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

Jks84562 (토론 | 기여)님의 2018년 5월 1일 (화) 07:11 판

개요

일본인은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단어이다. 즉, 일본에 거주하지 않아도 다른 나라에서 영주권을 소지한 채로 유지한다면 일본인이라 할 수 있다. 반대로 일본계 외국인은 국적법상 해당 국적의 사람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도 외관이나 혈통을 연관지어서 어느정도 따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 경우에도 입맛에 따라서 일본인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한 눈에 보아도 일본인으로 보이지 않는 경우엔, 일본 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일본인으로 간주하지 않는 경향 또한 있다.

일본 민족

일본인은 의외로 단일민족이 아니라는 것이 일본 내부에서도 사실상 공인화 되어가는 실정이다. 덴노의 혈통을 확립시키기 위해 순수 민족으로서 야마토인(大和人)이라는 어휘를 아주 옛적부터 만들었으나, 일본 열도에서 인류가 발현한 것이 아닌 여러 경로로 넘어온 외래인이 섞이다보니 점점 구분선이 희미해져 확립되었다는 것이 그 설이다.

북부아시아 알타이 지역에서 한반도를 통해 넘어온 알타이인과 중국땅에서 넘어온 황하인이 밑바탕[1]이라 보고, 필리핀~타이완 및 오세아니아 지역에서 올라온 남방민족과 사할린 방면을 통해 넘어온 북방민족이 세월을 거쳐감에 따라 뒤섞이면서 지금의 야마토인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일본인의 성향

배경

일본인에 대해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토(종교), 지리, 그리고 어느정도의 일본/역사에 대해 알아둘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간략하게 3가지만 짚어본다.

첫째로 일본의 역사는 관점에 따라 역사가 매우 길다고도, 매우 짧다고도 할 수 있다. 매우 길다고 해석하는 쪽은 일본의 역사가 덴노의 치하에서 이루어진 역사와 동일하다고 간주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만일 신화 시대의 덴노 혈통까지 모두 인정한다고 하면 진무 덴노의 옹립일인 기원전 660년 2월 11일을 시작으로, 2700년이 다 되도록 단 한 번도 사실은 딱 한 번 전복된 나라가 엎어지지 않고 이어졌다는 해석이 된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국의 역사가 단군에 의해 기원전 2333년에 세워졌다라는 이야기와 동일한 수준의 이야기인지라...

반대로 매우 짧다고 하는 경우는 160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의해 처음으로 동-서 일본이 통합된 시기를 처음으로 삼는다.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인 나라~헤이안 시대 또한 통일 일본의 역사로 볼 수가 있겠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세워진 1185년부로 덴노에 의한 중앙집권이 유명무실되고 봉건시대가 시작되었으니 사실상 깨어져서 간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쿠니(国)'가 지금의 일본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아니라는 것인가, 한다면 또 긍정할 수 없으니 그것 또한 '일본'으로 볼 수 밖에 없기도 하다. 비유하자면 이탈리아 반도에 있었던 제노바 공국과 베네치아 공국은 서로 다른 나라였지만, 지금은 이탈리아라는 이름으로 묶여있는 것이고, 그러니 이탈리아의 역사가 고작 200년도 안 되었다고 할 수도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둘째로, 일본은 섬나라이면서 유럽 대륙과는 달리 인접국가가 별로 많지 않았다는 점이다. 비슷한 지리형태를 가진 영국은 의외로 과 맞부딪히면서 커왔지만, 일본은 스스로 걸었던 쇄국을 풀 때까지 사실상 중국과 한국만을 주시하며 살아왔다는 것이다. 강력한 해양국가로서의 특징으로 동남아시아까지 진출[2]한 적이 있었으나 코앞에 있는 중국의 문화파워가 원체 강려크[3]했던지라, 일본 또한 조선처럼 중국의 것을 선진문물로 생각하고 중국과의 교류를 유난히 중시했다. 다만 당시 조선(혹은 고려)과 다른 조건으로, 국경이 직접적으로 접해있는 것이 아니기에 대륙 조정의 간섭이 매우 덜하였고, 전파 경로상 조선(및 백제)를 통해 바뀌어 들여온 것도 상당수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6세기 중후반에 나가사키를 통한 유럽인과의 교역이 나름대로 활발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400여년에 가까운 내란기를 겨우 넘긴 에도 시대 때는 외부 개입으로 또다시 내란이 일어날 것을 매우 두려워한 나머지 일본 내부로 매우 중한 쇄국정책을 폈기에 신문물의 유입을 원형 그대로 들여오지 못하고 자체적 검열과정을 통해 도입하지 않을 수가 없었는데, 그게 결국엔 일본인의 성향 및 문화를 받아들이는 특징 중 하나가 되었다.

셋째로, 일본 본토(혼슈, 시코쿠, 큐슈 3섬)는 의외로 척박하다. 한국도 산악지대의 비율이 높은 편이지만 상대적으로 동쪽과 북쪽에 쏠려있는 반면, 일본은 그것보다도 비중이 약간 더 높으면서 중앙 부분을 턱하니 차지하고 있다. 심지어 그나마 쓸만한 해안가 주변 평야는 각종 태풍, 지진, 쓰나미로 저주받은 날씨가 이어지기 일쑤였고, 내륙지방이라도 다수 분포하는 화산이 때가 되었다 싶으면 뻥 터져주면서 엎어버리곤 하였다. 특정 지역을 제외하고는[4] 비가 자주 내리기는 하나 온대 지방인데다 불균형해서 동남아와 같은 이모작은 꿈도 못 꾸고, 지층 자체가 상대적으로 단단하고 젊은 화산암이 대부분이기에 토질 또한 단단한데도 날씨가 그런지라 숲은 더럽게 넓다. 즉, 도로를 깔거나 개간하는 일 자체가 난관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기술력까지 모자라는 토착민이 눈을 돌린 곳은 인접한 넓은 바다의 생선들이었지만, 어로활동 자체가 매우 거친 일인데다가 안정적이지도 않았기에 살기 위해서라도 약탈을 서슴치 않을 수가 없었다. 넉넉하진 않았지만 일찍이 도로를 닦아둔 한국이나 드넓은 땅을 가진 중국과는 처한 환경이 상당히 달랐다. 적어도 토호쿠 지방을 온전히 개척하기 전까진.

뚜렷한 지방색, 다양한 지역문화

일본은 매우 길쭉한 나라이다. 막바지에 편입한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는 빼고, 북방의 토호쿠 지방과 남방의 큐슈 지방조차 서로 완전히 다른 기후를 가지고 있는데, 오죽하면 학교의 학사일정에도 그 차이[5]가 적나라하게 반영될 정도이다.

앞서 언급했지만 일본은 지리적으로 육로 교통 개발이 매우 어려웠기 때문에 오랜기간 씨족(氏族)에 기반한 봉건제에 가까운 정치형태(율령국)가 유지될 수 있었다. 덴노의 인가를 받은 특정 가문의 영주가 다스리는 토지의 단위를 "쿠니(国)"라고 불렀는데, 이 한자의 의미에서 알 수 있듯이 가마쿠라 시대부터 메이지 시대 전까지는 사실상 하나의 나라와도 다름없는 수준이었다. 영주의 승인이 없으면 쿠니 간 이동은 엄금에 가까웠고, 같은 히노모토(일본)의 언어를 쓴다고 해도 같은 쿠니가 아니면 지금의 외국인에 가까운 취급을 하던 시대였다. 몰론 외부인과의 교류가 상당히 잦았던 셋츠(摂津)와 같은 지역은 다소 그런 색이 옅었지만, 토사(土佐)처럼 거의 메이지 유신 직전까지 폐쇄적인 성향을 유지하던 쿠니 또한 존재하였다.

이런 이유가 얽혀서, 외부 세계를 거의 모르는 토착민들에 의해 신토교(덴노)에 기반하면서도 매우 향토(郷土) 지향적인 문화가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그런 영향이 남아 동아시아권에선 이례적으로 일찍이 지방자치제도[6]를 도입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와(和)로 하여금 귀히 여기라 (以和為貴)

일본인을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것은 와(和) 문화이다. 문단 제목인 '以和為貴'는 일본어로 '和を以て貴しと為す'라고 읽으며, 쇼토쿠 태자가 정립한 법률인 '17조(十七条)'의 첫 문장에서 앞쪽 4글자이다. 아주 직설적으로 풀이하면 '싸우지 말고 친하게(화합으로) 지내라'정도의 의미이다.

그렇지만 시대상황에 비춰 속뜻을 보자면, 이건 절대적으로 자원이 모자란 환경에 처하더라도 같은 야마토(大和)의 민족이라면 싸우지 말 것을 지시한 것이다. 나와 너가 각자 조금씩 불편함을 떠안더라도 서로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하여 같은 길을 나아가는 것(화합(和合))이 야마토인의 기본 자세라는 것을 가리킨다. 후술하는 메이와쿠와도 연결되는 이야기인데, 이런 오랜 도덕적 성향이 신토교에 섞인채 내려와서, 서로가 같은 '일본인'인 이상은 망하면 같이 망하고 흥하면 같이 흥한다는 흡사 운명공동체적 성향을 가지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나'와 '너'가 '같은 일본인'이라면 약간의 취향 차이 정도는 있어도 거의 대부분의 일생(一生)의 과정이 일본인스럽게 이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정 나이대에 맞지 않은 행동을 싸잡아 '일탈'로 치부하는 것도 이런 성향에서 비롯한다.

당연하지만, 교육환경에서도 이런 성향이 크게 나타난다. 비록 지방마다 자체적인 문화는 크게 달랐지만 그 근본에는 만나본 적이 있든 없든 '신토(덴노)'에 있다는 것은 항상 잊으려 하지 않았고, 메이지 이후의 신식 교육을 조성할 때도 전 국민이 덴노 치하의 신민(臣民)임을 잊지 않을 것을 이념으로 하였으며, 인간 선언으로 덴노의 의미가 퇴색된 쇼와 시대에도 전 국민이 동일한 교육을 주입시켜 표준 일본인으로 키워내는 방침(詰め込み教育)에는 변함이 없었다. 비록 헤이세이 시대 중반에 들어서 주입식 교육에 한계가 있으니 창의력을 키워내자는 유토리 교육(ゆとり教育)을 실시한 바가 있었으나, 교육 성과가 떨어졌다[7]는 위기감에 의한 한계[8]에 부딪혀 결국 실패로 끝내고 다시 회귀한 상태이다.

거의 1990년대 초중반까지 유지되었던 사회관행 중에는 한 직종에 평생을 바치는 '잇쇼켄메이(一生懸命)'와 함께 나이에 맞춰서 직급을 높여가는 '연공서열(年功序列)'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이 또한 위와 같은 인식에서 비롯한 관행이었다. 학교를 졸업한 20대에 신입으로서 사회인이 되고, 30대에 사회의 주역이 되며, 40대에 처음으로 관리직을 맡고, 50대에는 그동안의 노하우를 토대로 중책을 겸하다가 60대에 슬슬 퇴직을 한다, 라는 것은 당시 일본인들의 머릿속에 당연히 그려지게 되는 인생게임 스토리였다.

비록 버블경제의 후폭풍으로 강제적 경쟁사회에 진입하면서 잇쇼켄메이와 연공서열은 사실상 구시대 이야기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기업 선호도에 맞춰 대학생들의 졸업 전 취업활동(就活)[9]이 여전히 이뤄지고 있는 점, 튀는 스트리트 패션으로 유명하면서도 사무지구에서 남녀불문하고 똑같은 모습의 넥타이 부대를 흔하게 발견할 수 있는 점, 그 외에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꼭 나타나는 기묘한 부분에 유독 고집이 있는 규칙(規則)과 암묵의 룰[10], 등등과 같은 이러한 사소한(?) 것들에서도 '와'를 발견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나'의 삐져나오는 욕망을 집어넣어 상대방에게 '배려'하고, 상대방과 함께하려는 모습을 보임으로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내가 '너'와 같은 종류의 인간이라는 신뢰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 '와' 문화의 핵심이다.

거스름이 없음을 첫째로 하라 (無忤爲宗)

세계화 사회 출신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점점 희석되어가는 부분이지만, 아직까지의 일본인은 관례를 깨는 것을 본능에 가까울 수준으로 두려워 한다. 특히 쇼와 중후기의 높으신 분들에게 관료주의가 필수요소로 자리잡은 것 또한 이런 성향에서 비롯한다고 볼 수 있다. 때때론 지금도 별로 달라보이는게 없긴 하지만.

메이와쿠와 질서

일본인과 상대할 일이 있거나 일본 사회에 생활할 일이 생기면 반드시 메이와쿠에 대해서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실, 일본산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 등에서도 정말 심심찮게 튀어나오는 단어가 바로 '메이와쿠'인데, 상세한 내용은 항목을 참고하고 여기서는 간단히 언급한다.

한국어로는 흔히 '민폐'라고 번역하지만, 실질적 메이와쿠의 범주는 한국어에서 말하는 민폐보다 범위가 넓다. 다른 사람에게 물질적 및 정신적 손해를 입히는 행위는 당연히 포함되는 것이고, 그 손해를 주는 듯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까지도 메이와쿠의 범주에 들어간다. 알기 쉽게 비유하면, 나체로 다니는 사람을 보게 됨으로서 내가 불쾌해졌다면, 그것은 내가 안구테러를 당해서 메이와쿠를 당한 것이다, 라는 논리이다.

문제는 거기서 말하는 '보여주는 것'의 경계가 매우 모호한 것을 넘어, 때로는 이기적이거나 독단적이기까지도 하는 점이다. 심지어 메이와쿠 적용의 적합성 여부는 그야말로 삼인성호의 룰이 적용되기 때문에, 아무리 객관적 시선에서 바라볼 때 무조건 부조리한 일일지라도 그게 '메이와쿠'라고 합헌결정(?)이 나면 바로 도리(道理)가 되어버리고 만다.

실제로 일본 사회의 최대 문제점 중 하나인 이지메 문제에서 가장 걸림돌로 작용하는 관습이 바로 메이와쿠인데, 그 원리는 간단하다. 어떤 무리 중에서 괴롭히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특히 발이 넓은 사람을 몇 명 모아다가 합심해서 그 상대의 트집거리 하나만 잡아내 메이와쿠로 몰아붙이면 곧바로 정당한 이지메(?)가 성립된다. 그 트집거리 또한 앞서 언급한 '와(和)'에 기반해, 목표대상의 유별난 점을 어떻게든 찾아내면 해결된다. 예를 들어서 유난히 돈이 많아서 거드름을 핀다[11]던가, 아니면 유난히 머리가 좋기에 얍삽하다던가, 아니면 오타쿠라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해서 띨한 짓만 한다던가.

이런 수준까지 심각한 것 말고도, 단순한 일상에서도 메이와쿠는 넓게 분포해있다. 만일 생판 남남인 상대방의 눈을 어쩌다 지긋이 바라보면 상대방으로선 나의 시선에 의한 메이와쿠를 당한 것이 되고, 같은 소속에 있더라도 친분이 딱히 없는 상대방에게 이유없이 말을 거는 것 또한 상대방 입장에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을지도 모르는데 말을 걸리게 된 것이니 메이와쿠를 당한 것이다. 한 층 더 올려서, 상대방이 나를 호칭해야만 할 일이 있음에도 내가 미리 상대방에게 호칭 방식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다면 상대방에게 호칭에 대해 걱정거리를 만든 메이와쿠를 한 꼴이 되는 경우도 존재한다.

오모테나시와 상업 문화

연계 보증 사회 (보증인 제도)

장인(匠)과 오타쿠(オタク)

이이토코토리 (いいとことり) 문화

현재진행형인 탈아입구 (脱亜入欧)

유서깊은 제노포비아

같이보기

각주

  1. 이를 묶어서 도래인(渡来人)이라고도 한다.
  2. 일본 제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에도 시대 이전의 이야기이다.
  3. 전성기 당시 중국 문화의 영향력은 조선반도, 대만섬, 인도차이나까지 섭렵했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주변부가 죄다 중국 영향권이나 다름없었던 것.
  4. 대표적으로, 세토우치의 동쪽 지방은 도리어 비가 잘 내리지 않는다.
  5. 방학 시기, 동-하복 교체기간(衣替え) 등
  6. 실질적인 한국의 지방자치제는 1995년에 시행되는데, 이에 맞먹는 정도의 권한을 일본에선 1950~60년대에 부여했다.
  7. 지금도 유토리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일명, 유토리 세대)는 어딘가가 바보일 것이라는 인상이 남아있다.
  8. 실제로 전체 성적수준이 떨어진 것은 맞지만, 그 성적의 기준 자체가 적절한 것인가에 대해서도 논란도 많아서 단순히 질적 하락을 단정할 수는 없다.
  9. 한국과는 달리 20대 후반은 커녕, 졸업 후 1년만 더 지나도 신입으로서 취업활동이 매우 어려워진다. 기업들이 나이 먹은(?!) 인재를 다루기 어렵다는 이유로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완화되고 있으나, 그건 구직자의 절대적 숫자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불가피한 이유로 발생한 것일 뿐이다.
  10. 사칙(社則)과 교칙(校則) 등을 아우르며, 심하면 친목모임이나 동호회에서 지켜야 하는 (법령에 가까운) 규칙 같은 것도 존재한다. 흔한 예를 하나 들어서, 한국과 비교했을 때 복장에 관한 규칙이 상대적으로 빡빡한 편이다.
  11.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늬앙스만 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