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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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月上. 창씨명은 츠키무라 히데시(月村英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2년 12월 10일 전라북도 전주군 전주읍 완산정에서 출생했다. 1929년 2월 전북 전주공립고등보통학교에 재학하던 중 동교생 오익선(吳益善) 등과 함께 사회제도의 개혁을 목적으로 독서회를 조직했다. 5월 22일에는 동지들과 함께 친일 학생들을 구타하고 전교생을 운동장에 집합시켜 일본인교사 축출, 일본인에 대한 저항, 민족단결을 위하여 총궐기할 것을 호소하는 연설을 하였다. 1930년 4월 하순, 최월상은 전교지도부(全校指導部)라는 독서회를 다시 조직하고 2학년 학생조직의 지도책임자가 되어 독서반 지도부(指導部)를 이끌었다. 이후 독서회가 해산되자 1931년 5월 20일경, 앞서와 같은 독서회를 조직하고 2학년 학생조직 지도책임자가 되었고, 다시 제3학년 대상의 사상 연구 독서회를 조직하고 활동하다가 퇴학당하였다.

1931년 7월 전주청년동맹에 가입하여 일제의 만주파견 반대,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가두청년(街頭靑年)뉴스>를 배포하였고, 그해 12월 군산에서 부두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4년 3월 31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개월(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 산입)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이후 정읍군 농회(農會) 기수(技手)로 일하던 그는 1944년 7월 13일 용무 때문에 정읍군 이평면사무소에 갔다가 오전 10시 이평면사무소 숙직실에서 이면편장과 잡담하던 중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지난번 북구주(기타큐슈)의 공습 때 적기가 조선의 하늘을 날면서도 조선 내에서는 폭탄을 투하하지 않는 것은 미국 대통령의 '조선은 폭격을 하지 않는다'는 선언한 것에 따른 것이라고 일반에 퍼져 있다. 또한 포로감시인의 말에 따르면 미국 군인인 포로가 감시인에게 '여러분, 조선인은 행복하다. 왜냐하면 이번의 전쟁은 반드시 미국이 승리하며 그때에는 조선을 독립시킬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일이 발각되면서 체포된 그는 1944년 8월 10일 전주지방법원 정읍지청에서 조선임시보안령 위반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2] 8.15 광복 후 고문 후유증에 시달리다 1948년 10월 18일에 사망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최월상의 장남 최명우 씨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다 1998년 IMF 사태로 실직한 뒤 부친의 항일운동 행적을 알아보기로 하고 탐문조사를 벌였다. 그는 국내에 발간된 ‘독립운동사’를 비롯 ‘전주시사’ ‘전고 북중 80년사’ 등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수집에 들어갔고 주위의 도움을 받아 5여년만에 상당한 성과물을 찾아냈다. 그 결과 2002년 2월 전주고등학교와 총동창회로부터 부친의 명예졸업장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해 8월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독립유공자 서훈 신청서는 거부당했다. ‘광복이후 수형 때문에’ 독립유공자 선정이 불가하다는 것이었다.

최명우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3년동안 대전 등을 오가면서 정부기록보존소에서 문제가 됐던 1946년 5월 경찰과의 충돌사건 진상이 담긴 판결문을 찾아냈다. 최월상이 우리가 정당한 정치운동을 하는데 과거 친일 경찰관이 우리 행사를 방해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으로 복역했다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이에 대한민국 정부는 2006년 최월상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최씨는 “어머니 생전에 선친의 항일운동을 평가받았어야 했는데 정부의 무관심 등으로 이렇게 늦어졌지만 불효를 거둘수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고 밝혔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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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