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호 (1895년)

李敏浩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4월 7일 충청남도 아산군 탕정면 매곡리에서 덕수 이씨 충무공파 10대손 이규풍과 해주 오씨 오태근의 딸 오세라의 장님으로 태어났다. 이복 동생으로 이민생, 이민재를 두었으며, 첫째 부인은 안동 권씨 권유상의 딸인 권마리아이고, 후부인은 정수정이다. 권마리아와의 사이에선 세 아들 이은영, 이하영, 이순영을 두었고, 정수정과의 사이에선 한국 광복군에서 활약한 이길영을 낳았다.

그는 경성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러시아 연해주로 건너가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다만 기록이 부족해 어느 학교에서 졸업했는지는 알 수 없다. 1919년 3.1 운동 당시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모집해 독립만세운동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경성으로 상경하던 중 형사에게 체포돼 평양형무소에 구금되어 3년간 복역했다.

만기 출옥 후 일제로부터 요시찰 인물오 낙인찍히자 1922년 연해주로 건너가 부친 이규풍과 재회했고, 이후 의사로 일하다가 1923년 고려공산당중앙부에 의해 폐업 명령을 받아 활동이 어렵게 되자 만주로 이사갔다. 1926년 5월 3일 재간도 총영사가 일본 외무대신에게 보낸 보고서 '돈화 안도 방면 군정서 공산 양파 및 마적의 동정에 관한 건'에 따르면, 이민호는 돈화현 이도양자에서 가족과 함께 거주했으며, 북로군정서 임관생으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1927년부터 중동선 아성현 일대에서 병원을 경영하였고, 1930년에는 흑룡강성 치치하얼 영안대가로 옮겨 병원을 경영했다. 1933년 일제의 기록 <재만조선인사정>에 따르면, 간도에서 남산의원을 경영했으며 만주국으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있지 않는 의원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이후 베이징으로 가서 독립운동을 수행하다 장처명 등과 함께 체포된 뒤 취조 중 심한 고문을 받아 사견을 헤매자 가석방되어 병원에 입원했으나 1944년 5월 29일 병사했다.

이민호의 유해가 묻힌 장소는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으며, 아산시 영인면 월선리 산 60-5 번지에 가묘가 조성되었다. 생가에 그의 행적을 기리는 <충국순의비>와 <오충비>가 세워져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민호에게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김기승, 천경석, <이순신 후손의 항일독립운동>, 이순신연구논총, 2011년.[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