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장진

노장진
노장진.jpg
인물 정보
출생 1974년 08월 10일 (49세)
공주시
국적 대한민국
프로선수 경력
종목 야구
포지션 투수
소속팀 한화 이글스 (1993~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4)
롯데 자이언츠 (2004~2006)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원조 파이어볼러

한화 이글스,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였다.

평균 140km/h의 직구를 가지고 있으며 빠를때는 150km/h까지 나온다. 회전수도 엄청나서 공이 살짝 위로 뜨기로 하게 보인다.

그 외 변화구였던 슬라이더와 커브볼도 대단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공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청룡기에서 대활약을 해[1]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원광대학교에 진학해서 생활하는 도중에 합숙훈련을 하다가 뛰쳐나와 한화 이글스에 4,000만 원의 계약금으로 계약을 했다.

그 해 빙그레 이글스[2] 100이닝을 소화해 3승 10패 3세이브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프로의 활약은 미미했다. 시즌이 끝나고 군대에서 조교로 활약하고 나서 제대를 했다.

한화 이글스에서 맞이하는 첫 시즌에는 133⅓을 소화해 6승 10패를 기록했고 그 다음해에는 149⅓를 소화해 7승 10패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실력이 떨어짐과 놀기 좋아하는 성격[3]으로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최익성과 삼성 라이온즈으로 트레이드 당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트레이드 후 첫시즌인 1999년에는 188⅓를 소화해 15승 9패를 기록했다. 비록 평균자책점이 높긴했지만 희대의 타고투저 시대에 따지면 매우 낮은 방어율이었다.

2000년도 주로 선발로 활약해 138⅓를 소화해 11승 8패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 10승을 따냈다.

2001년에는 85⅔를 소화해 7승 2패를 기록해 부진을 거듭했다. 이때는 임창용이 선발로 전환할때여서 마침 마무리 자리가 공백이 생기자[4] 마무리로 전환했다.

마무리로 전환한 2002년은 127⅓을 소화해 11승 3패 23세이브를 기록해 삼성의 뒷문을 지켰다.

이때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국가대표와 생애 첫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2003년은 다소 부진을 해 83이닝을 소화해 9승 10패 21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물론 기록만 보면 나쁘지 않았지만 구원투수로 10패를 찍었다.

시즌이 끝나고 김대익+박석진 = 김승관+노장진의 2대2 트레이드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트레이드 초에는 롯데의 주전마무리로써 15세이브,18세이브를 기록하면서 희망이 없던 롯데 투수진의 한줄기의 희망이 됐다.

그러나 시즌 도중 부인이 사망하는 사건[5]이 발생하면서 후반기에는 조금 부진을 거듭했다.[6]

2006년 시즌이 시작하기 하루 앞두고 윤학길 투수코치에 문자를 남기고 팀을 이탈했다.

시즌에는 부진을 거듭했지만 불펜으로는 나쁘지 않은 활약에서 FA를 신청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서 은퇴를 했다.

지도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은퇴 후에는 세한대학교의 투수 코치를 맡다가 감독인 장정순이 청주고등학교로 옮기자 부산에 남겨저 야구교실을 운영하다가 삼성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실력은 매우 뛰어났지만 인성 문제로 주로 지적을 받는다. 프로 입단 첫해에도 놀기 좋아해서 무단이탈을 자주해서 임의탈퇴를 당했다.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줬지만 사생활 문제로 은퇴당한 아까운 선수이다.
  • LG의 감독인 류중일 감독은 평소에도 성격이 매우 착해 아무리 잘못할 짓을 해도 너그럽게 봐주는데 그 성격을 못참고 화를 낸 선수는 딱 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자신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김진웅 선수와 양용모 선수였다.

각주

  1. 노히트노런 기록
  2. 한화 이글스로 팀명이 바뀌기 전이다.
  3. 이 때문에 1994년에 임의탈퇴를 당해 군대를 다녀왔다.
  4. 원래 마무리는 리베라였지만 중도 퇴출을 당하고 후반기에는 김진웅이 마무리를 맡았다. 이때문에 임창용이 선발 전환을 했다.
  5. 부부싸움 도중 발생
  6. 평균자책점이 2점대로 나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