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필희

李弼熙.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57년 4월 14일 한양에서 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한 덕수 이씨 이우권과 남양 홍씨 홍첨의 딸 사이의 2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친형으로 이준희를 두었다. 그는 충무공 이순신의 9대손으로, 고조는 황해수군절도사를 역임한 이계상, 증조는 함경병마절도사를 지낸 이한오이며, 조부 이형수도 함경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그는 한양에서 출생한 뒤 단양 매포에서 살았으며, 한산 이씨 이원규의 딸과 결혼했다.

1878년 무과에 급제한 뒤 당대의 대학자인 화서 이항로의 제자인 성재 유중교와 중암 김평묵의 문인이 되어 두 사람으로부터 위정척사 정신과 존화양이를 익혔다. 1893년 유중교 사후 유인석을 스승으로 모셨다.갑오개혁 중 변복령이 내려지자 관직을 버리고 단양으로 내려갔다. 1895년 11월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제천에서 안승우, 서상렬, 오인영, 배시강 등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의병대 사이에서 대장으로 추대되었고, 12월 3일 자신의 명의로 <격고팔도열읍>이라는 제목의 격문을 발표했다. 이후 안동으로 진군하다 단양에서 친위군과 교전해 승리했다. 그러나 내부 문제로 의병대가 흩어지자 단신으로 안동에 들어갔다. 1896년 1월 말 유인석을 총대장으로 하는 제천의진이 결성되어 충주성을 공략하자, 그는 즉시 여기에 가담했고 3월 31일 진동장을 맡아 원주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한 유인석은 국경을 넘어 중국에서 재기하려 했다. 이필희는 유치경, 송상규 등과 함께 유인석보다 먼저 중국으로 가서 청나라 정부에 군사지원을 요청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는 만주 통화현 오도구, 회인현 팔왕동에 머물면서 중국 정부와 접촉하는 한편, 팔왕동을 의병대의 근거지로 삼아 재기를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1900년 3월 3일 황도천 홍도진에서 타고 있던 배가 전복되는 바람에 물 속에 가라앉았다. 유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이필희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김기승, 천경석,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이순신연구논총, 2011년.[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