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편집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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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서명하에 태화관과 파고다 공원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 [[3·1 운동]]을 촉발시킨 독립선언서이다. 기미년(己未年)에 발표되었다 하여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로 일컬어지며, 3·1 독립 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로 불리기도 한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의 서명하에 태화관과 파고다 공원에서 발표된 독립선언서. [[3.1 운동]]을 촉발시킨 독립서이다. 기미년(己未年)에 발표되었다 하여 '기미독립선언서(己未獨立宣言書)'로 일컬어지며, 3·1 독립 선언서(三一獨立宣言書)로 불리기도 한다.
== 배경 ==
== 배경 ==
[[손병희]]를 수장으로 하는 [[천도교]] 세력은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한 이래 민중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벌였지만, 비밀리에 농어민의 동향을 조사하여 민중운동이 발발했을 때 호응할 가능성을 살폈다. 1918년 8월경 일본 본토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면서 일제가 이를 수습하느라 정신 없는 걸 보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9월 9일에 독립시위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고 민중의 호응 여부가 불확실한 점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무산되었다.
[[손병희]]를 수장으로 하는 [[천도교]] 세력은 1912년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를 조직한 이래 민중운동을 일으킬 준비를 했다. 겉으로는 종교 활동을 벌였지만, 비밀리에 농어민의 동향을 조사하여 민중운동이 발발했을 때 호응할 가능성을 살폈다. 1918년 8월경 일본 본토에서 쌀 소동이 일어나면서 일제가 이를 수습하느라 정신 없는 걸 보고 최남선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를 채택하여 9월 9일에 독립시위를 전개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고 민중의 호응 여부가 불확실한 점 등 여러 문제가 있어서 무산되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대한제국 고종|고종]]이 붕어했다. 이후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조선 각지에 확산되어 민심이 격양되자, 천도교 인사들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최남선]] 등 중진들은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와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 단체 및 유림을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한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붕어했다. 이후 고종이 일제에게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조선 각지에 확산되어 민심이 격양되자, 천도교 인사들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다.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최린]], [[최남선]] 등 중진들은 일본 정부에 독립청원서와 국권반환 요구서를 보내는 한편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계획을 세웠다. 다만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거족적인 민족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기독교, 불교 등 각 종교 단체 및 유림을 망라하는 동시에, 저명한 인사들을 민족 대표로 내세우기로 합의했다.


1919년 2월 8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받은 도쿄의 유학생들이 도쿄 YMCA 회관에서 [[2·8 독립선언]]발표했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한 몫한 뒤 국내로 잠입한 [[최팔용]]은 모교인 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학교 교사를 역임하던 [[현상윤]]을 찾아가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현상윤은 즉시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그들은 천도교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후 최남선 등이 개신교 인사들과 접촉해 독립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1919년 2월 8일,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영향받은 도쿄의 유학생들이 도쿄 YMCA 회관에서 [[2.8 독립선언서]]발표했다. 독립선언서 작성에 한 몫한 뒤 국내로 잠입한 [[최팔용]]은 모교인 보성학교의 은사이자 중앙학교 교사를 역임하던 [[현상윤]]을 찾아가 국내에서도 독립선언을 하자고 제안했다. 현상윤은 즉시 보성학교 [[최린]] 교장과 중앙학교 [[송진우]] 교장에게 이 소식을 알렸고,그들은 천도교 수장인 [[손병희]]를 찾아갔다. 이후 최남선 등이 개신교 인사들과 접촉해 독립선언을 공동으로 발표하자고 제안했다.


사실 2월 22일까지만 해도, 개신교 측은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천도교 측에서 독립 청원이 아닌 독립 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승훈 (1864년)|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안세환]], [[현순]] 등 개신교 인사들은 논의 끝에 천도교 측의 요구대로 하기로 했다. 2월 24일,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최린의 집으로 가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을 함께 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기독교 측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최린은 크게 기뻐했으며, 향후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이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같은 날 불교계 인사들인 [[한용운]], [[백용성]]이 가세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사실 2월 22일까지만 해도, 개신교 측은 독립선언이 아닌 독립'청원' 방식을 채택하기로 했다. 하지만 천도교 측에서 독립 청원이 아닌 독립 선언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승훈]], [[함태영]], [[박희도]], [[오화영]], [[신흥식]], [[안세환]], [[현순]] 등 개신교 인사들은 논의 끝에 천도교 측의 요구대로 하기로 했다. 2월 24일, 이승훈은 함태영과 함께 최린의 집으로 가 독립청원과 독립선언을 함께 하는 방식을 취했다며 기독교 측의 결정사항을 전달했다. 최린은 크게 기뻐했으며, 향후 독립운동 계획에 대해 구체적인 협의를 했으며, 독립선언서 초안을 이들 두 사람에게 보여주었다. 같은 날 불교계 인사들인 [[한용운]], [[백용성]]이 가세하면서 [[민족대표 33인]]이 결성되어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는데,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 개신교 계열: [[이승훈 (1864년)|이승훈]], [[양전백]], [[오화영]], [[신홍식]],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1877년)|김병조]], [[김창준 (1890년)|김창준]], [[유여대]], [[이명룡]],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최성모]], [[이갑성]], [[박희도]]
* 개신교 계열: [[이승훈 (1864년)|이승훈]], [[양전백]], [[오화영]], [[신홍식]], [[길선주]], [[이필주]], [[김병조 (1877년)|김병조]], [[김창준 (1890년)|김창준]], [[유여대]], [[이명룡]], [[박동완]], [[정춘수]], [[신석구]], [[최성모 (1874년)|최성모]], [[이갑성]], [[박희도]]
* 천도교 계열: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1858년)|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임예환]], [[이종훈]], [[최린]]
* 천도교 계열: [[손병희]],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1858년)|이종일]], [[권병덕]], [[양한묵]], [[김완규]], [[홍기조]], [[홍병기]], [[나용환]], [[나인협]], [[박준승]], [[임예환]], [[이종훈 (1858년)|이종훈]], [[최린]]
* 불교 계열: [[한용운]], [[백용성]]
* 불교 계열: [[한용운]], [[백용성]]


독립선언서의 초안은 최남선이 작성했으며, 손병희는 대원칙을 잡았다. 서명 순서를 놓고 여러 사람이 자기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다퉜는데, 이승훈이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호통하여 침묵시켰다. 이후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이름을 먼저 올렸다. 또한 [[한용운]]의 주장에 따라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독립선언서의 초안은 최남선이 작성했으며, 손병희는 대원칙을 잡았다. 서명 순서를 놓고 여러 사람이 자기 이름을 먼저 올리겠다고 다퉜는데, 이승훈이 “순서는 무슨 순서야! 이거 죽는 순서야. 아무를 쓰면 어때. 손병희를 먼저 써”라고 호통하여 침묵시켰다. 이후 연장자이자 주최자인 손병희가 대표로 이름을 먼저 올렸다. 또한 [[한용운]]의 주장에 따라 뒷부분에 '공약 3장'이 추가되었다.
== 전문 ==
== 전문 ==
=== 국한문혼용 ===
=== 국한문혼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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宣言書
 
吾等은 玆에 我 朝鮮의 獨立國임과 朝鮮人의 自主民임을 宣言하노라 此로써 世界萬邦에 告하야 人類平等의 大義를 克明하며 此로써 子孫萬代에 誥하야 民族自存의 正權을 永有케 하노라. 半萬年 歷史의 權威를 仗하야 此를 宣言함이며 二千萬 民衆의 誠忠을 合하야 此를 佈明함이며 民族의 恒久如一한 自由發展을 爲하야 此를 主張함이며 人類的良心의 發露에 基因한 世界改造의 大機運에 順應幷進하기 爲하야 此를 提起함이니 是ㅣ 天의 明命이며 時代의 大勢ㅣ며 全人類 共存同生權의 正當한 發動이라 天下何物이던지 此를 沮止抑制치 못 할지니라. 舊時代의 遺物인 侵略主義 强權主義의 犧牲을 作하야 有史以來 累千年에 처음으로 異民族 箝制의 痛苦를 甞한 지 今에 十年을 過한지라 我 生存權의 剝喪됨이 무릇 幾何ㅣ며 心靈上 發展의 障礙됨이 무릇 幾何ㅣ며 民族的 尊榮의 毁損됨이 무릇 幾何ㅣ며 新銳와 獨創으로써 世界文化의 大潮流에 寄與補裨할 機緣을 遺失함이 무릇 幾何ㅣ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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吾等은玆에我朝鮮의獨立國임과朝鮮人의自主民임을宣言하노라此로써世界萬邦에告하야人類平等의大義를克明하며此로써子孫萬代에誥하야民族自存의正權을永有케하노라.半萬年歷史의權威를仗하야此를宣言함이며二千萬民衆의誠忠을合하야此를佈明함이며民族의恒久如一한自由發展을爲하야此를主張함이며人類的良心의發露에基因한世界改造의大機運에順應幷進하기爲하야此를提起함이니是ㅣ天의明命이며時代의大勢ㅣ며全人類共存同生權의正當한發動이라天下何物이던지此를沮止抑制치못할지니라.舊時代의遺物인侵略主義强權主義의犧牲을作하야有史以來累千年에처음으로異民族箝制의痛苦를甞한지今에十年을過한지라我生存權의剝喪됨이무릇幾何ㅣ며心靈上發展의障礙됨이무릇幾何ㅣ며民族的尊榮의毁損됨이무릇幾何ㅣ며新銳와獨創으로써世界文化의大潮流에寄與補裨할機緣을遺失함이무릇幾何ㅣ뇨.
 
噫라舊來의抑鬱을宣暢하려하면時下의苦痛을擺脫하려하면將來의脅威를芟除하려하면民族的良心과國家的廉義의壓縮銷殘을興奮伸張하려하면各個人格의正當한發達을遂하려하면可憐한子弟에게苦恥的財產을遺與치안이하려하면子子孫孫의永久完全한慶福을導迎하려하면最大急務가民族的獨立을確實케함이니二千萬各個가人마다方寸의刃을懷하고人類通性과時代良心이正義의軍과人道의干戈로써護援하는今日吾人은進하야取하매何强을挫치못하랴退하야作하매何志를展치못하랴.
 
丙子修好條規以來時時種種의金石盟約을食하얏다하야日本의無信을罪하려안이하노라.學者는講壇에서政治家는實際에서我祖宗世業을植民地視하고我文化民族을土昧人遇하야한갓征服者의快를貪할뿐이오我의久遠한社會基礎와卓犖한民族心理를無視한다하야日本의少義함을責하려안이하노라.自己를策勵하기에急한吾人은他의怨尤를暇치못하노라.現在를綢繆하기에急한吾人은宿昔의懲辨을暇치못하노라.今日吾人의所任은다만自己의建設이有할뿐이오決코他의破壞에在치안이하도다.嚴肅한良心의命令으로써自家의新運命을開拓함이오決코舊怨과一時的感情으로써他를嫉逐排斥함이안이로다.舊思想舊勢力에羈縻된日本爲政家의功名的犧牲이된不自然又不合理한錯誤狀態를改善匡正하야自然又合理한正經大原으로歸還케함이로다.當初에民族的要求로서出치안이한兩國倂合의結果가畢竟姑息的威壓과差別的不平과統計數字上虛飾의下에서利害相反한兩民族間에永遠히和同할수업는怨溝를去益深造하는今來實積을觀하라.勇明果敢으로써舊誤를廓正하고眞正한理解와同情에基本한友好的新局面을打開함이彼此間遠禍召福하는捷徑임을明知할것안인가.또二千萬含憤蓄怨의民을威力으로써拘束함은다만東洋의永久한平和를保障하는所以가안일뿐안이라此로因하야東洋安危의主軸인四億萬支那人의日本에對한危懼와猜疑를갈스록濃厚케하야그結果로東洋全局이共倒同兦의悲運을招致할것이明하니今日吾人의朝鮮獨立은朝鮮人으로하야금正當한生榮을遂케하는同時에日本으로하야금邪路로서出하야東洋支持者인重責을全케하는것이며支那로하야금夢寐에도免하지못하는不安恐怖로서脫出케하는것이며또東洋平和로重要한一部를삼는世界平和人類幸福에必要한階段이되게하는것이라이엇지區區한感情上問題ㅣ리오.
 
아아新天地가眼前에展開되도다.威力의時代가去하고道義의時代가來하도다.過去全世紀에鍊磨長養된人道的精神이바야흐로新文明의曙光을人類의歷史에投射하기始하도다.新春이世界에來하야萬物의回蘇를催促하는도다.凍氷寒雪에呼吸을閉蟄한것이彼一時의勢ㅣ라하면和風暖陽에氣脈을振舒함은此一時의勢ㅣ니天地의復運에際하고世界의變潮를乘한吾人은아모躊躇할것업스며아모忌憚할것업도다.我의固有한自由權을護全하야生旺의樂을飽享할것이며我의自足한獨創力을發揮하야春滿한大界에民族的精華를結紐할지로다.吾等이玆에奪起하도다良心이我와同存하며眞理가我와幷進하는도다男女老少업시陰鬱한古巢로서活潑히起來하야萬彙群象으로더부러欣快한復活을成遂하게되도다.千百世祖靈이吾等을陰佑하며全世界氣運이吾等을外護하나니着手가곳成功이라.다만前頭의光明으로驀進할ᄯᅡ름인뎌.
 
 
{{크기|++|公約三章}}


噫라 舊來의 抑鬱을 宣暢하려 하면 時下의 苦痛을 擺脫하려 하면 將來의 脅威를 芟除하려 하면 民族的 良心과 國家的 廉義의 壓縮銷殘을 興奮伸張하려 하면 各個人格의 正當한 發達을 遂하려 하면 可憐한 子弟에게 苦恥的 財產을 遺與치 안이하려 하면 子子孫孫의 永久完全한 慶福을 導迎하려 하면 最大急務가 民族的 獨立을 確實케 함이니 二千萬 各個가 人마다 方寸의 刃을 懷하고人類通性과 時代良心이 正義의 軍과 人道의 干戈로써 護援하는 今日 吾人은 進하야 取하매 何强을 挫치 못하랴 退하야 作하매 何志를 展치 못하랴.


一、今日吾人의此擧는正義、人道、生存、尊榮을爲하는民族的要求ㅣ니오즉自由的精神을發揮할것이오決코排他的感情으로逸走하지말라.
丙子修好條規 以來 時時種種의 金石盟約을 食하얏다 하야 日本의 無信을 罪하려 안이 하노라. 學者는 講壇에서 政治家는 實際에서 我 祖宗世業을 植民地視하고 我文化民族을 土昧人遇하야 한갓 征服者의 快를 貪할 뿐이오 我의 久遠한 社會基礎와 卓犖한 民族心理를 無視한다 하야 日本의 少義함을 責하려 안이 하노라. 自己를 策勵하기에 急한 吾人은 他의 怨尤를 暇치 못하노라. 現在를 綢繆하기에 急한 吾人은 宿昔의 懲辨을 暇치 못 하노라. 今日 吾人의 所任은 다만 自己의 建設이 有할 뿐이오 決코 他의 破壞에 在치 안이 하도다. 嚴肅한 良心의 命令으로써 自家의 新運命을 開拓함이오 決코 舊怨과 一時的 感情으로써 他를 嫉逐排斥함이 안이로다. 舊思想 舊勢力에 羈縻된 日本 爲政家의 功名的 犧牲이 된 不自然 又 不合理한 錯誤狀態를 改善匡正하야 自然 又 合理한 正經大原으로 歸還케 함이로다. 當初에 民族的 要求로서 出치 안이한 兩國倂合의 結果가 畢竟 姑息的 威壓과 差別的 不平과 統計數字上 虛飾의 下에서 利害相反한 兩 民族間에 永遠히 和同할 수 업는 怨溝를 去益深造하는 今來實積을 觀하라. 勇明果敢으로써 舊誤를 廓正하고 眞正한 理解와 同情에 基本한 友好的 新局面을 打開함이 彼此間 遠禍召福하는 捷徑임을 明知할 것 안인가. 또 二千萬 含憤蓄怨의 民을 威力으로써 拘束함은 다만 東洋의 永久한 平和를 保障하는 所以가 안일 뿐 안이라 此로 因하야 東洋安危의 主軸인 四億萬 支那人의 日本에 對한 危懼와 猜疑를 갈스록 濃厚케 하야 그 結果로 東洋 全局이 共倒同兦의 悲運을 招致할 것이 明하니 今日 吾人의 朝鮮獨立은 朝鮮人으로 하야금 正當한 生榮을 遂케 하는 同時에 日本으로 하야금 邪路로서 出하야 東洋 支持者인 重責을 全케 하는 것이며 支那로 하야금 夢寐에도 免하지 못하는 不安 恐怖로서 脫出케 하는 것이며 또 東洋平和로 重要한 一部를 삼는 世界平和 人類幸福에 必要한 階段이 되게 하는 것이라 이 엇지 區區한 感情上 問題ㅣ리오.


一、最後의一人ᄭᅡ지民族의正當한意思를快히發表하라.
아아 新天地가 眼前에 展開되도다. 威力의 時代가 去하고 道義의 時代가 來하도다. 過去 全世紀에 鍊磨長養된 人道的 精神이 바야흐로 新文明의 曙光을 人類의 歷史에 投射하기 始하도다. 新春이 世界에 來하야 萬物의 回蘇를 催促하는도다. 凍氷寒雪에 呼吸을 閉蟄한 것이 彼一時의 勢ㅣ라 하면 和風暖陽에 氣脈을 振舒함은 此一時의 勢ㅣ니 天地의 復運에 際하고 世界의 變潮를 乘한 吾人은 아모 躊躇할 것 업스며 아모 忌憚할 것 업도다. 我의 固有한 自由權을 護全하야 生旺의 樂을 飽享할 것이며 我의 自足한 獨創力을 發揮하야 春滿한 大界에 民族的 精華를 結紐할지로다. 吾等이 玆에 奪起하도다 良心이 我와 同存하며 眞理가 我와 幷進하는도다 男女老少 업시 陰鬱한 古巢로서 活潑히 起來하야 萬彙群象으로 더부러 欣快한 復活을 成遂하게 되도다. 千百世 祖靈이 吾等을 陰佑하며 全世界 氣運이 吾等을 外護하나니 着手가 곳 成功이라. 다만 前頭의 光明으로 驀進할 ᄯᅡ름인뎌.


一、一切의行動은가장秩序를尊重하야吾人의主張과態度로하야금어대ᄭᅡ지던지光明正大하게하라.




朝鮮建國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一日朝鮮民族代表
公約三章
一、 今日 吾人의 此擧는 正義、 人道、 生存、 尊榮을 爲하는 民族的 要求ㅣ니 오즉 自由的 精神을 發揮할 것이오 決코 排他的 感情으로 逸走하지 말라.
一、   最後의 一人ᄭᅡ지 民族의 正當한 意思를 快히 發表하라.
一、   一切의 行動은 가장 秩序를 尊重하야 吾人의 主張과 態度로 하야금 어대ᄭᅡ지던지 光明正大하게 하라.




孫秉熙 吉善宙 李弼柱 白龍城 金完圭
朝鮮建國 四千二百五十二年 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金秉祚 金昌俊 權東鎭 權秉悳 羅龍煥
孫秉熙, 吉善宙, 李弼柱, 白龍城, 金完圭
羅仁協 梁旬伯 梁漢默 劉如大 李甲成
金秉祚, 金昌俊, 權東鎭, 權秉悳, 羅龍煥
李明龍 李昇薰 李鍾勳 李鍾一 林禮煥
羅仁協, 梁旬伯, 梁漢默, 劉如大, 李甲成
朴準承 朴熙道 朴東完 申洪植 申錫九
李明龍, 李昇薰, 李鍾勳, 李鍾一, 林禮煥
吳世昌 吳華英 鄭春洙 崔聖模 崔 麟
朴準承, 朴熙道, 朴東完, 申洪植, 申錫九
韓龍雲 洪秉箕 洪其兆
吳世昌, 吳華英, 鄭春洙, 崔聖模, 崔 麟
}}
韓龍雲, 洪秉箕, 洪其兆
출처:위키문헌(퍼블릭도메인)


출처 : 위키 문헌 (퍼블릭 도메인)
=== 국한문병용 ===
=== 국한문병용 ===
宣言書(선언서)
宣言書(선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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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光明正大하게 하라
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야, 吾人(오인)의 主張(주장)과 態度(태도)로 하야금 光明正大하게 하라


朝鮮建國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조선건국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朝鮮建國四千二百五十二年三月 一日 朝鮮民族代表 (단기 4252년 3월 1일. 조선민족대표)


== 해석 ==
== 해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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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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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독립운동]]
[[분류:한국의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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