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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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군사관학교가 보관하고 있는 T-6 '건국호'(등록문화재 667호). 대한민국 공군 최초의 군용기이다.

노스 아메리칸사에서 제작한 2인승 훈련기.

NA-16이라는 훈련기를 기초로 제작한 본격적인 훈련기이다. 1935년 1월에 첫 비행이 시작되었고, 이후 미 육군 항공대와 영국 공군에 공급되었고, 특히 30년대 후반 영국 공군의 파일럿 양성 계획의 중추로서 쓰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 말고 딱히 유별날 거 없는 기체다. 30년대 중반에, 그것도 훈련기로 개발된 기체라 선회도나 속도 등 전투기로서 중요한 그 어느 부분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다. 최대속도가 400km/h에도 미달했으니 도저히 2차 대전기의 하늘에서 사용할 기체는 아니었다. 대전기에는 랜드리스로 영연방 국가에 열심히 공급되었으나 실전용으로 쓰이지는 않았다. 대전 중반기로만 넘어가도 미국이나 영연방이나 파일럿 양성용으로 구형 전투기를 써도 될 정도여서 T-6는 조종간 처음 잡아보는 초짜들이나 잠깐 모는 기종이 되었다.

그래도 이걸 어떻게든 전투용으로 팔아먹어 보겠다고 노스 아메리칸사가 만든 것이 A-27 공격기로 미 육군 항공대가 채용하여 필리핀 주둔군이 운용했다. 그러나 태평양 전쟁 초기 필리핀 방어전에서 제대로 뜨지도 못한채 폭격받아 다 파괴당하고 그나마 이륙한 기체들도 제로센에게 학살당했다. 1941년 시점으로도 도저히 일선 전투에서 써먹을 수 없는 기체였던 것. 대전 중 교전기록은 이게 전부다.

총 15,459기가 제작되었으나 대전기 항공기치고는 적은 편에 속한다.

그래도 일단 만대 이상 찍어냈고, 미군에게 가장 불필요한 기체 중 하나였던 덕에 군소국가들을 중심으로 헐값에 공여되었다. 주로 중남미 국가들이 운용하여 주력기나 관측기로 운용하였다. 이후 한국 전쟁이나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용 관측기로 쓰였고 그리스 내전에서도 실전에 투입되었으나 유의미한 정도는 아니었다.

사실 이렇게만 보면 리브레 위키에 특별히 작성될 일이 없어보이는 기체지만 대한민국 공군이 최초로 운용한 제대로 된 항공기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깊은 기체이다.

한국 공군은 건군 초기에 제대로 된 항공기가 없었다. 미군이 선심쓰듯 원조해준 L-4/5 관측기는 포병용 관측기로 육군 소속이라 공군은 일본이 버리고 간 구닥다리 기체들 몇 개로 공군이라고 자처하는 실정이었다. 아무리 건군 초기라지만 이런 기체로는 도저히 공군이라고 할 수도 없었고 유사시 제대로 된 항공작전도 불가능했다. 때문에 미군에 전투기 지원을 요청했으나 한국이 북침할까 걱정한 미국은 한국에 대한 항공기 지원은커녕 돈주고 사겠다는 것마저 불허했다.

이에 한국은 공군 장병들과 국민들의 성금까지 긁어모아, 캐나다에서 퇴역해 민간에 넘어간 T-6 10기를 구매했다. 이때 도입한 T-6은 기존 T-6을 기반으로 최소한의 대지공격능력을 부여한 AT-6이다.

1950년 5월 14일, 캐나다에서 들여온 전투기 명명식을 통해 각 기체에 교통, 전남, 전북, 전매, 충남, 체신, 국민, 농민, 남전, 경북이라는 명칭을 부여하며 드디어 제대로 된 공군의 기틀을 갖췄음을 선언하고 김포기지를 메인 베이스로 삼았다. 그리고 40일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개전 직후, 공군은 모든 기체를 총투입해 북한의 침략에 맞섰으나 워낙 숫자가 부족해 김포 비행장이 공습당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그 와중에도 한국 공군 AT-6들은 서울 사수를 위해 의정부, 파주 축선에서 남하하는 적 지상군을 향해 공습을 가했으나 워낙 폭장량이 적은 데다 제대로 된 표적관측조차 되지 않아 제대로 된 타격은 주지 못했다.

결국 한국 공군의 AT-6 운용은 6월 27일부로 끝났다. 그동안 격추된 기록은 없었으나, 대신 미국이 AT-6 파일럿들에게 F-51 머스탱 줄테니 모두 일본으로 보내라고 지시했기 때문.진작 줄 것이지 그래도 전쟁 도중 공군 규모가 확대되자 신참 파일럿들이 운용하면서 다시 일선에 복귀했다가 1960년대 전량 퇴역했다. 이후 공군이 주력 전투기로 F-86 세이버 제트 전투기를 도입하자, 훈련 임무는 머스탱이 전담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