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서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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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 수원화성 화서문.JPG
|그림 = 수원화성 화서문.JPG
|종목 = [[보물 (문화재)|보물]] 제403호
|종목 = [[보물 (문화재)|보물]] 제403호
|명칭 = 수원 화성
|명칭 = 화서문
|한자 = 水原 華城
|한자 = 華西門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1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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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개요==
[[수원 화성]]의 서쪽 성문으로 문의 시설과 크기는 동문인 창룡문과 거의 같은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수원 화성]]의 서쪽 성문으로 문의 시설과 크기는 동문인 창룡문과 거의 같은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ㅈ|이름 자체가 화성의 서문이라는 뜻이다(...)}}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북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어서 성문의 방어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북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어서 성문의 방어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웹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십중팔구 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함께 찍힌 사진이 앞쪽에 튀어나온다. 여기에 올라온 사진도 마찬가지로 서북공심돈이 같이 끼어들어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웹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이지만
여담으로 웹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십중팔구 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함께 찍힌 사진이 앞쪽에 튀어나온다. 여기에 올라온 사진도 마찬가지로 서북공심돈이 같이 끼어들어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웹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이지만
==트라비아==
이 성문 앞의 도로는 바로 [[수원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다. 지도를 쭉 따라가 보면 경기도 화성시의 향남읍쪽으로 연결이 된다. 실제 이 성문 앞의 교통로는 조선시대 당시 이쪽은 남양만(현 아산만)으로 연결되어 서해 바다의 물류가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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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9일 (일) 20:25 판

틀:문화재

개요

수원 화성의 서쪽 성문으로 문의 시설과 크기는 동문인 창룡문과 거의 같은 규모와 구조를 가지고 있다.[1] 네모 반듯한 큰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축대 위에 1층의 건물을 세웠는데,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기둥 사이는 모두 개방되어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 건물이고, 축대의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과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은 반달모양의 옹성이 있다. 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지키기 위한 구실을 하며 2중의 방어 효과를 갖는다.

옹성의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서북공심돈이 성벽을 따라서 연결되어 있어서 성문의 방어력을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여담으로 웹에서 수원 화성으로 이미지 검색을 하면 십중팔구 이 화서문과 서북공심돈이 함께 찍힌 사진이 앞쪽에 튀어나온다. 여기에 올라온 사진도 마찬가지로 서북공심돈이 같이 끼어들어가 있다. 물론 일반적인 웹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찍은 것이지만

트라비아

이 성문 앞의 도로는 바로 수원역으로 연결되는 도로이다. 지도를 쭉 따라가 보면 경기도 화성시의 향남읍쪽으로 연결이 된다. 실제 이 성문 앞의 교통로는 조선시대 당시 이쪽은 남양만(현 아산만)으로 연결되어 서해 바다의 물류가 이쪽으로 들어오게 되는 통로의 역할을 하였다고 한다.

각주

  1. 이름 자체가 화성의 서문이라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