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화

조동화
조동화.jpg
인물 정보
출생 1981년 03월 22일 (43세)
대한민국 공주시
프로선수 경력
종목 야구
포지션 외야수
소속팀 SK 와이번스 (2000 ~ 2018)
SK 와이번스 등번호 1번
박재상 (2007 ~ 2012) 조동화 (2013 ~ 2018) 김택형 (2018 ~ 2020)

소개[편집 | 원본 편집]

SK 와이번스에서 활약했던 외야수였다.

장점은 빠른 발과 번트를 잘 댄다는점이다. 이래서 생긴 별명이 번티스트. 타격은 그리 좋지는 않은데 실제로 세자릿수 안타도 2014년에 달성할 정도로 타격이 답답하다. 다만 중요한 순간에 득점, 타점을 할 때가 많다. 수비는 좋은 편이다. 간간히 호수비를 보여주는 편이다.

신고선수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초등학교 때 육상부였는데 기본 타격은 좋지만 중장거리 타자가 아니라서 지명이 되지 못했다.

대학교에서 스카우트가 들어왔지만 등록금을 낼 형편이 되지 않아서 쌍방울 레이더스에서 1000만원을 받고 신고선수로 입단하게 된다. 사실상 2000년쯤에 신고선수 입단으로 SK 창단 멤버로 활약했다. 그러나 주로 대주자로 몇 번 나온 게 끝이고 2002년 시즌이 끝나고 상무에 지원하게 된다.

2005년 ~ 2008년 시즌[편집 | 원본 편집]

상무에 제대 후 조원우, 조경환을 제치고 주전 외야수로 활약했다.

1번 타자보다는 주로 2번 타자로 출장이 돼서 110경기에 출장한 영광을 누려봤다.

2006년은 박재홍 - 이진영이 중견수와 우익수를 주전으로 보면서 주로 플래툰으로 김강민,박재상과 좌익수 자리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게 된다. 조범현 감독이 물러나고 김성근 감독이 부임한 이후부터 외야수가 구멍이 나면 메꾸는 활약을 했다. 나름대로 가을야구에서 성적이 좋은데 홈런이 없던 조동화가 무려 한국시리즈 때 홈런을 쳤던 것이다.[1]

이 활약으로 2008년 시즌은 주로 김강민과 더불어 중견수를 뛰면서 좋은 활약을 보였다. 이때 한국시리즈에서 호수비는 덤이다.

2009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심각한 타격부진으로 2군과 1군을 왔다갔다 하는 선수로 전락해버렸다.

1군을 올라온 이후부터는 주로 박재홍의 대수비로 들어왔지만 그 좋았던 수비도 갑자기 하락해버리면서 까임의 지분을 얻었다.

2010년[편집 | 원본 편집]

주로 좌익수로 뛰면서 평범한 성적을 남겼다.

원래 중견수를 봤지만 김강민이 성적이 대폭발해 좌익수였던 박재상하고 번갈아가면서 출장했다.

여담이지만 이 시즌에 홈런을 3개 쳤는데 커리어중에 최다 홈런이다.[2]

2010년 한국시리즈에서는 2타수 1안타를 기록했다. 출루율은 .667을 기록했다. 어김없이 가을동화를 보여주고 있다.

2011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김강민의 부상으로 중견수로 뛰었고 후반기에는 박재상의 부상으로 주로 외야수로 나오지만 답답한 타격으로 까임을 얻었다.

그나마 되던 수비까지도 실책성 플레이가 증가하지만 도루는 어김없이 10도루를 기록했다.

9월 20일 롯데전에서 수비를 하다 인대가 파열되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후 시즌 아웃이 되고 말았다.

2012년[편집 | 원본 편집]

그렇게 재활과 2군 경기를 출장해서 9월달에 1군 엔트리에 복귀했다.

복귀 후 주로 대타로 이용돼서 작전 수행과 득점권에서 안타로 대타감으로는 없어서는 안 될 활약을 했다. 9월 8일 넥센전에서 무려 3타점을 올리는 기엄을 토해 MVP를 수상받았다. 한국시리즈 때는 12타수 1안타 출루율이 .154를 기록해 가을에 성적에 보답하지 못하고 최악의 부진을 느끼고 말았다.

2013년[편집 | 원본 편집]

초반에는 김강민과 박재상 새로운 입단생인 한동민,김상현,이명기와 외야진이 탄탄해져서 주로 백업을 맡을 예상이었으나 1군에 복귀했다.

이명기, 한동민, 박재상, 김상현의 타격 부진으로 사실상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번트 실력은 여전하고 타점도 많이 생산해 나름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체력문제로 인해 9월 이후부터는 부진하고 말았다.

2014년[편집 | 원본 편집]

커리어 하이

1번 타자 이명기에 이어서 주로 우익수로 2번 타자로 출장해 개인 첫 세자릿수 안타와 첫 30도루를 기록하면서 나름 좋은 활약을 이어가고 있었다.

개인 최초로 타점과 득점도 그 전시즌에 비해 엄청나게 올라가서 사실상 커리어하이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타율과 출루율은 오히려 떨어져 아쉬운 상황. 시즌 후 FA를 선언해서 4년 22억에 재계약을 했다.

올 외야 포지션 가능, 작전 수행 등을 고려해서 나름 주어진 돈이라 생각해서 준거라도 생각한다.

2015년[편집 | 원본 편집]

원래 주장이었던 박진만을 대신해 새로운 주장 완장을 찼다. 타격 능력도 전 시즌에 비해 절정의 타격을 보여주었다. 그 이후 좋은 타격감과 좋은 수비로 활약했지만 급성복통으로 2군에 잠시 내려온 뒤 1군에 복귀했지만 부진한 모습을 보여주고 말았다.

2016년[편집 | 원본 편집]

커리어 로우

그나마 되던 수비와 도루까지 안되면서 팬들은 까이기만 했다. 원래 주장이었던 김강민이 부상으로 2군에 내려가 있는 사이 주장을 찼지만 그 역시 2군에 가면서 주장이 전원 2군에 갔다.

2군에서는 4할을 쳐서 7월에 이명기와 교대해 1군에 복귀하고 주로 대타로 출장했지만 좋지 않은 활약을 보였다.

2017년[편집 | 원본 편집]

노수광, 한동민 등 젊은 외야수들이 한층 성장해서 조동화의 자리는 없어졌다. 실제로 시즌이 끝나고 1군에 올라온적이 없고 동행하고 있다고 한다. 연봉 보전을 위해서 1군과 동행한다고 했도 SK 구단에서는 은퇴를 권유했지만 자신이 거절했다 한다.


  1. 참고로 이 한국시리즈 전까지 통산 홈런은 딱 1개밖에 없었다. 그런데 한국시리즈에서 홈런을 쳤던 것이다.
  2. 2014년에 기록한 홈런 2개 빼고놓고서는 조동화 커리어중에서 가장 많이 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