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렬 (1876년)

韓相烈. 자는 문극(文極). 이명은 한상열(韓相悅)·한상태(韓相兌).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청주 한씨 제7교 대동족보>에 따르면, 한상렬은 병자년(丙子年), 즉 1876년 4월 2일 강원도 횡성현 우천면 하수남리(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아버지 한동수(韓東洙)와 어머니 연일 정씨 정관기(鄭觀基)의 딸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고 한다.

은퇴한 아전이었던 그는 1907년 8월경,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하고 정미7조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자 횡성에서 수순교 및 포군계장이었던 오정묵(吳正默) 등과 함께 포군 수백 명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횡성으로 진입한 민긍호 의병장의 부대와 연합한 뒤 약 200명의 부대원을 이끌고 독자적인 활동도 병행했다.

황성신문 1907년 8월 12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상렬을 비롯한 횡성 일대 의병들은 1907년 8월 7일 횡성군수 심흥택을 체포한 뒤 군량미, 짚신 등을 요구했다고 한다. 이후 황성신문 1907년 8월 16일자 기사에는 심흥택이 오래지 않아 풀려났다고 하니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으로 보인다. 한편, 8월 5일 원주진위대 가 봉기하였다는 보고를 받은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의병봉기가 각지로 확산되기 전에 재빨리 토벌하고자 8월 6일 서울 주둔 보병 제47연대 제3대대장 시모바야시(下林) 소좌를 지휘관으로 한 보병 2중대, 기관총 4문, 공병 1소대로 이루어진 1지대를 편성하였다. 시모바야시(下林) 지대는 7일 서울을 출발하여 이수두, 지평을 거쳐 10일 원주에 도착하였다.

원주에 주둔한 시모바야시 지대는 원주에서 의병을 찾을 수 없자 주변 지역에 대한 정찰을 시작했다. 사토(佐藤) 대위는 11중대 1소대를 이끌고 평창방면으로, 스에야스(末安) 중위는 1소대를 이끌고 제천방면으로 정찰을 나갔다. 8월 15일, 민긍호와 한상렬이 연합한 의병대 350명은 제천 방면으로 가던 스에야스 소대와 4시간 동안 교전했다. 스에야스 소대는 수적으로 열세하자 충주로 퇴각했다.

이후에도 토벌이 여의치 않자,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추가로 의병진압부대를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보병 제51연대 아다치(足達) 중좌에게 동 연대 제2대대(2중대는 빠짐) 보병 제52연대 제2중대, 기관총 4문, 기병 제17연대 제3중대의 1소대, 공병 1소대를 주어 지대를 편성해 파견했다. 아다치 지대는 18일 서울을 출발하여 철도로 조치원까지 이동한 다음 충주로 들어가 주둔하였는데, 충주수비대 및 시모바야시 지대를 지휘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강릉파견대까지도 지휘하였다. 여기에 한국주차군사령관은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보병 제51연대에서 사카이자와(境澤) 대위가 인솔하는 1소대를 춘천수비대에 증가하여 그 주력을 홍천(洪川) 부근으로 진출시켰다.

이 시기 한상렬은 민긍호와 함께 제천에서 충주성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의병은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제천·청풍 가도를, 주력은 제천·주포 가도를 잡아 이동하였다. 이때 아다치 지대가 충주에서 제천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의병대는 척후병들을 통해 아다치 지대의 선발대를 확인하고 그들을 피해 은밀히 충주로 이동했다. 8월 23일 충주에 도착한 의병대는 오전 11시 30분경 일제히 일본군 충주수비대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힌 후 횡성으로 후퇴했다.

9월 3일, 한상렬을 비롯한 500~600명의 연합 의병대는 홍천군에서 남쪽으로 10리 떨어진 허성(許城) 앞에 주둔했다. 홍천읍에 주둔한 일본군 20여 명이 의병대를 공격했지만, 의병대는 이를 물리쳤다. 이에 춘천에 주둔했던 일본군 40명이 합세하여 재차 기습을 가했고, 의병대는 이를 이기지 못하고 동남쪽으로 후퇴했다. 일본군은 성전촌 100여 호를 불사른 뒤 홍천읍으로 돌아갔다. 일본군에게 기습을 당한 의병들은 재정비한 다음 7일 새벽 부대를 둘로 나눠 한 부대는 홍천읍 북산을, 한 부대는 남산을 점거하여 4~5시간을 일본군과 교전하다가 횡성 방면으로 후퇴했다.

한편, 원주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시모바야시 지대장은 "원주 부근의 폭도들이 횡성군 갑천면 갑천리 부근 및 그 동방 약 2리에 있는 봉복사를 근거지로 하여 부근 마을에서 물자를 약탈하고 겨울을 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후 사토(佐藤) 대위에게 보병 2소대와 기관총 2문을 주면서 의병토벌을 명령했다. 이 부대는 22일 횡성에 도착한 후 23일 오후 1시 갑천리 및 봉복사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약 350명을 기습 공격하였다. 당시 봉복사에는 민긍호 의병장, 한상렬 의병장 등이 주둔하고 있었다. 일본군의 기습 공격으로 의병 50명이 전사하였고, 의병부대는 동방산지로 후퇴했고, 봉복사는 일본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한상렬은 이로 인해 근거지를 상실했지만, 이후에도 원주, 횡성, 홍천 등지를 이동하면서 유격전을 전개했다. 또한 이인영을 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에 호응해 서울진공작전을 수행하고자 했다. 황성신문 1907년 11월 10일자 기사에 따르면, 강원도의 연합 의병대는 횡성과 지평 사이에 있는 모고곡(毛古谷)에 주둔하고 그 근방 고지에 방어시설을 설치하여 초병을 배치해 엄중히 경계하며 의병을 모집하고 때로는 원주, 충주 일대를 공격하면서 서울로 진격하려 했다고 한다.

일본군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서울에서 토벌대를 파견했다. 이들은 11월 6일 원주를 출발해 지평 상동면으로 이동했다. 또한 서울에서 1개 중대가 추가로 파견되어 의병대를 협공하려 했다. 한편 원주수비대는 의병대가 공격을 받고 후퇴할 길을 차단하기 위해 원주군 지향곡면 안창으로 이동했다. 원주수비대는 곧 횡성군 고모곡면으로 이동하여 의병의 존재를 수색했고, 의병대는 이들과 교전한 뒤 원주군 호매곡면 및 부론면으로 후퇴했다.

한편 춘천에서도 춘천수비대 보병 1개 소대와 기병 6기로 편성된 토벌대가 서울에서 파견된 토벌대와 합세해 의병대를 협공하려 했다. 하지만 한상렬을 비롯한 의병대는 이를 감지하고 삼산리 방면으로 후퇴했다. 이후 의병대는 일본군 보병 제51연대 제3대대장 사카베(坂部) 소좌가 이끄는 사카베 지대의 공격을 받고 후퇴했다. 이후 한상렬은 때대로 독립적으로 활동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연합해 일본군에 대항했다.

그러던 12월 12일 한상렬이 한갑복, 윤성옥, 민긍호 등과 더물어 동평 부근에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이 밀정을 통해 일본군에게 전해졌다. 이에 일본군은 빠르게 이동하여 13일 정오 횡성을 출발하여 오후 5시 동평에 도착하였다. 이때 의병들은 동평을 떠나 각 부대별로 이동하였는데, 민긍호 의병장은 홍천 서석면으로, 나머지 부대는 유동과 당현으로 이동하였다. 토벌대는 당현에 있는 의병부대를 토벌하기 위해 이동하여 기습공격을 하였다. 그 결과 한갑복 의병장을 비롯한 130명의 의병들이 전사하는 등 참패를 입고 말았다.

그 후 한상렬은 일본군의 추적을 회피하면서 전군대장(前軍大將) 이창오(李昌五), 중군대장(中軍大將) 김화춘(金和春), 후군대장(後軍大將) 한상오(韓相五) 등 20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횡성 동북부에서 홍천일대에 걸쳐 의병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그 일대에서 의병 소모 활동을 적극적으로 실시하며 전력을 유지하려 애썼다. 1908년 2월 29일 민긍호가 일본군에게 체포된 직후 사살된 후, 한상렬은 강원도에서 가장 유력한 의병장이 되었다. 그는 3월 19일 일본군 토벌대와 홍천군 서석면 청양리에서 교전하여 물리쳤고, 재차 추격하는 일본군을 횡성군 속일리에서 이하영 등 약 30명의 의병과 협력하여 강경히 저항했다.

3월 22일 오전 홍천군 적면 부근에서 일본군 토벌대와 교전했고, 24일에는 동평 부근에서, 25일엔 마암 부근에서 교전했다. 4월 2일에는 홍천군 월운리 북동에서 횡성수비대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지만, 그는 계속 항전했다. 횡성수비대는 전투 후 한상렬의 부인을 사로잡았지만, 한상렬은 이에 굴하지 않고 4월 20일 금기철, 김현국(金顯國)과 협력해 횡성수비대를 공격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청일면 동평리로 후퇴했다.

한상렬은 이 시기 병력이 크게 줄어들어 20명 내외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항전했다. 일제가 기록한 <조선폭도토벌지에 따르면> 한상렬은 5월 23일 오전 3시경 14명의 부하를 이끌고 횡성군 갑천면 동평에 거주하는 윤명길(尹命吉)과 자신의 부하였던 황천포(黃千浦)를 체포한 뒤 "어찌하여 일본군에게 귀순했나"고 질책하고 두 사람을 포박해 윤명길의 머리에 총상을 입히고 황천포의 두부(頭部)를 난타하고 두발을 뽑게 한 뒤 두 사람이 휴대하고 있던 면죄문빙(免罪文憑)을 약탈했다고 한다. 또한 횡성 읍내에 피난 중이던 박봉구(朴奉九), 박래문(朴來文)의 공가(空家)를 파괴하고 청일면 병지방 방면으로 도주했다고 한다.

한상렬은 1908년 하반기에 만주로 망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만주로 망명한 뒤 공교회에 가입해 공교회 포교원으로 활동하다가 유인석, 이범윤 등이 조직한 성명회(聲明會)에서 활동했다. 성명회가 해체된 후에는 안종석, 민배식(閔培植), 이범윤의 부하인 이기림(李起林), 장흥경(張興敬), 김영택(金永澤) 등과 공모하여 1915년경 창의소(彰義所)를 조직해 중대장을 맡고 경흥 일대 일본군을 습격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안종석이 체포된 후 창의소가 와해되자, 그는 홍범도가 조직한 대한독립군에 가담해 보급품의 확보, 선전활동, 독립군 소모 활동에 투입되었다. 1919년 11월, 한상렬은 결사대 120~170명을 이끌고 국자가에서 7리 떨어진 연길현 구두(溝杜)에 도착한 뒤 국자가에서 조포(粗布) 18필을 구입하고 동복을 새로 만들고 옷은 조선식 두루마기로 만들어 보급했다. 또한 1920년에는 왕청현 나자구에서 홍범도 전이국 등이 조직한 도독부의 경호국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대한군정부에서 방화대(放火隊) 제2부장을 역임했으며, 1920년 6월 연해주로 찾아가 김영선과 함께 러시아 장교 티에츠크로부터 군총 300정, 탄약 수만 발, 폭탄 1천6백개를 순조롭게 구입했다. 그런데 김영선이 지불할 돈을 자신의 딸 결혼 비용에 써버린 뒤 잠적해버리고 말았고, 자신과 함께 무기 구입을 위해 온 진학신(秦學新)이 동지였던 이광록(李光錄)의 배신으로 일본헌병대에 체포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한상렬은 일본헌병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만주로 도피했다.

이후 한상렬은 김좌진이 설립한 성동무관학교(成東武官學校) 내 조직인 동우회(同友會)에서 선전계, 군자금모금계장을 맡은 일을 계기로 김좌진의 심복이 되었다. 그는 중동선(中東線) 대표로 북만주에서 의용군이 생길 때 참여하기도 했고 북만주 일대에서 김좌진이 조직한 대한독립군단에 참여했다. 그리고 1925년 3월 김좌진이 주도한 신민부가 창설될 때 역시 가담했다.

한상렬은 김좌진의 측근이 된 뒤 보급품 확보, 선전활동, 군자금 모집 등 중책을 맡아 활동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군자금을 주지 않으려는 자들에 대한 혹독한 응징이 이어지면서 한인들의 민심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김좌진은 1924년 3월 <부령 11호>를 발표해 군자금을 주지 않는 자를 중형에 처할 것이며, 본 군단의 징모대 또는 모연대를 적 또는 외국 관헌에 고발한 자를 극형에 처하고, 병역의 복무를 기피하는 자 역시 중형에 처하겠다고 선언했다.

당시 김좌진이 활동했던 북만주에 이주한 한인들은 매우 가난해 지주의 토지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며 하루하루를 근근히 버텨야 했다. 김좌진은 그런 그들에게 강제로 돈을 받아내고 협조하지 않을 시 테러를 가했다. 한상렬이 이러한 테러 행위를 자행했음을 적시한 구체적인 기록은 남아있지 않지만, 그는 김좌진의 측근으로서 군자금 모집을 맡았던 만큼 한인들과 심한 갈등을 빚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김좌진과 한상렬 입장에서는 일제에 맞서기 위해 군자금이 절실히 필요했기에 어쩔 수 없었지만, 당장 내일을 장담하기도 힘든 처지였던 한인들에겐 너무도 가혹한 처사였다.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민심의 동요를 틈타 좌익 활동을 전개해 민중을 김좌진으로부터 떨어뜨려서 공산주의를 받아들이도록 유도했다. 김좌진은 그런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했고, 한상렬 역시 여기에 가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리하여 만주의 독립운동 세력은 이념 문제로 분열되었고, 민족진영과 공산진영 간의 유혈 충돌이 자주 빛어졌다. 그러던 1926년 9월 19일, 한상렬은 주중청년총연맹(駐中靑年總聯盟)에 속한 공산당원이 쏜 총탄에 맞아 피살되었다. 향년 51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한상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