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철 (1897년)

李相徹.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7년 1월 8일 경상북도 김천군 금릉면 금당리에서 현풍장로교회 창립자인 이명우 장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해 11월 형풍으로 이사갔고, 7살부터 4년간 사숙에서 한학을 익혔다. 1908년 현풍예수교소학교에 입학하여 1911년 3년만에 졸업했다. 이어 미션학교인 대구계성중학교에 진학하여 신학문을 익혔다.

1915년 18살의 나이로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6년 2월 8일 함안군의 부농 박성실의 차녀 박차모와 결혼했다. 창녕의 성암소학교에 교사로 부임해 학생들을 가르쳤고, 1918년 평양싱학교에 진학했으며, 현풍 하동교회와 고령 객기교회에서 조사로 봉직했다. 1919녕 전국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세브란스의던에 재학하던 이영준과 긴밀히 연락해 기미독립선언서를 입수한 뒤 현풍, 유가, 고령, 구디 일대에 배포해 독립만세시위를 유도했다.

이후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의 긴밀한 연대가 필요하가고 판단하여 임시정부 공채위원, 대구 달성군 교통사무국장의 임무를 맡았다. 1920년 8월 임시정부 특파웡이자 경상북도 교통사무국 책임자로서 국내에 파견된 이형수와 함께 최급경고문, 일본물품 불매고지서, 포고문, 독립공채 모집에 관한 안정서, 자유지 등을 입안, 작성, 복사하여 대구, 달성, 고령 일대의 동지들에게 전달했다. 또한 임시정부가 발행한 독립공채 증권을 직접 유지들에게 전달했다.

한편, 워싱턴국제회의에 일본제국주의의 압제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려는 한인들의 열망을 담은 독립지원요청 청원서를 전달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대구에 있는 미국인 부혜리 선교사, 경성의 카우만 선교사, 허인수 선교사 등에게 전달했다. 그러나 동지 김달문, 김은수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면서 모든 계획이 탄로났고, 이상철응 수사를 피해 피신 생활을 했다.

이후 외삼촌인 최두형을 통해 카우만 선교사와 재회했고, 카우만 선교사의 알선을 통해 최두형의 이름으로 1921년 경성성서학원에 편입학했다. 1922년 제11회로 졸업했고, 성서학원 학감으로 시무하다 1923년 기관지 '활천' 창간에 관여했으며, 1926년 성서학원 대강당구령회의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1928년 활천 편집부장으로 임명되고 성서학원 교수를 겸임했으며, 교단의 재무실무책임자, 동양선교회기부금 실무, 성서학원 서기, 사감, 중앙사무국 재무과주임, 출판과 편집주임 등을 맡았다. 1930년 초기에는 이사국 직원, 문서부 주임, 학무부 주임을 맡았고, 그해 12월부터 창신동, 철원, 홍성, 청주, 조치원교회 등 경향 각지를 순회하여 부흥회를 인도했다.

1932년 4월에 개최된 제4회 연회 겸 심령수양회에서 준비기도와 환영회를 인도했으며, 연회로 서기로 선출되었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설교, 사설, 강해 논설 등을 활천에 게재했다. 1933년 5월에는 이사국의 회계 업무를 맡았다.

그러나 1934년 건강악화로 이사국 회계를 사임했고, 1935년 중부지방 순회목사의 직임도 사임랬다.결국 1935년 12월 25일 소천했다. 향년 37세. 그의 묘소 위치는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이상철 목사의 독립운동 행적은 오랫동안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983년 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김은수의 장남 김주보가 이상철 목사의 장남 이병희 집사릉 찾아가 "독립운동사료집 제5집 3.1 운동 재판기록에 명시된 증거서류를 제시하면서 세상에 드러났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3년 이상철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