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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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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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첨성대
건축물 정보
주소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번지
소유 국유
문화재 정보
종목 유물 / 과학기술/ 천문지리기구/ 천문
지정일 1962년 12월 20일
야경

첨성대(瞻星臺)는 천체의 움직임을 관찰하던 신라의 천문관측대. 받침대인 기단부위에 술병 모양의 원통부를 올리고 맨 위에 우물정(井)자형의 정상부를 얹은 모습으로 높이는 약 9m이다. 건립시기는 신라 선덕여왕{632∼647) 때로 추측되며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진다.

의문점[편집 | 원본 편집]

해방 이전까지는 이 첨성대는 당연히 천문관측을 하는 시설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이에 대한 이설이 제기되어서 재단, 기념물, 불교관계 건축물 등에 대한 여러 가지 설들이 등장한 상황. 이러한 이설이 등장한 이유 중 하나는 첨성대의 위치가 천문 관측을 하기에는 영 좋지 않은 평지에 있다는 것이다. 대체로 관측 목적의 천문대는 조망이 좋은 산 위에 있는 것이 일반적인데 첨성대의 위치는 당시 도시(월성)에 가까운 평지라는 것. 또한 첨성대 위로 올라가기도 영 불편한 것도 이러한 주장에 한 몫을 하였다. 상시 천문관측을 하는 시설이라면 문이 맨 아랫쪽에 있고, 위로 올라가기도 쉬워야 하는데 첨성대의 문 위치는 한참 위쪽인데다가 문이라기 보다는 창문에 가까운 것으로 수시로 사람이 드나들만한 구조는 아니다.

다만, 고대의 천문 관측의 개념이 역법과 천문 이 두 가지로 나뉘는데, 첨성대의 경우는 천문 관측을 정밀하게 하여야 하는 역법의 기능보다는 하늘의 운행을 보고 길흉화복을 점치는 천문의 역할이 강하였다고 생각하면 이러한 의문점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삼국유사에서는 이 첨성대를 점성대로 언급하고 있기도 하며[1] 고대 사회로 갈수록 역법의 기능보다는 점성술에 가까운 천문의 기능이 더 중요하였기 때문에 특별한 경우에만 사람이 드나들면 되었고, 이러한 이유로 평지에 위치하면서 당시 왕궁이었던 월성과 가까웠던 점도 설명이 된다.

트리비아[편집 | 원본 편집]

  • 첨성대에 사용된 돌의 숫자가 365개라고 한다. 그러나 이는 기단석을 포함하지 않은 것으로, 기단석을 포함할 경우 이보다 더 많아지게 된다.
  • 2016년 경주 지진에서도 첨성대 자체는 무너지지 않고 무사하였다. 다만 상단의 우물정(井)자 모양의 돌이 비틀리고(5cm정도 이동) 첨성대 자체의 기울기도 눈에 띄게 기울어 보수공사가 필요한 상황이 되었다.
  • 2017년 8월에는 대학생 3명이 술에 취해 첨성대에 올라갔다가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사건이 있었다.[2]
  • 사실 과거 문화재에 대한 보호 인식 자체가 뒤떨어져 있던 시기에는 단체로 첨성대에 올라가는 것은 예사였다. 요즘 이러면 위의 대학생들 처럼 바로 체포된다.

각주

  1. 내물왕릉의 위치를 이 첨성대 남서쪽으로 기록하고 있다. 원문에는 첨성대를 점성대로 기록함
  2. 술 김에 첨성대 올라가 기념사진 촬영… 대학생 3명 입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