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구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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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成九.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2월 12일 경기도 화성유수부 일용면 조원동(현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29일 오산리 장날을 이용해 오후 5시경 공칠보(孔七甫)·김경도·이규선(李圭璇)·유진홍(兪鎭鴻)를 비롯한 3백여 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오산 장터에서 독립만세시위를 벌였는데, 일본인 경찰 오오키 키이치(大木喜市)가 출동하여, 선두에 서서 태극기를 휘두르던 유진홍과 안낙순(安樂淳)을 강제로 주재소에 연행하였다.

이에 그는 시위군중을 이끌고 주재소로 가서 연행자의 석방을 요구하며, 김경도와 함께 시위군중을 대표하여 일본 경찰과 담판을 벌여 그들을 석방시키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다시 5백여 명으로 늘어난 시위군중을 이끌고 면사무소로 가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면장 유진렬(劉鎭烈)에게도 같이 참여할 것을 요구했으나 오히려 해산을 종용하자, 선두에 서서 면사무소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윽고 다시 우편소로 가서 이규선과 함께 전화통을 파괴하고 부근의 일본인 주택을 파괴하는 등 격렬한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이 해 12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위 소요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8개월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1] 이후 수원에서 조용히 지내다 1973년 1월 7일에 사망했다.

1977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으며, 이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또한 2009년 11월 10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