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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陸昌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6년 12월 28일 충청북도 옥천군 이남면 수묵리에서 출생했다. 그는 1919년 3월 1일 고종의 장례식을 참관하기 위해 같은 동리에 사는 육창문(陸昌文)·허상구(許相球)와 함께 상경하였다. 그러다 경성에서 3.1 운동이 전개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옥천군 이남면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3월 15일 육창문 집에서 3월 27일 옥천군 이원시장 장날을 이용하여 시위를 벌이기로 하고, 태극기 3개를 만든 후 마을 주민 다수에게 시위에 참여하자고 선동하였다.

3월 27일 옥천 장날에 이원시장에 모인 군중의 선두에 서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장을 돌았다. 이때 이원헌병주재소에서 헌병 상등병 키시모도 리사쿠(岸本理作)가 출동하여 해산을 명령하였으나 시위군중이 이에 응하지 않자, 선두에서 시위를 주도하던 육창주와 허상기를 연행하였다. 이에 분개한 김용이·허양·이면호·허상구 등 3백여 명의 시위군중은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주재소에 투석을 하며 동지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육창주는 혼란을 틈타 주재소를 탈출한 뒤 군중을 지휘하여 주재소에 돌을 던져 유리미닫이문, 판자 담 등을 파괴했다.

이 일로 경찰에 체포된 그는 1919년 6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소요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1] 이에 불복하여 상고했지만 1919년 7월 31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면서 옥고를 치렀다.[2] 1950년 5월 28일에 사망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5년 육창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9월 11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유해를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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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