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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6일 (토) 11:39 기준 최신판

金禹鉉. 호는 두산(斗山), 창씨명은 金光禹鉉. 대한민국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전락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으나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10월 24일 경상북도 영풍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흥화학교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으며, 일본으로 유학가서 의학을 공부했지만 신병으로 1년만에 귀국한 뒤 1917년 마산 문창교회를 담임하던 한석진 목사의 초청으로 마산 대창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9년 3월 경상남도 마산 대창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그는 3.1 운동이 평양과 서울에서 발발하자 이당 김은호선생이 인편으로 보낸 독립선언문과 편지를 받게되고 학교 등사기를 이용해 독립선언문 수천장을 복사하여 학생들과 장꾼틀에게 배포하고 여인들은 치마 속에 선언서를 감추어 배포하였다. 3월 31일 진영 장날에 미리 제작해 둔 태극기를 게양하고,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수십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부산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으나, 5월 1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복역했다.

1920년 4월 감형으로 출옥한 그는 잠시 교사로 일하다가 1922년 3월 일본에 건너가 고베 주오신학교에 입학하여 1926년 3월 졸업했다. 이때 일본의 기독교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무교회주의에 깊이 감명 받았다. 귀국 후 1927년 1월부터 경성 안동교회 조사(助事)로 재임하다가 6월 경기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안동교회 제4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1939년 9월까지 안동교회를 담임했다.

1937년 8월 조선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주최한 시국강연회에 함경남북도 지역 연사로 참여했으며, 같은 해 9월 학무국 주최 제2차 시국강연반에도 충북 지역 인사로 참여했다. 1938년 5월 경성부민관에서 조선기독교연합회를 조직할 때 서무위원을 맡았고, 7월 조선기독교 연합회가 확대 개편될 때도 서무부 상무위원을 맡았다. 같은 해 8월 윤치호와 함께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기독교 애국좌담회'를 개최해 일제를 위해 충성을 바칠 것을 다짐했으며, 1938년 11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의 순회강연반 연사로 참여해 경기도 지역을 순회 강연했다.

1939년 4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참사를 맡았고, 11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 예수교 장로회 연맹 경성노회 지맹 이사를 맡았다. 1941년 5월 국민총력 조선 연맹 참사를 맡았고, 9월 조선 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42년 11월 국민총력 조선예수교 장로회 경기노회 연맹 연성부장을 맡아 일제의 전쟁 지원 활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1945년 10월 초 일간 신문 <국민신문>을 창간했지만 재정 부족으로 1주일만에 폐간했다. 1946년 11월 이호빈 목사와 함께 초교파 평신도 신학교인 중앙신학교를 설립하고 YMCA 회관에서 개강했다. 6.25 전쟁 발발 후 부산으로 피산가서 1951년 12월까지 YMCA 연맹 이사장을 맡았으며, 마산 창신중학교 교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1953년 9월 일본으로 건너간 그는 1957년 12월까지 도쿄 한국 YMCA 총무를 맡았다. 이후 귀국한 그는 1958년 1월부터 중앙신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1966년 1월부터 한길교회를 담임했다. 말년에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서울에서 여생을 보내다 1989년 1월 13일에 사망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김우현에게 3.1 운동에 참여한 공로를 인정하여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가 1930년대 후반 이후 친일 행적을 벌인 것이 확인되면서 2010년 서훈 취소되었다. 이에 김우현의 후손들이 반발하여 소송을 제기했으나, 2012년 11월 9일 서울고등법원은 서훈 취소 절차에 문제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