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석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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玄錫七. 이명은 현낙원(玄樂園).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4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80년 1월 23일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하여 사서삼경을 익혔으나, 전도인이 전해준 성경을 읽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1905년부터는 대영성서공회의 지원을 받는 '매서인'이 되어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성경책을 팔며 전도했다. 1909년 해주읍교회 전도사를 맡았고, 1911년 동대문교회 전도사로 부임했다. 이후 감리교 협성신학교(현재 감리교 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여 최병헌, 전덕기, 정춘수 등과 함꼐 제1회로 졸업했다. 1912년 3월 10일의 연회에서 집사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 남산현교회로 피송받아 목회 활동을 벌였다. 1917년 8월부터는 공주읍교회(현재 공주제일교회)를 담임하였고, 조선예수교장감 연합협의회에 미감리회 대표로 참석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자, 3월 24일 공주 영명학교에서 이 학교 교사인 김관회(金寬會) 등과 만나 공주에서도 4월 1일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의했다. 4월 1일 오후 2시경, 영명학교 학생들이 주체가 되어 장터에서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행진을 하였다. 그는 이 운동의 주도자로 일경에 체포되었지만,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1] 한편, 그는 한성 임시정부를 조직하는 일에 관여하여 기독교측 대표로서 600원을 거사 자금으로 내놓았고, 이규갑 등과 함께 ‘임시정부선포문’, ‘임시정부령’을 비롯한 취지문•결의문•약법 등의 원고를 작성하고, 서소문동 이민홍(李敏洪)의 집에서 목판을 이용하여 6,000여 매를 인쇄하였다. 또한 그는 동월 19일경 통의동(通義洞) 김회수(金晦秀)의 방에서 안상덕(安商德)·김유인(金裕寅)·민강 등과 회합하였는데, 그는 기독교 대표로서 이 운동에 소요되는 자금 600원을 제공하기로 하였다. 그는 이튿날 비밀누설을 우려하여 약종상을 경영하여 금전 출납과 왕래자가 빈번한 천정(泉町)에 거주하는 민강에게 500원을 전달하여 지도부에 제공하게 함으로써 국민대회와 한성정부 수립을 적극 지원하였다.

1919년 9월에 열린 연회에서 평양 남산현교회로 파송되었으나, 1920년 3월 초 철원 애국단 사건에 연루되어 몇달간 감옥에서 미결수 신분으로 갇혀 있다가 풀려났다. 이후 영변읍교회, 강서교회를 거쳐 1921년 9월 수원지방 감리사로 파송되어 지역 내의 30여 교회를 순방하며 관리했고, 독립운동 희생자 유가족을 돌보는 일에도 힘썼다. 이후 영변 지방, 신창 지방 감리사로 활동하다가 1933년 5월 평양 유정교회로 파송되었고, 1935년 4월 자원 은퇴한 뒤 평양에서 여관을 경영했다. 얼마 후 만주로 건너가 하얼빈에서 동아일보 지국장을 역임하였고, 1938년에는 사평가교회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1941년 친일 어용교단인 주기독교회가 출범하는 것을 계기로 목회에서 은퇴했다. 이후 사평가를 떠나 용정으로 거처를 옮겨 동북교회를 후원하던 중 중풍으로 쓰러져 수개월 동안 투병하다가 1943년 9월 23일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4년 현석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만주 용정 교외 기독교 공원묘지에 안장되어 있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2005년 10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외부 링크[편집]

3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