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스튜어트 벨

John Stewart Bell
이름 존 스튜어트 벨
출생 1928.07.28,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사망 1990.10.11(향년 62세), 스위스 제네바
국적 영국
연구분야 물리학
지도교수 루돌프 어니스트 파이얼스
제자

존 스튜어트 벨(John Stewart Bell, 1928년 6월 28일 ~ 1990년 10월 1일)은 영국물리학자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벨은 어렸을 때부터 물리학에 재능을 보여 대학에 입학하여 물리학을 공부할 수 있었다. 그 후 CERN으로 가서 활동하였다.

벨은 1964년에 발표한 벨의 정리를 통하여, 아인슈타인 등이 썼던 EPR의 논의를 이용하여, 국소적 실재론과 양자역학이 양립 불가한 실험을 묘사하였다.

벨은 양자역학의 해석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었으나, 전후 물리학계는 이러한 문제를 쓸데없는 형이상학의 문제로 볼 뿐이었다. 코펜하겐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그가 고전 물리학의 틀에 갇혀 있다는 것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은 기존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그는 일급의 학자들마저 가당찮은 소리들을 한다고 여겼다. 파인만의 강의록 또한 이 범주에 들어갔다.[1] 란다우와 리프쉬츠(Landau and Lifshitz)의 책 또한 불만족스러웠다.[2] 벨에 따르면, 폰 노이만은 양자역학에 대해 틀렸을 뿐 아니라 멍청한 증명을 내놓은 인물이었다.("The proof of Von Neumann is not merely false but foolish!")[3] 보어의 상보성에 대해서, 벨은 contradictoriness라고 불렀다. 벨이 보기에, 이러한 헛소리로부터 자유로운 물리학자가 바로 아인슈타인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양자 역학에 대한 중요한 공헌자였다. 1905년, 광양자 가설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고, 이는 양자 역학 초창기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논문으로 여겨진다. 보어의 원자 모형이 발표되자, 이 모형과 열역학을 활용하여 유도 방출에 대한 이론을 만들어 냈다. 보즈-아인슈타인 통계 또한 중요한 업적이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드 브로이의 물질파 이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고, 물리학계가 미심쩍게 바라보고 있을 때조차 이 이론을 높게 평가하여 슈뢰딩거의 방정식, 더 나아가 새로운 이론으로 갈 길을 열어 놓았다. 또한, 하이젠베르크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생각하면서, 불확정성의 원리를 생각해 냈고, 막스 보른의 확률적 해석을 만드는 데에도 도움을 주었다. 20세기 초반의 양자역학의 발달사는 아인슈타인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아버지라 불리울 만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의 가장 격렬한 비판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코펜하겐 해석이라는 현대의 표준 해석이 만들어졌다. 그는 보어와 논쟁을 벌였으며, 그 과정에서 그는 포돌스키, 로젠과 더불어 EPR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질 논문을 쓰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그 자신의 위대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고독한 존재로 남게 되었다. 벨은 아인슈타인이 다른 사람들은 보기 거부한 것을 명확히 본 것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은 모래 속에 자기 머리를 파묻고 있는 것에 불과했다고 생각했다.

벨은 이러한 양자역학의 개념적 문제를 확실히 하기 위해 벨의 정리를 고안해 냈다. 벨의 정리의 증명으로 인하여, 국소적 실재론은 이루지 못할 것이 되었다.

양자 역학의 개념적 기초에 대한 연구는 철학이 아니면, 사이비 과학과 관련된 것으로 취급받았다. 그래서, 벨의 정리를 사용하여, 실험이 존 클라우저(John Clauser) 등에 의해 수행되고 난 후, 클라우저는 자신의 커리어에 이상이 생겨 버렸다. 1980년대에 들어, 알랭 아스페(Alain Aspect)는 기존의 실험에서 생겨난 결점을 없앤 실험을 기획하였다. 실험에 대해 의논하기 위해 그는 벨에게 가서 실험에 대해 설명하였다. 이렇게 설명한 후, 벨은 아스페에게 보장된 일자리가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벨은 자신이 구상한 실험을 한 사람들이 커리어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를 알았기 때문에 그랬다. 알랭 아스페 등이 한 실험은 기존의 실험에서 생겨난 결점을 극복한 결정적인 실험으로 남았다. 이러한 실험으로 인하여 양자 얽힘(quantum entanglement)의 존재가 실험으로 확인되었다. 이러한 양자 얽힘이 양자 컴퓨터나 암호학에 중요하게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이 알려지면서, 이와 관련된 연구가 활발하게 되었다. EPR 논문은 벨의 공헌으로 인해, 양자 얽힘을 선구적으로 인식한 논문으로 새롭게 주목받았다. 이 논문은 ‘잠자는 숲 속의 공주’ 논문의 예로도 꼽히게 되었다.[4] 과학계라는 곳은 아인슈타인 같은 유명 학자조차, 선구적인 업적이 무시될 수 있는 곳이었다. 그 업적은 60년간 잠들어 있었고, 1994년에 깨어났다. 그 잠을 깨운 것은 벨과 벨의 정리를 증명하기 위해 자신의 커리어에 이상이 생길 것을 알면서도 실험에 도전한 사람들의 용기였다. 이로 인하여 EPR 논문과 벨의 정리는 20세기 물리학의 중요한 업적으로 평가받게 되었다. EPR 논문은 별 볼 일 없는 논문에서, 아인슈타인의 논문 중에서 피인용수가 제일 높은 논문으로 그 평가가 바뀌었다.

벨은 1990년에 생을 마감했다.

각주

  1. d’Espagnat, B. (2002). "My Interaction with John Bell"
  2. Bell, "Against ‘measurement’." Physics World (1990): 33-41.
  3. John Stewart Bell, in interview, Omni, May 1988, p. 88
  4. 60년 만에 잠에서 깬 과학 숲속의 공주는? (서울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