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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최초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며,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조선|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최초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며,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도읍을 [[서울|한양]]으로 정하고 한양에 [[한양도성|성곽]]과 [[종묘]], 궁궐 등을 짓게 했는데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8년 10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에서 끝의 景福에서 따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이성계|태조]]가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ref>,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br/>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ref>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
도읍을 [[서울|한양]]으로 정하고 한양에 [[한양도성|성곽]]과 [[종묘]], 궁궐 등을 짓게 했는데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8년 10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에서 끝의 景福에서 따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이성계|태조]]가 궁궐의 이름을 지어달라<ref>,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br/>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ref>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지으며 사실상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나, 세종 때 법궁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렇게 200여년동안 중요한 궁궐로 여겨졌지만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종묘 등을 표함하여 경복궁을 싸그리 다 태워버려서 터만 유지해놓게 된다. 고종 때가 되서야 [[흥선대원군]]이 불탄 경복궁을 재건했다. 이때 지어진 경복궁은 원래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한다.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지으며 사실상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나, 세종 때 법궁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렇게 200여년동안 중요한 궁궐로 여겨졌지만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종묘 등을 표함하여 경복궁을 싸그리 다 태워버려서 터만 유지해놓게 된다. 고종 때가 되서야 [[흥선대원군]]이 불탄 경복궁을 재건했다. 이때 지어진 경복궁은 원래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한다.
==역사==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임진왜란|왜쌍놈들의 침략]]으로 인해 한양이 왜놈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덕수궁|경운궁]]<ref>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ref>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s>경복궁은 짓지않고</s>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동안 지어지지 않다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s>사실상 흥선대원군</s>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주석==

2015년 6월 20일 (토) 17:49 판

Gyeongbokgung Palace Night.jpg

개요

景福宮 / Gyeongbokgung

조선시대에 지어진 다섯 개의 궁궐 중 최초로 지어진 조선 왕조의 법궁이며, 사적 제117호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경복궁.

도읍을 한양으로 정하고 한양에 성곽종묘, 궁궐 등을 짓게 했는데 경복궁은 1395년에 완공되었다. 경복궁(景福宮)의 이름은 정도전이 지었는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8년 10월 7일의 기록에 따르면, 시경 주아편의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는 영원토록 그대의 크나큰 복을 모시리라)에서 끝의 景福에서 따운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이것은 태조가 궁궐의 이름을 지어달라[1]고 하자 즉석에서 지었다고 한다. 경복궁의 여러 전각들의 이름을 지은 것도 정도전.

하지만 태종이 왕자의 난을 겪은 경복궁 대신 창덕궁을 지으며 사실상 경복궁보다 창덕궁이 법궁의 역할을 하나, 세종 때 법궁의 지위를 되찾는다. 그렇게 200여년동안 중요한 궁궐로 여겨졌지만 임진왜란때 왜놈들이 종묘 등을 표함하여 경복궁을 싸그리 다 태워버려서 터만 유지해놓게 된다. 고종 때가 되서야 흥선대원군이 불탄 경복궁을 재건했다. 이때 지어진 경복궁은 원래 경복궁과 차이가 있었다 한다.

역사

임진왜란 전까지는 어느정도 중요한 궁궐이었는데, 1553년에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을 제외한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불타버렸다. 1554년 봄에 다시 지었는데, 50년도 지나지 않아서 왜쌍놈들의 침략으로 인해 한양이 왜놈들에게 함락돼서 불타 완전히 소실된다.

그후 월산대군의 집을 경운궁[2]으로 쓰다가 광해군 때 창덕궁, 창경궁을 다시 재건했다. 그리고 경복궁은 짓지않고 경희궁과 인경궁을 새로 짓는다. 그렇게 273년동안 지어지지 않다 1865년 4월 26일(고종 2년 음력 4월 2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사실상 흥선대원군가 다시 지으라 명령해서 중건되기 시작해 1868년 6월 말에 완성됐다.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의 전각들은 이때 지어진 것.

주석

  1. , ‘지금 도읍을 정하여 종묘에 제향을 올리고 새 궁궐의 낙성을 고하게 되매, 가상하게 여겨 군신(群臣)에게 여기에서 잔치를 베푸노니, 그대는 마땅히 궁전의 이름을 빨리 지어서 나라와 더불어 한없이 아름답게 하라
    今定都享廟, 而新宮告成, 嘉與群臣宴享于此。 汝宜早建宮殿之名, 與國匹休於無疆。
  2. 고종 때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