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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6일 (토) 08:23 기준 최신판
노장진 | |
---|---|
인물 정보 | |
출생 |
1974년 08월 10일 (49세) 공주시 |
국적 | 대한민국 |
프로선수 경력 | |
종목 | 야구 |
포지션 | 투수 |
소속팀 |
한화 이글스 (1993~1998) 삼성 라이온즈 (1999~2004) 롯데 자이언츠 (2004~2006) |
소개[편집 | 원본 편집]
원조 파이어볼러
한화 이글스,삼성 라이온즈,롯데 자이언츠에서 활약했던 선수였다.
평균 140km/h의 직구를 가지고 있으며 빠를때는 150km/h까지 나온다. 회전수도 엄청나서 공이 살짝 위로 뜨기로 하게 보인다.
그 외 변화구였던 슬라이더와 커브볼도 대단했다.
한화 이글스 시절[편집 | 원본 편집]
공주고등학교 출신으로 청룡기에서 대활약을 해[1]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원광대학교에 진학해서 생활하는 도중에 합숙훈련을 하다가 뛰쳐나와 한화 이글스에 4,000만 원의 계약금으로 계약을 했다.
그 해 빙그레 이글스[2] 100이닝을 소화해 3승 10패 3세이브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프로의 활약은 미미했다. 시즌이 끝나고 군대에서 조교로 활약하고 나서 제대를 했다.
한화 이글스에서 맞이하는 첫 시즌에는 133⅓을 소화해 6승 10패를 기록했고 그 다음해에는 149⅓를 소화해 7승 10패를 기록했다.
고등학교 시절에 비해 실력이 떨어짐과 놀기 좋아하는 성격[3]으로 1998년 시즌이 끝나고 최익성과 삼성 라이온즈으로 트레이드 당했다.
삼성 라이온즈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트레이드 후 첫시즌인 1999년에는 188⅓를 소화해 15승 9패를 기록했다. 비록 평균자책점이 높긴했지만 희대의 타고투저 시대에 따지면 매우 낮은 방어율이었다.
2000년도 주로 선발로 활약해 138⅓를 소화해 11승 8패를 기록하면서 2년 연속 10승을 따냈다.
2001년에는 85⅔를 소화해 7승 2패를 기록해 부진을 거듭했다. 이때는 임창용이 선발로 전환할때여서 마침 마무리 자리가 공백이 생기자[4] 마무리로 전환했다.
마무리로 전환한 2002년은 127⅓을 소화해 11승 3패 23세이브를 기록해 삼성의 뒷문을 지켰다.
이때의 전설적인 활약으로 국가대표와 생애 첫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2003년은 다소 부진을 해 83이닝을 소화해 9승 10패 21세이브를 기록하고 말았다. 물론 기록만 보면 나쁘지 않았지만 구원투수로 10패를 찍었다.
시즌이 끝나고 김대익+박석진 = 김승관+노장진의 2대2 트레이드로 롯데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다.
롯데 자이언츠 시절[편집 | 원본 편집]
트레이드 초에는 롯데의 주전마무리로써 15세이브,18세이브를 기록하면서 희망이 없던 롯데 투수진의 한줄기의 희망이 됐다.
그러나 시즌 도중 부인이 사망하는 사건[5]이 발생하면서 후반기에는 조금 부진을 거듭했다.[6]
2006년 시즌이 시작하기 하루 앞두고 윤학길 투수코치에 문자를 남기고 팀을 이탈했다.
시즌에는 부진을 거듭했지만 불펜으로는 나쁘지 않은 활약에서 FA를 신청했지만 아무도 받아주지 않아서 은퇴를 했다.
지도자 시절[편집 | 원본 편집]
은퇴 후에는 세한대학교의 투수 코치를 맡다가 감독인 장정순이 청주고등학교로 옮기자 부산에 남겨저 야구교실을 운영하다가 삼성중공업에서 일하고 있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실력은 매우 뛰어났지만 인성 문제로 주로 지적을 받는다. 프로 입단 첫해에도 놀기 좋아해서 무단이탈을 자주해서 임의탈퇴를 당했다. 전설적인 활약을 보여줬지만 사생활 문제로 은퇴당한 아까운 선수이다.
- LG의 감독인 류중일 감독은 평소에도 성격이 매우 착해 아무리 잘못할 짓을 해도 너그럽게 봐주는데 그 성격을 못참고 화를 낸 선수는 딱 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자신이었다. 나머지 두 사람은 김진웅 선수와 양용모 선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