, 중국 인구의 7.07%를 차지한다. 산동, 하북, 하남, 사천을 비롯하여 분포도가 광범위하다. 중국의 [[한족]]과 [[중국의 소수민족|소수민족]]의 성씨로 [[중화인민공화국]], [[중화민국]], 동남아시아, 북아메리카 등 다양한 지역에 1억명 이상으로 분포하고 있다. 장(張)씨는 [[타이완 원주민]]과 [[중국 소수민족]]이 많이 사용하는 성씨로, 최소 타이완 장씨의 30% 정도는 원주민들이라고 한다.


장(張)씨의 황제 아들 '''청양'''(靑陽)이 휘()를 낳았고 호성(弧星, 아홉개의 별)을 보고서 활과 화살을 제작, 호성(弧星)을 주관하여 제사하고 성을 장()씨라 하였다고 전한다. '''[[장의]]'''(張儀)'''[[진나라|()나라]]''' 재상으로 선조 미상이다. '''[[장량]]''''''[[한 (전국)|한(韓)나라]]''' 유민 출신으로 한()이 진()에게 패망하자 장()씨로 개성하였다. [[삼국시대 (중국)|삼국시대]] [[장료]](張遼)는 유목 민족 출신으로 섭()씨였으나, ()씨로 개성하였다. '''장맹담'''(張孟談)'''[[조나라|조()나라]]'''의 개국공신, '''[[장건]]'''은 [[전한|()나라]] [[한무제|무제]] 때 [[실크로드]] 개척자, '''[[장비]]'''[[촉한]](蜀漢)의 무장이다. '''[[장궤]]'''(張軌)[[5호 16국]] 때 [[전량]](前涼)의 군주이다.
[[덕수 장씨]]와 [[절강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대부분 [[고려]] 때 창성된 토착 성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며, 선계 미상의 본이 많다. 고려사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본관은 고려 개국 전후에 등장한 [[흥덕 장씨]]이다. 인구는 시조가 각기 다른 [[인동 장씨]]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상장군계 인동 장씨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장보고]](張寶高)는 처음 이름이 궁복(弓福)이었고, 그가 당나라에 건너간 뒤에 중국식 성인 장(張)으로 성을 삼았던 사실로 볼 때, [[장보고]]가 최초의 장(張)씨 성을 가졌던 인물로 파악된다.<ref>{{뉴스 인용|제목=[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 <54> 장씨, 안동 장씨|url=http://www.segye.com/content/html/2013/08/05/20130805003954.html|날짜=2013-08-05|뉴스=세계일보}}</ref> 한편,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발해]]의 유력한 귀족 성(姓)으로 [[횡성 고씨|고]](高)·장(張)·[[양 (성씨)|양]](楊)·두(竇)·오(烏)·[[이 (성씨)|이]](李) 6성을 언급하였다.<ref>[https://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2162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해 사회구성]</ref><ref>[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10_0050_0030_0010_0010 우리역사넷]</ref>
 
* '''[[흥덕 장씨]]'''(興德 張氏) 시조 '''장유'''(張儒)는 [[후백제]] 상질현(尙質縣 : 現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고려]] 초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냈다. 그는 [[후삼국 시대]] 난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배웠고,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환국하여 [[고려 광종]] 때 예빈성(禮賓省)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장유의 아들 [[장연우 (고려)|장연우]](張延祐)는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이 침입해오자 왕을 호종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ref>[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1671109&cid=49632&categoryId=49632 『고려사』 권94, 열전7]</ref> 흥덕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3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6_726_0437|흥덕 장씨}}</ref> 2015년 인구는 [[흥덕 장씨]] 37,423명, [[흥성 장씨]] 21,973명으로 총 59,396명이다.
 
* '''[[안동 장씨]]'''(安東 張氏) 시조 '''장정필'''(張貞弼)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워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에 오르고 고창군에 봉해졌다. 안동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7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6_330_0430|안동 장씨}}</ref> 2015년 인구는 39,939명이다.
 
*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고려]] 때 만든 성본으로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상장군계 인동 장씨]]'''와 '''장계'''(張桂)계를 시조로 하는 '''[[직제학계 인동 장씨]]'''가 있다. 2015년 인구는 666,652명이다. 그 중 상장군계 인동 장씨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상장군계 인동 장씨]]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초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0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415명의 과거 급제자와 음서제 출신 음관 104명을 배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lst/lstView.aks?lstId=LST_186_500_0433&curSetPos=2&curSPos=0&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인동장씨 (상장군계) -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옥산화벌(玉山華閥)로 알려져 있다.<ref>[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30068 상장군계 인동 장씨 - 성씨뉴스닷컴]</ref>
** [[직제학계 인동 장씨]]의 시조 장계(張桂)는 [[고려]] [[충렬왕]] 때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3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ref>[http://people.aks.ac.kr/front/tabCon/lst/lstView.aks?lstId=LST_186_500_0434&curSetPos=3&curSPos=1&category=dirSer&isEQ=true&kristalSearchArea=B 인동장씨 (직제학계) -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목천 장씨]]'''(木川 張氏) 시조 '''장빈'''(張彬)은 [[고려]] 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백제 유민들이 순응하지 않고 [[백제]] 재건운동을 벌이자 왕건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 상(象; 코끼리), 돈(豚; 돼지), 장(獐; 노루) 등의 성을 주었는데 후손들이 뒷날 우(于), 상(尙), 돈(頓), 장(張)으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로 [[장윤문]](張允文), 조선시대 무신으로 [[장윤]](張潤)이 있다. 2015년 인구는 15,740명이다.
 
* '''[[결성 장씨]]'''(結城 張氏) 시조 '''장갑'''(張甲)은 [[고려]] 때 호장으로 그의 증손 [[장하 (고려)|장하]](張夏)가 고려 말기 한성판윤을 지내고 결성군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7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24,921명이다.
 
* '''[[단양 장씨]]'''(丹陽 張氏) 시조 '''장순익'''(張順翼)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6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44,334명이다.
 
* '''[[구례 장씨]]'''(求禮 張氏) 시조 '''장악'''(張岳)은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2015년 인구는 구례 장씨 15,571명, 봉성 장씨 1,670명이다.
 
* '''[[덕수 장씨]]'''(德水 張氏)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본래 [[위구르]]계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고려]]에 귀화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수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24,185명이다.


====한국====
'''장'''(張)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19,339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위이다. [[덕수 장씨]]와 [[절강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대부분 [[고려]] 때 창성된 토착 성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며, 선계 미상의 본이 많다. 인구는 시조가 각기 다른 [[인동 장씨]]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 '''[[흥덕 장씨]]'''(興德 張氏) 시조 '''장유'''(張儒)는 [[후백제]] 상질현(尙質縣 : 現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고려]] 초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냈다. 그는 [[후삼국 시대]] 난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배웠고,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환국하여 [[고려 광종]] 때 예빈성(禮賓省)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흥덕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6_726_0437|흥덕 장씨}}</ref> 2000년 인구는 44,705명이다.
* '''[[안동 장씨]]'''(安東 張氏) 시조 '''장정필'''(張貞弼)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워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에 오르고 고창군에 봉해졌다. 안동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6_330_0430|안동 장씨}}</ref> 2000년 인구는 83,961명이다.
*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고려]] 때 만든 성본으로, 시조를 달리하는 '''장금용'''(張金用)계와 '''장계'''(張桂)계, '''장계임'''(張繼任)계가 있다. 2000년 인구는 591,315명이다.
**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때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다.
** 시조 '''장계'''(張桂)는 [[고려]] [[충렬왕]] 때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 시조 '''장계임'''(張繼任)은 [[고려]] [[충렬왕]] 때 보문각제학(寶文閣提學)을 역임하고, 증 삼중대광(贈三重大匡),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 춘추관사(春秋舘事)를 제수 받았다.
* '''[[목천 장씨]]'''(木川 張氏) 시조 '''장빈'''(張彬)은 [[고려]] 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백제 유민들이 순응하지 않고 [[백제]] 재건운동을 벌이자 왕건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 상(象; 코끼리), 돈(豚; 돼지), 장(獐; 노루) 등의 성을 주었는데 후손들이 뒷날 우(于), 상(尙), 돈(頓), 장(張)씨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11,160명이다.
* '''[[결성 장씨]]'''(結城 張氏) 시조 '''장갑'''(張甲)은 [[고려]] 때 호장으로 그의 증손 [[장하]](張夏)가 고려 말기 한성판윤을 지내고 결성군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21,068명이다.
* '''[[단양 장씨]]'''(丹陽 張氏) 시조 '''장순익'''(張順翼)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33,295명이다.
* '''[[덕수 장씨]]'''(德水 張氏)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본래 '''[[위구르]]'''계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 때 [[고려]]에 귀화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수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인구는 21,006명이다.
* '''[[태원 장씨]]'''(太元 張氏) 시조 '''장문한'''(張文翰)은 [[조선 명종]] 21년(156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냈다.
* '''[[태원 장씨]]'''(太元 張氏) 시조 '''장문한'''(張文翰)은 [[조선 명종]] 21년(156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냈다.
* '''[[절강 장씨]]'''(浙江 張氏) 시조 '''장해빈'''(張海濱)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의 휘하 병사로 [[조선]]에 왔다가 울산의 증성(甑城) 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2000년 인구는 3,300명이다.
 
*'''순천 장씨'''(順川 張氏) 시조 장천로(張天老)는 『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10세손인 연우(延佑)의 둘째 아들이라 함. 천로는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증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고 순천군(順天君)에 봉(封)해졌다. 이후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순천(順天)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절강 장씨]]'''(浙江 張氏) 시조 '''장해빈'''(張海濱)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의 휘하 병사로 [[조선]]에 왔다가 울산의 증성(甑城) 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2015년 인구는 3,987명이다.


== 줄 장 蔣 ==
== 줄 장 蔣 ==
; 중국
'''장'''(蔣)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1,508명으로 조사되었다.  
'''장'''(蔣, 병음 : Jiang)씨의 득성(得姓) 근원은 중국 춘추시대의 [[주나라]] 주공(周公)의 셋째 아들 백령(伯齡)이 하남성(河南省) 기사현(期思縣)을 장국(蔣國)으로 하사 받아 국명을 성(姓)으로 삼았다고 한다.


인물로는 [[삼국시대]] [[장완]], 중화민국의 국가원수 [[장제스]]가 있다.
'''[[아산 장씨]]'''(牙山 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송나라]]의 신경위대장군으로, 금나라의 침입을 당하게 되자 [[고려 예종]] 때 [[고려]]에 망명하여 [[아산]]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9_323_0438|아산 장씨}}</ref>


; 한국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 소설가 [[장정일]](蔣正一)이 있다.
'''장'''(蔣)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7,708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95위이다. 본관은 [[아산 장씨|아산]](牙山) 단본이다. 역사 인물로 [[조선 세종]] 때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이 있다.
* '''[[아산 장씨]]'''(牙山 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송나라]]의 신경위대장군으로, 금나라의 침입을 당하게 되자 [[고려 예종]] 때 [[고려]]에 망명하여 [[아산]]을 본관으로 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9_323_0438|아산 장씨}}</ref>


== 글 장 章 ==
== 글 장 章 ==
; 중국
장(章)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764명으로 조사되었다.  
''''''(章, 병음 : Zhang)씨는 주나라 건국공신 강태공의 강씨(姜氏)에서 분파한 성씨이다. '''[[장한]]'''(章邯)은 기원전 [[진나라]] 말기, [[하북]](河北)의 [[진나라|진(秦)나라]] 주력부대의 장군이다.


; 한국
'''[[거창 장씨]]'''(居昌 章氏)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은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두민(斗民)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장'''(章)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562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128위이다. 본관은 [[거창 장씨|거창]](居昌) 단본이다.
 
'''[[거창 장씨]]'''(居昌 章氏)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은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 판도판서, 예문관대제학 춘추관사를 지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인물|LST_187_033_0440|거창 장씨}}</ref>


== 씩씩할 장 莊 ==
== 씩씩할 장 莊 ==
; 중국
'''장'''(莊)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45명으로 조사되었다.
'''장'''(莊, 병음 : Zhuang)씨는 중국 [[초나라]] [[초 장왕|장왕]](莊王)의 후손이다. '''[[장자]]'''(莊子)는 전국시대 [[송나라]] 출신의 사상가이다. 장교(莊蹻)는 [[초 장왕]]의 후손으로 [[초 (춘추전국)|초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기타 [[회족]] 계통과 주(朱)씨에서 개성한 장씨가 있다고 한다.


; 한국
* '''[[금천 장씨]]'''(衿川 莊氏)의 시조 '''장보'''(莊甫)는 [[고려 명종]] 때 무신으로 병부원외랑을 지내다가 거제현감으로 좌천되어 후에 귀양가서 졸하였다고 한다. 1세조 '''장숙'''(莊俶)은 [[조선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2015년 인구는 217명이다.
'''장'''(莊)씨는 2000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648명으로 조사되었다. 본관은 금천, 장연 2본이다.
* '''[[전주 장씨]]'''(全州 莊氏)장석황(莊錫滉)이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거주지가 평양(平壤)으로 되어 있다. 2015년 인구는 20명이다.
* '''[[금천 장씨]]'''(衿川 莊氏)의 시조 '''장보'''(莊甫)는 [[고려 명종]] 때 무신으로 병부원외랑을 지내다가 거제현감으로 좌천되어 후에 귀양가서 졸하였다고 한다. 1세조 '''장숙'''(莊俶)은 [[조선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한 장석황(莊錫滉)이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기록되어 있으나 본관은 전주(全州), 거주지는 평양(平壤)으로 되어 있다. 전주 장씨는 현재 집계되지 않고 있다.


== 각주 ==
{{각주}}
{{각주}}
{{한국인의 성씨}}
{{발해의 성씨}}
{{퍼온문서|15484481}}
[[분류:장씨| ]]
 
[[분류:한국의 성씨]]
[[분류:한국인의 성씨]]

2021년 7월 19일 (월) 19:02 판

(張, 章, 莊, 蔣)은 한국의 성씨이다.

베풀 장 張

(張)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992,721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9위이다.

덕수 장씨절강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본관은 대부분 고려 때 창성된 토착 성본이라는 것이 통설이며, 선계 미상의 본이 많다. 고려사에 나오는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본관은 고려 개국 전후에 등장한 흥덕 장씨이다. 인구는 시조가 각기 다른 인동 장씨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상장군계 인동 장씨에서 가장 많은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장보고(張寶高)는 처음 이름이 궁복(弓福)이었고, 그가 당나라에 건너간 뒤에 중국식 성인 장(張)으로 성을 삼았던 사실로 볼 때, 장보고가 최초의 장(張)씨 성을 가졌던 인물로 파악된다.[1] 한편, 남송(南宋)의 홍호(洪皓)가 엮은 〈송막기문 松漠紀聞〉에서 발해의 유력한 귀족 성(姓)으로 (高)·장(張)·(楊)·두(竇)·오(烏)·(李) 6성을 언급하였다.[2][3]

  • 흥덕 장씨(興德 張氏) 시조 장유(張儒)는 후백제 상질현(尙質縣 : 現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출신으로 고려 초 광평시랑(廣評侍郞)을 지냈다. 그는 후삼국 시대 난을 피하여 오월국(吳越國)으로 건너가 중국어를 배웠고, 고려 태조가 삼국을 통일한 뒤에 환국하여 고려 광종 때 예빈성(禮賓省)에 있으면서 중국 사신을 접대하는 일을 맡았다. 장유의 아들 장연우(張延祐)는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이 침입해오자 왕을 호종하였고, 중추원사(中樞院事),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역임하였으며, 뒤에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추증되었다.[4] 흥덕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3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5] 2015년 인구는 흥덕 장씨 37,423명, 흥성 장씨 21,973명으로 총 59,396명이다.
  • 안동 장씨(安東 張氏) 시조 장정필(張貞弼)은 고려 태조를 도와 고창군에서 견훤을 토벌하여 병산대첩의 전공을 세워 삼중대광보사벽상공신 태사에 오르고 고창군에 봉해졌다. 안동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4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7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6] 2015년 인구는 39,939명이다.
  • 인동 장씨(仁同 張氏)는 고려 때 만든 성본으로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상장군계 인동 장씨장계(張桂)계를 시조로 하는 직제학계 인동 장씨가 있다. 2015년 인구는 666,652명이다. 그 중 상장군계 인동 장씨가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 상장군계 인동 장씨의 시조 장금용(張金用)은 고려 초 삼중대광(三重大匡) 신호위상장군(神虎衛上將軍)을 역임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0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415명의 과거 급제자와 음서제 출신 음관 104명을 배출하였다.[7] 옥산화벌(玉山華閥)로 알려져 있다.[8]
    • 직제학계 인동 장씨의 시조 장계(張桂)는 고려 충렬왕 때 진현전직제학(進賢殿直提學)을 거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이르렀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7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31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9]
  • 목천 장씨(木川 張氏) 시조 장빈(張彬)은 고려 때 목천군(木川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후삼국을 통일하던 당시, 백제 유민들이 순응하지 않고 백제 재건운동을 벌이자 왕건이 이 지방민에게 우(牛; 소), 상(象; 코끼리), 돈(豚; 돼지), 장(獐; 노루) 등의 성을 주었는데 후손들이 뒷날 우(于), 상(尙), 돈(頓), 장(張)으로 성씨를 바꾸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인물로 장윤문(張允文), 조선시대 무신으로 장윤(張潤)이 있다. 2015년 인구는 15,740명이다.
  • 결성 장씨(結城 張氏) 시조 장갑(張甲)은 고려 때 호장으로 그의 증손 장하(張夏)가 고려 말기 한성판윤을 지내고 결성군에 봉해졌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5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7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24,921명이다.
  • 단양 장씨(丹陽 張氏) 시조 장순익(張順翼)은 고려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명을 배출하였다. 문과 및 무과, 그 외 과거 급제자 모두 합해 총 68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44,334명이다.
  • 구례 장씨(求禮 張氏) 시조 장악(張岳)은 고려 인종(仁宗)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봉성군(鳳城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2015년 인구는 구례 장씨 15,571명, 봉성 장씨 1,670명이다.
  • 덕수 장씨(德水 張氏) 시조 장순룡(張舜龍)은 본래 위구르계 사람으로 고려 충렬왕고려에 귀화하여 첨의참리(僉議參理),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등을 지내고 덕성부원군(德城府院君)에 봉해졌다. 덕수 장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13명을 배출하였다. 2015년 인구는 24,185명이다.
  • 태원 장씨(太元 張氏) 시조 장문한(張文翰)은 조선 명종 21년(1566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거창현감(居昌縣監)을 지냈다.
  • 순천 장씨(順川 張氏) 시조 장천로(張天老)는 『장씨상계세보(張氏上系世譜)』의 기록(記錄)에 의하면 장씨(張氏)의 도시조(都始祖) 정필(貞弼)의 10세손인 연우(延佑)의 둘째 아들이라 함. 천로는 고려(高麗)에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증서시랑(中書侍郞)을 지냈고 순천군(順天君)에 봉(封)해졌다. 이후 후손(後孫)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관향(貫鄕)을 순천(順天)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 절강 장씨(浙江 張氏) 시조 장해빈(張海濱)은 조선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유격장군 오유충(吳惟忠)의 휘하 병사로 조선에 왔다가 울산의 증성(甑城) 싸움에서 유탄을 맞아 귀국하지 못하고 군위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전한다. 2015년 인구는 3,987명이다.

줄 장 蔣

(蔣)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21,508명으로 조사되었다.

아산 장씨(牙山 蔣氏)의 시조 장서(蔣壻)는 송나라의 신경위대장군으로, 금나라의 침입을 당하게 되자 고려 예종고려에 망명하여 아산을 본관으로 하였다고 한다.[10]

인물로는 조선 세종 때 과학자인 장영실(蔣英實), 소설가 장정일(蔣正一)이 있다.

글 장 章

장(章)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5,764명으로 조사되었다.

거창 장씨(居昌 章氏)의 시조 장종행(章宗行)은 고려 충렬왕 때 봉익대부(奉翊大夫)로 판도판서(版圖判書)를 거쳐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겸 춘추관사(春秋館事)를 지냈다고 한다. 그의 아들 두민(斗民)이 상장군(上將軍)이 되어 홍건적을 물리치는데 공을 세워 아림군(娥林君)에 봉해졌다고 한다.

씩씩할 장 莊

(莊)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445명으로 조사되었다.

  • 금천 장씨(衿川 莊氏)의 시조 장보(莊甫)는 고려 명종 때 무신으로 병부원외랑을 지내다가 거제현감으로 좌천되어 후에 귀양가서 졸하였다고 한다. 1세조 장숙(莊俶)은 조선 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다. 2015년 인구는 217명이다.
  • 전주 장씨(全州 莊氏)는 장석황(莊錫滉)이 1882년(고종 19년)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국조방목(國朝榜目)』에 거주지가 평양(平壤)으로 되어 있다. 2015년 인구는 20명이다.

각주

각주

틀:발해의 성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