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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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東煥.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1년 1월 9일 전라북도 정읍군 산외면 평사리에서 태어났다. 이후 경성부 제동 32번지에서 살았으며, 1926년 당시 중앙고등보통학교 5학년에 재학했다. 1926년 4월 25일, 조선학생과학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중 순종의 붕어 소식을 듣고 동지들과 함께 제2의 3.1 운동을 벌이기로 합의했다. 그는 박용규와 함께 중앙고등보통학교 내 동지들을 규합한 뒤 5월 16일 문인근의 하숙집에서 거사를 논의했다.

5월 29일 박용규, 곽대형, 김재문, 황정환 등과 함께 김재문의 하숙집에 모여 선언문을 공동 작성했으며, 5월 31일까지 김성기로부터 빌려 온 등사기 및 그와 김재문이 구입한 흑색 인주, 백랍지, 철필 등을 사용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힌 문서 약 5천 매를 인쇄했다.

조선 민중아, 우리들의 철천지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천만 동포여 결사 투쟁하자. 만세, 만세 조선독립만세.

6월 9일, 이동환 등 5명은 문서 1천 매씩 나눠서 여러 곳에 분배하기로 했다. 이동환은 중앙고등보통학교 학생 최제민에게 약 400매를 교부하고 순종의 국장이 열리는 6월 10일에 이를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길 권해 승낙받았다. 이후 6월 10일 당일 수은동 단성사 앞 노상에서 동창생들과 함께 국장 행렬이 지나가기를 가디렸다가 최제민과 함께 노상에 뛰어들어 각자 휴대한 문서를 살포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했다.

이 일로 체포된 그는 1926년 11월 1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형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1] 공소했지만, 1927년 4월 1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미결구류일수 중 6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고 형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2] 1927년 9월 20일 만기 출옥했다. 이후 평범하게 살다 1982년 6월 23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이동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