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옥 (1864년)

柳震玉. 본관은 문화 류씨, 호는 거인(居仁)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4년 6월 26일 경상도 김해도호부 거인리(현재 김해시 외동)에서 조선 후기 경상도의 명망높은 유학자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의 아들로 출생헀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의 이름을 따서 호를 거인(居仁)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조용하고 차분해 또래들이 함부로 장난을 걸지 못했다고 하며, 기질이 총명해 한 번 배우고 익힌 것을 잊지 않아 어른들이 "이 아이가 뒷날 우리 가문을 창성하게 하겠다"고 감탄했다고 한다. 그는 소학을 배울 때의 마음을 다음과 같은 한시로 표현했다.

학문 익힘은 나는 새 처럼 날갯짓 익혀야지


사람 만들기는 매미 허물 벗는 것 같지.

가슴에 느껴져야 선성이 되살아나니

배움의 바람에 허령한 배를 띄워보세.

<대학>을 읽을 때는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책 속에 성인 상대해 명덕 닦으려니


낮을 이어 밤 없애도 즐거움 끝 없네.

다만 학문에는 다른 길 없음 알았으니

가장 마음 다짐해 용두사미 경계할 일.

뜻을 알면 모든 사욕 끊이고

마음 기틀 알면 모든 이치 통하네.

마음 잡기 여기에 실수 없다면

아마 성인들과 심경이 같아지리.

14세 때 경남 밀양의 유학자 노상직 문하에 들어갔다. 노상직이 자암서당에서 대학을 강의하며 "격물, 치지, 성의, 정심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고 학문의 요지를 설명하자, 이를 자신의 덕을 진보시키는 기반으로 삼았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는 대학의 8조목으로 가장 중요한 개념이다. 1910년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문을 나서면 내 어디로 가랴"라며 문을 닫아걸고 일본인이 관여하는 어떤 일에도 가담하지 않았다.

1919년 3월 곽종석, 김창숙, 장석영, 김복한 등이 주동한 파리장서에 서명했다가 체포되었지만, 일제는 유림들이 조선 사회에서 존경받는 인물들인 점을 감안해 재판에 회부하지 않았다. 하지만 일제 경찰의 감시가 심해졌고, 가정 형편이 어려워져 친척인 허씨 문중에서 빌려준 재실 청산정에 머물렀다. 그는 청산정에서 후진 교육에 매진하여 김해의 청년들을 가르쳤으며, 자신의 시와 글을 모은 <거인유고>와 선대의 글을 모은 <만사유고> 등을 집필했다. 1928년 2월 20일 청산정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9년 유진옥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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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