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곽희주

"너네가 이 가슴에 새겨진 엠블럼의 의미를 아느냐. 이 의미가 너희에게 어떤 의미인지는 모르겠지만 너희가 그렇게 함부로 할 의미가 아니다. 너희가 이 팀에 있으면 이 팀에 희생하고 모든 것을 바칠 준비를 해라."

-곽희주가 2012시즌 팀이 부진하자 선수들을 모아놓고 했다고 전해지는 이야기-1 

저에게 그라운드는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였거든요.

-현역 은퇴 이후 2020년에 가진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K리그 최고의 수비수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수원의 곽희주를 꼽겠다. 왜냐하면 가장 많은 골을 넣은 나를 꼼짝 못하게 하니까. 인간적으로는 훌륭한 선수이지만, 경기장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거칠다. 마치 인생의 마지막 경기를 뛰는 것처럼…

- 데얀 (당시 북패)2 

수원 삼성 구단 지정 공식 레전드 중 한명

구단 역사상 최고의 센터백 중 한 명

전설이 될 그 이름, 이젠 전설이 된 그 이름

수원 삼성의 영원한 29번

프로필[원본 편집]

  • 이   름: 곽희주 (郭熙柱 / Kwak Hee-Ju)
  • 출생일: 1981년 10월 5일
  • 국   적: 대한민국
  • 출신지: 강원도 강릉시
  • 포지션: 센터백
  • 신   체: 184cm / 77kg
  • 학   력: 서울증산초 → 연천중 → 숭덕공업고 → 광운대
  •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2003~2013) → FC 도쿄(2014) → 알 와크라 SC(2014~2015) → 수원 삼성 블루윙즈(2015~2016, 플레잉코치)
  • 코칭스태프 경력: 화성FC U-12 감독(2017) → 매탄고 코치(2018~2019) → 용인FC U-15원삼 감독(2020~)
  • 국가대표 기록: 6경기 출전
  • 종교: 불교
  • 애칭: 곽대장

클럽 경력[원본 편집]

유스 커리어[원본 편집]

출생지는 강원도지만 곽희주는 서울 증산초에서 축구를 시작해 연천중과 숭덕공고3를 거치면서 서울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굉장히 특이한데, 초등학생 때 학교로 왔던 일일강사가 곽희주에게 축구를 가르쳐주겠다고 접근한 것을 계기 축구인생을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이 사기꾼이어서 곽희주네 집안이 금전적인 피해를 입었다고.... 하지만 곽희주는 이것 때문에 축구를 포기하고 싶지는 않아서 축구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광운대로 진학하기 전에 '수원'의 곽희주를 만나지 못 할 뻔한 사건이 하나 발생하는데, 그것은 바로 고교 졸업 직후 당시 수원삼성의 최고 라이벌이었던 안양 LG 치타스에서의 입단 테스트에 합격한 것이다! 하지만 같이 테스트를 봤던 친구가 탈락하자 맘이 편치 않아 안양 입단을 거절하고 광운대로 진학했다. 고교 졸업 직후 바로 프로로 직행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친구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이러한 선택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 선택 덕분에 천만다행으로 우리는 붉은 유니폼을 입은 곽희주를 보지 않아도 되었다. 고교 졸업 직후 안양급의 강팀에서의 입단 테스트에도 합격할 정도로 곽희주는 꽤나 큰 잠재력을 보여주고 있었고, 이는 광운대 진학 이후에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곽희주의 이러한 행보는 김호의 눈을 끌었고, 김호는 그의 기량을 직접 점검하기 위해 곽희주가 대학교 4학년이었던 2002년 수원과 광운대의 연습경기를 잡게 된다. 경기 결과야 5대0 수원의 완승이었지만, 이 경기에서 곽희주는 수원의 레전드 공격수인 산드로를 훌륭하게 막아냄으로써 김호의 눈도장을 확실히 받게 된다. 그리고 곽희주는 대학 졸업 이후 2003년부터 수원 삼성의 일원으로 뛰면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1기 시절[원본 편집]

-2003년 서포터즈 데이에서의 풋풋했던 신인 시절 곽희주-

2003 시즌부터 수원에서 뛰게 된 곽희주는 등번호도 신인치고는 꽤나 앞번호인 6번을 받게 된다. 하지만 곽희주의 프로생활 시작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당시 수원의 수비라인은 조-조라인4 이 굳건하게 버티고 있었고 여기에 김영선과 수비수로 전환한 레전드 박건하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지만 조병국의 국가대표 차출과 수비수들의 줄부상으로 2003년 5월 21일 울산과의 경기에서 드디어 프로데뷔전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불안한 수비를 노출하여 3실점을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 경기 뒤에도 김호가 그에게 걸고 있던 기대치는 변하지 않았고, 곽희주는 7월까지 경기에 나왔지만 강한 몸싸움에 비해 플레이가 투박하고 잔실수가 많아 안정감이 떨어지는 편이었다. 이렇게 그는 팬들에게 의문점만을 남긴 채 11경기를 출전하면서 자신의 데뷔 시즌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곽희주는 03시즌 이후 여러가지 악재가 겹치면서5 정신적으로 멘붕에 빠지게 되고, 결국 2004년 2월 팀을 무단 이탈하기에 이른다. 당시 충청 대천에 있는 바닷가로 내려온 후, 위치 추적을 이용한 이창엽 피지컬 코치가 그를 발견하고 곽희주에게 "혹시 눈이 보이지 않는 후배 수비수들이 있다면 그들의 꿈이 되어야한다" 라는 격려를 했다. 이 격려에 힘을 얻은 곽희주는 1달 만에 2군 훈련에 복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호의 후임으로 온 차범근 감독은 곽희주를 2군에 계속 머무르게 한다. 시즌 전 무단이탈 행위 때문이였다.6 7 

하지만 이런 수원에 비상이 생긴다. 전년도 김영선이 무릎 인대를 다쳐 장기이탈이 예상된 가운데 조병국과 매성환은 올림픽 차출되었으며, 설상가상으로 매성환은 대표팀에서 발목을 다쳐 쓰리백을 선택한 수비에 구멍이 생긴 것. 연습경기에서 차범근은 백업선수인 조재민과 신인 이기형을 자주 기용하지만 성에 차지 않는 활약으로 고민이 깊어질 때 차범근 감독의 눈에 들어온 선수는 다름 아닌 자신이 걸러놓은 곽희주 선수였다. 곽희주는 연습경기에서 몸을 아끼지 않는 파이팅 넘치는 수비를 선보이며 '1군에 저만한 선수가 없으니 내가 좀 써야겠다'라는 차범근 감독의 판단으로 개막을 앞두고 1군으로 콜업된다.

이렇게 2004 시즌 극적으로 차범근의 플랜에 포함된 곽희주는 이 시즌부터 훗날 자신의 상징이 되는 등번호 29번을 달고 뛰게 된다. 매북과의 리그 개막전부터 선발 출장한 그였지만, 이 경기에서 자책골을 기록하는 악몽과도 같은 경기에 이어8  전기리그 내내 불안정한 수원 수비는 비판의 도마에 오르게 되고 곽희주는 그 비판의 대상에서 집중 타깃이 되어 시즌 전반기 내내 그의 기량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하지만 차범근은 이런 곽희주를 계속해서 기용시켰고, 그의 실수에 대해서도 큰 지적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곽희주를 믿었다. 그리고 곽희주는 이에 보답하기라도 하듯 시즌 중반부터는 단단한 벽이 되었고 특히 2004년 여름에 있었던 FC 바르셀로나와의 평가전에서 판타스틱 49  앞에서도 주눅들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바르샤 공격진을 무실점으로 막아내 팀의 승리를 이끌기도 했다. 이렇게 팀의 주전 자리를 꿰찬 곽희주는 2004 시즌 37경기를 소화하였고 모두 풀타임 출전을 하는 강력한 모습을 보였다. 또한 팀의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챔피언결정전에서도 맹활약하며 5년 만에 리그 우승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왼쪽부터 무사-곽희주-박건하-매성환-조병국) 10 

더불어 곽희주는 시즌 베스트 11에 선정되며 축구 인생 첫 우승과 첫 개인 수상을 모두 차지하는 영광을 얻게 된다. 당시 베스트11에 선정된 수원 선수로는 곽희주와 더불어 나드손, 김두현, 김대의, 무사, 이운재가 있었다. 이렇게 곽희주는 자신에게 온 두번째 기회를 놓치지 않았고, 04시즌을 기점으로 수원 수비진에 없어서는 안될 선수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2005 시즌에도 부동의 주전으로 나섰고 5월 15일 대전 시티즌과의 경기에서는 코너킥 상황에서 멋진 시저스킥으로 프로 데뷔골까지 터트리며 팀의 1대1 무승부를 만들어내었다. 이렇게 골 넣는 수비수의 시작을 알린 곽희주는 8월 24일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도 동점골을 넣으며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었고, 10월 16일 매북전에서는 멀티골을 넣으며 팀의 2대2 극적인 무승부에 크게 공헌하였다.11  하지만 11월에 발목 부상을 당하며 05 시즌을 조금 일찍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그였다. 해당 시즌 수원은 리그에서 최악의 성적을 내었지만, 곽희주는 그 와중에도 최선을 다해 뒤에서 고군분투해주었다. 05 시즌 총 스탯은 38경기 4골.

하지만 발목부상 회복이 꽤나 오래 걸려 2006 시즌 초반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하였고, 곽희주가 없는 수원 수비진은 굉장히 불안한 모습을 보였다. 곽희주는 5월이 되어서야 팀에 복귀할 수 있었고, 그 동안 쓰리백을 쓰던 차범근이 독일 월드컵 이후 포백으로 바꾼 뒤에는 레프트백으로도 활약하며 후반기 수원 수비의 안정화에 큰 역할을 해냈다. 10월 21일 부산과의 경기에서는 골을 넣으며 팀의 2대0 승리에 일조하기도 하였다. 06 시즌 총 스탯은 24경기 1골. 2007 시즌에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리며 시즌 전체를 온전히 소화하지는 못하였다. 5월 2일 리그컵 대회에서 펼쳐진 슈퍼매치에서는 헤딩 선제골을 넣으며 자신의 북패전 첫 골을 성공시키도 하였다. 결과도 3대1 수원의 승리. 07시즌 총 스탯은 28경기 1골.

(동영상 편집자가 북패팬인건지 편집이 심히 친북패적이다....)

2008 시즌에도 변함없이 주전으로 나서며 수원의 수비를 든든히 책임졌다. 4월 16일 부산과의 리그컵 경기에서는 선제골을 득점하며 팀의 3대0 완승에 일조하였고, 30일 매남과의 리그컵 경기에서도 골을 넣으며 팀의 1대1 무승부를 만들어내었다. 이후 5월 10일 대구전에서는 두 번이나 골망을 흔들었지만 둘 다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취소되어버린 적도 있었다.... 다행히 팀은 3대2로 역전승.

-부산전 골영상-

-매남전 곽희주 골영상- 시즌 중반 차범근이 다시 쓰리백을 꺼낸 뒤로는 마토, 이정수와 함께 K리그 최고의 쓰리백을 형성하며 수원의 짠물수비에 혁혁한 공을 세웠고, 12월 3일 북패와의 챔피언결정전 1차전에서는 귀중한 동점골까지 터뜨리며 1대1 무승부를 만들어냈다. 이후 수원은 7일에 열린 2차전 경기에서 2대1로 승리하며 4시즌만에 리그 정상을 탈환하였고, 이와 더불어 리그컵도 우승하면서 더블을 일궈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수원의 더블에는 시즌 내내 단단한 수비를 보여준 곽희주의 지분도 상당하였다. 곽희주의 08시즌 총 스탯은 36경기 3골.

-챔피언결정전 1차전 하이라이트-

-08시즌 리그 우승 이후 팬들에게 감사인사를 전하는 곽희주와 이운재- 2009 시즌 곽희주는 그간 보여준 리더십을 바탕으로 수원의 새로운 주장에 선임되지만 시즌 도중 주장 완장을 반납한다. 당시 디펜딩 챔피언 자격으로 연속 우승을 노리던 수원이지만 팀 내 주축 선수들의 이적으로 인한 조직력 악화를 견뎌내지 못해 나쁜 성적을 기록하고 있었고 결국 이에 부담감을 느낀 곽희주는 이운재에게 주장을 내주며 부담감을 떨쳐냈다. 이후 팀 성적은 조금씩 나아져 팀은 FA컵 우승을 차지했다. 곽희주의 09시즌 총 출전횟수는 33경기. 그리고 2009 시즌이 진행 중이던 당시 K리그 팬덤 내에서 꽤나 시끄러웠던 사건이 하나 발생했는데....

7월 12일 매북전에서 약 8개월만에 부상 복귀전을 치뤘던 당시 매북 소속의 김형범이 이 경기에 투입되자마자 곽희주와의 볼경합 중 다시 장기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때 김형범은 십자인대 파열을 당하며 다시 긴 시간을 부상 회복에 쓰게 되었던 상황. 물론 김형범 입장에서는 굉장히 안타까웠던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현재까지도 매북팬들이 이를 두고 곽희주가 일부러 김형범을 담갔다는 식으로 말하고 다닌다는 것이다. 하지만 위의 영상만 봐도 알겠지만 곽희주는 김형범에게 살인태클과 같은 어떠한 악의적 위해도 가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상황은 축구경기 중 흔히 볼 수 있는 정당한 경합행위였다. 곽희주 본인 역시 당시에 안타까움을 표하며 김형범에게 사과의 뜻을 표하였고, 김형범 역시 이를 받아들인 바 있다. 해당 기사 또한 김형범도 현역 은퇴를 발표했던 2015년의 인터뷰에서 당시 곽희주의 플레이는 정상이었고 오히려 오랜 부상으로 본인의 몸 상태가 제 컨디션이 아니었던거라고 밝힌 바 있다. [인터뷰]

하지만 당시 일부 매북팬들은 이에 분개한 나머지 경기가 끝난 뒤 수원 선수단이 탄 버스를 1시간 이상 막아선 채 곽희주에게 욕설과 인신공격을 자행하는 추태를 부렸다. 그 중 몇몇은 쇠파이프까지 들었다고.... 관련 기사 이 사건으로 인해 매북은 제재금 700만원을 선고받았었다.

-김형범의 부상에 분개하여 수원 선수단의 버스를 막고 추태를 부리고 있는 매북팬들- 이렇게 한 차례 홍역을 치뤘던 곽희주였지만 다음 시즌인 2010 시즌에도 변함없이 경기에 나왔고, 4월 27일 워리어즈FC12 와의 아챔 조별예선경기에서는 프로 커리어 최초이자 유일한 아챔 골을 성공시키며 팀의 6대2 대승을 이끌었다.13  그 뒤 5월 22일 차범근 생일날에 열린 전남과의 리그컵 경기에서는 헤딩 동점골을 넣은 후 그 전에 이미 사퇴의사를 표한 차범근에게 가서 팀 동료들과 함께 큰절을 올리는 훈훈한 광경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차범근이 좋지 않은 성적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시즌 중반 사퇴한 뒤, 그 후임으로 온 윤성효 밑에서도 곽희주의 자리는 확고하였다. 8월 18일 매북과의 FA컵 8강전에서는 선제골을 넣으며 팀의 2대0 승리에 기여, 팀의 FA컵 4강행을 이끌었고 결국 팀은 이를 발판삼아 2년 연속 FA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곽희주는 10시즌 도중 수원에서만 200경기 출장이라는 대기록을 세웠고, 해당 시즌을 39경기 5골14 로 마치게 된다.

하지만 2011 시즌에는 잦은 부상과 서서히 진행되는 노쇠화로 해당 시즌 재영입된 마토와 황재원 등과의 주전 경쟁에서 어려운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5월 7일 전남과의 경기에서는 해당 시즌부터 전남에서 뛰게 된 이운재를 상대로 선제골을 넣는데에 성공하였지만, 팀은 리드를 지키지 못하고 1대2로 역전패당하였다.

8월 6일 대전전에서도 선제골을 기록하며 팀의 4대0 대승에 일조하였다.

8월 13일 매남전에서도 골을 기록하며 팀의 2대0 승리를 이끌었다.

이렇게 11시즌에도 총 세골을 기록하며 골 넣는 수비수로써의 면모를 과시한 곽희주였지만, 위에서 언급한 이유로 인해 시즌을 풀로 소화하지는 못하였다. 해당 시즌 그의 총 스탯은 29경기 3골이었고, 이 중 리그 경기는 19경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2012 시즌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와 최고참으로서 다시 한 번 그에게 주장 완장이 돌아갔으며, 이 시즌에는 중앙 수비뿐만 아니라 측면 수비, 수비형 미드필드 위치까지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 능력으로 팀에서의 입지를 다시 넓히게 된다. 2012년 주장직 당시에도 2009년때처럼 시련이 많았다. 염기훈, 김두현 등 기존의 수원 베테랑들이 군 입대를 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새로운 선수들이 많이 유입되었는데, 이런 와중에 팀 내 태업 논란이 일어나며 곽희주는 기강이 무너진 선수들을 다잡는데 많은 노력을 했다. 3년전에는 시즌 도중에 주장 완장을 반납했던 곽희주였지만 이번만큼은 팀원들을 시즌 끝까지 이끌면서 리그 4위를 기록하였고,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는 데는 성공한다. 곽희주의 12시즌 총 스탯은 35경기 1골.

-곽희주가 골을 기록했던 12시즌 7월 29일 인천전. 경기 결과는 3대1 승리-

2013 시즌부터는 그의 젊은 시절 때 선수로서 잠시 같이 뛰기도 했었던 서정원 감독 밑에서 경기에 출전하였다. 3월 30일 매북전에서는 멋진 다이빙 헤딩골로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었는데, 이는 수원이 매북을 상대로 08시즌 이후 5시즌만에 리그 경기에서 거둔 승리였다. 훗날 곽희주는 자신의 커리어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골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골로 이 골을 뽑기도 하였다(의외로 08시즌 챔결 1차전 동점골이 아니었다).

(경기 막판 정대세의 부상으로 인해 정성룡이 걷어낸 공을 매북이 수원에게 주지 않고 바로 경기를 속개해버리는 추한 모습은 덤)

5월 18일 남패전에서는 그의 프로데뷔 1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는데 여기에서 그는 구단으로부터는 감사패를, 그리고 후배 민상기로부터는 10주년 기념 케이크를 받기도 하였다. 하지만 시즌 자체는 크고 작은 부상으로 인해 온전히 소화하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아무도 예상치 못 한 일이 벌어지고 말았으니, 13시즌을 끝으로 수원과의 계약이 끝나는 곽희주가 결국 수원과 재계약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충격적인 소식의 여파로 수원팬들 사이에서는 여러 얘기가 오갔는데, 이 중에서는 수원이 엄청난 투자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적을 못 낸 것과 더불어 자생 능력을 기르고자 하는 구단의 방침에 따라 팀은 재정감축이라는 폭탄을 맞게 되었고 팀 내 고액 연봉자였던 곽희주의 연봉을 맞춰주기 힘들어 그와의 재계약을 포기했다는 소문도 있었다. 이 소문이 널리 퍼지자 이미 '리얼블루'라는 정책을 시행 중인 것과는 다르게 아이러니하게도 진정한 리얼블루 중 한 명인 곽희주를 잡지 못한 데에 대하여 팬들의 분노는 굉장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루머에 불과한 얘기였고 훗날 곽희주가 직접 밝히기를 팀이 08시즌 이후 리그 우승을 못하면서 고참으로서의 책임감을 느꼈고, 팀을 위해서나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거였다고 한다. 오히려 구단 측에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고 입장을 밝히기 전까지는 구단과의 상의가 없었기 때문에 본인의 뜻을 처음으로 내비쳤을 때 구단 측에서 당혹스러워했었다고. 어찌되었든 곽희주는 그렇게 수원을 떠나게 되었고 '수원 외 그 어떤 국내 구단으로 가지 않겠다'라는 약속을 지켜 국내 구단과의 협상을 하지 않은 채 FA 신분이 되었다.

그리고 수원을 떠나면서 수원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과 언젠가는 수원으로 다시 돌아오겠다는 뜻을 담아 왼쪽 팔목에 수원 엠블럼 문신을 새겼던 그였다.15 

수원과의 이별이 발표된 후 진행된 빅버드에서의 홈경기가 끝난 뒤, 곽희주는 자신의 자녀과 함께 서포터즈석으로 와 팬들에게 잠시의 작별을 고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팬들은 그의 팔목에 새로 새겨진 엠블럼 문신을 발견하고는 수원에 대한 그의 애정에 다시 한번 감동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 뒤 11월 27일에 열린 인천 원정경기에서 수원팬들은 곽희주의 등번호인 29번 플랜카드와 곽희주 가면을 쓰는 퍼포먼스를 벌임으로써 살아있는 전설에 대한 예우를 다해주었다. 곽희주의 13시즌 총 스탯은 31경기 1골.

짧았던 해외 생활[원본 편집]

-FC 도쿄에서의 곽희주- 수원과의 이별 이후 2014시즌에 J리그의 FC 도쿄에 입단하며 곽희주는 그의 첫 해외 진출을 경험하게 된다. 같은 시기에 FC도쿄로 이적한 수원 시절 팀동료 녹두의 존재가 타지 생활에 큰 힘이 되었다고. 하지만 입단 후 9월 4일까지 리그에서 한 경기도 뛰지 못한16 곽희주는 결국 반년만에 도쿄와의 계약을 해지하는데, 여기에는 나름 훈훈한 일화가 있다. 이 시기 곽희주의 아내가 둘째를 임신중이라 홀로 한국에 있었는데, 이 때 아내의 몸상태도 좋지 않아서 곽희주가 아내를 간호하기 위해 도쿄 구단 측에 급하게 계약 해지를 요청하였다고 한다. 근데 도쿄 측에서 선수 개인의 행복이 우선이라며 흔쾌히 요청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계약 해지 이후에는 곽희주가 뛸 수 있는 다른 팀까지 알아봐줬다는 훈훈한 일화가.... FC도쿄와 계약을 해지한 이후에는 2014 시즌 9월 카타르 리그의 알 와크라라는 팀에 입단하였다. 입단 직후 가진 7경기에는 모두 출전하였으나, 성적 부진을 이유로 감독이 7경기만에 경질당하였고(....) 그 뒤 부임한 새 감독이 곽희주를 중용하지 않아 그는 더 이상 카타르 리그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알 와크라의 일처리 자체도 개판이어서 첫 3개월동안은 호텔 생활을 계속해야했고, 3개월 동안 주급도 못받아서 참고 참던 곽희주가 폭발하여 팀을 나가겠다고 하니까 그제서야 3개월치 주급을 주었다고 한다... 참고로 카타르에서 생활하면서 당시에 역시 카타르 리그의 알 사드에서 뛰고 있었던 수원 시절 동료 이정수와의 교류가 잦았다고 한다.

다시 수원으로, 그리고 전설이 된 그 이름[원본 편집]

결국 곽희주는 14시즌 종료 뒤 알 와크라에서 나왔고 한동안 무직 신분으로 지내게 된다. 곽희주가 소속팀이 없어졌다는 소식을 들은 수원 팬들은 많이 아쉬워했지만 그의 영입 여부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는데, 팀을 떠날 당시 이미 노쇠화가 진행되었고 1년간 제대로 경기를 출전하지 못했기에 그의 영입이 득이 될까에 대한 의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구단의 재정도 계속해서 감축되어 과연 그의 연봉을 맞춰줄 수 있겠냐는 의견도 있었다. 하지만 정작 2015년 3월 곽희주가 플레잉코치로 수원에 돌아올꺼라는 보도가 처음으로 나오자 수원팬들은 너도나도 환영의 뜻을 내비치며 레전드의 위엄을 실감하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리그 선수등록을 사흘 남겨놓은 시점에서 보도대로 수원에 플레잉코치로 합류한다는 오피셜이 뜨며 1시즌만에 다시 수원으로 돌아온 곽희주였다.

-곽희주의 복귀 오피셜이 뜬 뒤 구단에서 공개한 영상-

이후 4월 4일 부산과의 홈경기에 출전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수원팬들 앞에서 재회의 인사를 보내며 곽대장이 집에 돌아왔음을 팬들에게 확실히 각인시켰다. 그리고 팬들은 1년 전 그를 보낼 때와 똑같이 다시 29번 플랜카드를 들며 전설의 귀환을 열렬히 환영하였다.

곽희주는 5월 31일 인천전에 교체출전하며 수원 복귀전을 치루게 되고, 6월 17일 남패전에서는 복귀골까지 넣으며 팀의 4대3 신승에 일조하였다. 하지만 플레잉코치라는 직함을 다는 대부분의 베테랑들이 그러듯이 곽희주는 30대 중반이라는 나이와 부상 때문에 경기 자체에 많이 출전하지는 못하였고, 대신 팀의 살아있는 레전드로서 선수들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15시즌 리그 스탯은 13경기 1골.

15시즌 종료 이후, 곽희주는 수원삼성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이 뽑은 역대 베스트일레븐에서 젊은 시절에 같이 호흡을 맞췄던 마토와 함께 수원 사상 최고의 센터백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이와 동시에 발표된 구단 선정 공식 레전드로도 뽑히며 구단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수비수로 인정받게 된다. 참고로 공식 레전드를 발표한 시점에서 국내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던 선수는 곽희주가 유일하였다.17 

현역으로서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6 시즌에도 곽희주의 역할은 지난 시즌과 같았다. 해당 시즌 진행된 슈퍼매치와 관련하여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곽희주는 자신의 수원 통산 300번째 경기이기도 했던 4월 30일 북패전에서 1대1로 비기고 있던 중 당시 북패 소속이었던 아드리아노에게 1대1 찬스를 내줄 위기를 맞자 아드리아노 뒤에서 넘어질 때 손으로 아드리아노의 발목을 잡는 파울을 하게 된다.

보통 이 정도의 파울은 즉시 퇴장감이지만 심판의 판단 미스로 인하여 곽희주는 옐로카드에 그치게 되고, 이 경기는 그대로 1대1로 종료된다. 이후 연맹에 의해 퇴장성 파울로 인정되어 곽희주는 사후징계로 2경기 출장정지를 받기는 했지만, 이로 인해 승점 3점을 도둑맞은거나 다름없었던 북패팬들은 곽희주를 대차게 깠고, 특히 아래와 같은 사진이 찍혀버리는 바람에 곽희주는 수원팬들을 제외한 K리그 팬덤 사이에서 조소을 받게 된다.

비록 너무나 절박한 순간이기도 했고 결과적으로 팀의 패배를 막기는 하였으나, 경기 후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특히 위의 사진을 보면서 곽희주는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다가 문득 자신이 골을 넣게 되면 저 다이빙을 세러머니로 해야겠다는, 일종의 셀프디스성 세러머니를 하기로 맘을 먹은 그였는데....

하필이면 그 뒤 자신이 골을 넣은 경기 상대가 저 다이빙 파울을 했던 북패였다! 6월 18일날 진행된 이 슈퍼매치에서 곽희주는 교체출전한 뒤 동점골을 넣으며 팀의 1대1 무승부를 만들었고, 자신이 맘먹었던대로 다이빙 세러머니를 통해 셀프디스를 시전하였다. 근데 북패팬들 입장에선 놀리는거 같아서 오히려 더 약올랐을 수도.... 이 골은 곽희주 현역 시절 마지막 골이기도 하다.

7월 13일 성남 FC와의 FA컵 8강전에서는 극한의 투혼을 보여주면서 수원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이 경기에서 수원은 전반에만 이종성구자룡 두명이 퇴장당했고, 성남도 한명이 퇴장당했지만 그래도 한명이 더 적은 수적 열세에서 경기를 진행해야했다. 이런 상황에서 곽희주는 한국나이로 36살임에도 불구하고 연장전까지 풀로 소화하는 투혼을 발휘하였다. 특히 연장후반 체력방전으로 근육이 시도때도 없이 올라오는 상황에서도 다리를 절뚝이면서까지 최선을 다하는 그의 모습에 많은 팬들이 감동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곽희주하면 수원팬들이 떠올리는 명장면 중 하나이다. 결국 수원은 승부차기에서 승리를 거둬 FA컵 4강에 진출할 수 있었고, 결승전에서 북패를 꺾고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릴 수 있었다.

(연장후반 15분부터 연장전이 끝날때까지 수원의 29번을 주목해서 봐보자) 이후 8월 13일 슈퍼매치에도 출전하였으나 전반에 어깨 근육 부상을 당하며 교체되었고, 결국 이로 인해 시즌 아웃을 당하여 자신의 현역 마지막 시즌을 조기마감할 수 밖에 없었다. 훗날 곽희주는 이 경기를 두고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 그것도 마지막 슈퍼매치였던만큼 부상으로 이른 시간 나간 것이 굉장히 아쉬웠다고 회고하였다. 16시즌 리그 스탯은 10경기 1골.  곽희주는 어깨 부상에서 회복하면서 이제는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고, 결국 2017년 1월 2일 한국나이 37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에 구단 측은 2017 시즌 첫 홈경기였던 3월 11일 매북전을 통해 곽희주의 은퇴식을 치뤄주었다.

이 은퇴식에서 수원팬들은 13년동안 팀을 위해 헌신한 그를 위해 등번호 29번 카드섹션을 선보였고, 은퇴식 내내 곽희주 콜을 외치며 그에게 뜨거운 작별인사를 보냈다.

-곽희주 은퇴식 영상- 그는 수원에서의 13년동안 무려 369경기 출전, 그리고 21골이라는 기록을 작성하였다. 이렇게 수원 역사에 굵직한 기록을 남긴 헌신의 아이콘 곽대장은 영광의 시절을 뒤로 하고 제 2의 인생을 시작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게 된다. 여담으로, 곽희주가 은퇴 의사를 밝히자 구단 측에서 그의 등번호인 29번을 영구결번해주겠다고 제안했으나 곽희주가 거절하였다고 한다.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2008년 5월 31일 요르단전에서의 곽희주. 백넘버 6번이 곽희주이다) 국대와는 별 인연이 없는 선수였다. 05시즌 수원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본프레레 당시 국대 감독의 부름을 받았고, 2005년 6월 8일 쿠웨이트와의 2006 독일월드컵 지역예선경기에 출전하여 A매치 데뷔전을 치뤘다. 그 뒤 8월 4일 북한과의 경기에도 출전하였으나, 이후 본프레레가 감독직을 사임하여 한동안 국대와의 연이 끊기게 된다. 그렇게 오랜 시간 국대 유니폼을 입지 못하고 있던 곽희주는 3년 뒤인 2008년 당시 국대 감독이었던 허정무로부터 발탁을 받아 간만에 다시 국대에 콜업되었고, 2월 17일 중국전과 20일 북한전에 연속으로 출전하며 국대 복귀전을 치루게 된다. 그 뒤 5월 31일과 6월 7일에 열렸던 요르단과의 2010 남아공월드컵 지역예선경기 2연전에도 출전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하였다.

코칭스태프 경력[원본 편집]

현역 은퇴의 뜻을 밝혔을 때, 수원 구단 측이 유소년 코치직을 제안했으나 이를 사양하고 서울의 모 대학교 코치로 새출발할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현장감과 멀어진 느낌의 유스보다는 프로에 가까운 위치에서부터 시작하고 싶어 대학 코치를 선택했다고. 그러나 대학교 코치직은 불발되고, 대신 코칭 커리어를 기초부터 다져나가기 위해 중앙대에서 최우수 성적으로 스포츠심리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무엇이 선수를 위축되게 만드는지를 이해하며, 그 부담을 덜어주는 방법론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이후 K3리그 소속팀인 화성 FC의 U-12팀 감독으로 활동했다. 2017년 7월 30일 제2회 국토정중앙배 전국유소년축구대회 8세 이하 부문에서 우승하면서 부임하자마자 우승을 하게 됐다.

또한 한국프로축구선수 협의 이사로도 선임되며 행정가로서의 길도 걷기 시작했다. 카타르 시절 임금 체불 문제를 김훈기 선수협 사무국장의 도움으로 해결하면서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그러던 중 201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U-18 유스팀인 매탄고 축구부의 저학년부 코치로 부임하게 된다. 현역 은퇴 직후 수원 구단으로부터 제안받은 유스 코치직을 거절했던 그였지만 결국에는 그 자리를 맡게 된 것. 이로써 곽희주는 현역 은퇴 이후 1년만에 코칭스태프로서 수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매탄고에는 2019년까지만 재직하였고, 2020년부터는 용인축구센터 산하의 용인FC U-15원삼18 의 감독직을 맡아서 유소년 선수들을 육성하고 있다.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K리그 최고의 파이터형 센터백이었다. 뛰어난 피지컬과 활동량, 그리고 마크대상을 말 그대로 지워버리는 수준의 대인마킹 능력이 그의 최고 강점. 매경기가 인생의 마지막 경기인마냥 거친 몸싸움도 마다하지 않고 투혼을 불살랐던 수비가 일품이었던 선수로, 왠만한 K리그 정상급 공격수들도 곽희주의 압박수비에는 고전하는 모습을 보였다. 센터백치고는 발도 빠른 편이었으며, 공중볼 경합에서도 두각을 나타내었다. 또한 수비에 성공한 뒤 전방으로 찔러주는 롱패스의 정확도도 좋은 편이어서 팀 역습의 시발점이 되기도 하였다. 이뿐만 아니라 팀의 세트피스 공격 시에는 탁월한 위치선정 능력과 높은 타점을 이용하여 득점도 곧잘 기록하였다. 다만 거친 몸싸움을 주무기로 삼는 수비 스타일로 인해 상대선수와의 큰 충돌이 자주 발생하였고, 이로 인해 현역 시절 내내 잦은 부상에 시달리기도 하였다.

플레이 영상[원본 편집]

곽희주 콜[원본 편집]

곽희주 은퇴식 당시 프렌테 트리콜로의 퍼포먼스

"알레~ 오오~ 수원 곽희주~

전설이 될 그 이름! 수원 곽희주~"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현역 시절에 축구를 즐기지 못했다고 한다. 신인 시절에는 팀에서 자리잡기까지 갖가지 고생을 겪었고, 자리를 잡은 이후로도 본인 스스로 스트레스를 어느 정도 받아야 경기력이 잘 나오는 스타일이었기에 항상 치열하게 했다고. 때문에 선수때는 단 한 순간도 축구가 즐거운 적이 없었다고 한다. 아마 센터백이라는 포지션의 특수성도 이에 영향을 준 듯 하다.
  • 위에서도 잠깐 언급하였지만 선천적으로 왼쪽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렸을 때는 축구하는 데 그닥 불편하지 않아서 방치했고, 성인이 되어서야 고치려 했으나 그 때는 이미 늦었다고... 신경병이었는데 십년넘게 방치해 신경이 손댈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이 이유로 군대는 면제 처리되었지만 본인에게는 흑역사. 19  
  • 축구장에서 투지 있는 모습과 달리 매우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이며 낯을 심하게 가리는 편이라고 한다. 북패 시절 곽희주 때문에 슈퍼매치에서 고전하던 데얀이 사석에서 “희주가 경기장에서만 그렇지 나쁜 애는 아냐”라고 말한 적도 있다고....
  • 하지만 경기장에서만큼은 후배들을 상당히 다그쳤다고 하는데, 이는 수비수라는 포지션의 특정상 단 한번의 실수가 바로 실점으로 연결될 수 있기에 후배들을 다잡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이 외에도 선수들이 술냄새를 풍기면서 출근하거나 팀미팅에 늦는 등 팀분위기를 해치는 행동을 하였을때 벌금을 매기는 역할도 하였다고. 아래는 현역 은퇴 이후 2020년에 가졌던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곽희주가 직접 밝혔던 내용.

Q. 염기훈 선수가 과거에 “희주 형이 있을 땐 후배들을 심하게 다그치는 경우도 많았다”고 인터뷰 한 걸 봤습니다. A.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엔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죽기살기로 뛰겠습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막상 경기에 들어가면 그 마음이 1분 1초마다 계속 바뀌어요. 선수들 본인만 아는 그런 감정이 있어요. 힘들면 포기하고 싶고 또 힘든 상황에서 도전하고 상대 선수와 부딪치다보면 그 초심이 사그라질 때 있고요. 그래서 경기장 안에서 그런 1분 1초를 다잡기 위해선 조금 더 강제적인 게 있어야 합니다. 또 수비수인 제 위치 특성상 선수들이 한 발이라도 더 뛰어줘야 팀이 버틸 수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선수들에게 그런 부분에서 강요를 했죠. 만약 제가 공격수였으면 선수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지만 저는 상대를 막는 입장이고 주변 동료들의 힘이 필요했어요. 선수들한테 심한 욕도 했었죠. 모두가 힘든 상황에서 선수들의 잠재적인 능력을 뽑아내야 하니까요. 저에게 그라운드는 놀이터가 아니라 전쟁터였거든요. 선수들을 잘 만나는 경우에는 좋은 동료나 선후배 관계가 되었어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선수들도 정말 많았어요. 개인의 이득을 위해 본인이 힘들면 그 상황을 남들에게 미루고 ‘다른 누가 해주겠지’ 이런 생각을 가진 선수들이요. 선수가 그런 생각을 가지는 순간 팀이 망가집니다. 저는 ‘누군가 해주겠지’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려고 했어요.

  • 위에서 말했다시피 북패의 최고 골잡이였던 데얀도 슈퍼매치에서만큼은 곽희주로 인해 맥을 못 추었다. 비록 데얀이 북패 시절 슈퍼매치에서 7골을 기록하며 슈퍼매치 최다 득점자이기는 했지만, 20   그가 북패에서 출전했던 슈퍼매치가 25경기나 된다는 것을 봤을 때 데얀의 명성에는 못 미치는 기록이었다. 오죽하면 언론이 곽희주에게 붙였던 별명 중 하나가 '데얀 킬러'였을 정도. 이렇게 현역 시절 수많은 대결을 해왔던 둘은 2018시즌 데얀의 수원 이적 이후 처음으로 열린 슈퍼매치 홍보영상에 같이 등장하며 폭풍간지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 보통의 파이터형 센터백들이 그러하듯이, 현역 내내 수원팬들에게는 열렬한 지지를 받았지만 타팀팬들은 거칠다고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매북패 팬들은 곽희주를 거의 증오하는 수준.
  • 2005년 10월 2일 포항과의 경기 후 빅버드에서 간단한 생일 축하 자리를 가지기도 했다. 곽희주의 생일은 10월 5일인데, 당시 10월 5일엔 성남과의 주중 원정 경기가 잡혀있었기 때문에 그 전 주말에 미리 한 것. 사진만 보면 무슨 테러라도 당한 것처럼 보이는데 엄연한 생일 축하 자리이다....
  • 10시즌 FA컵 우승 이후 팬들과 가진 뒷풀이 자리에서 현란한 스텝의 춤(?)을 잠시 선보인 흑역사가 있다....

(댄스는 1분 40초부터)

  • 팀의 주장을 맡았던 12시즌 시작 전 장지현과 가졌던 인터뷰 영상
  • 12시즌 4월 1일에 열린 슈퍼매치 홍보영상이 그 유명한 '북패 승점자판기' 영상이었는데, 곽희주 역시 이 영상에 출연하였다. 실제로 수원은 이 경기를 2대0으로 승리하였다.
  • 2017년 은퇴 직후 가진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수원의 역대 베스트 11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FW - 녹두  나드손 MF - 김대의 이관우 김은선 21    염기훈 DF - 이정수 마토 곽희주  송종국 GK -  이운재

  • 그 동안 수원에서 함께했던 수많은 외국인 선수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선수로는 마토와 리웨이펑을 뽑았다.
  • 슬하에 1남 1녀를 두고 있는데, 둘째 아들이 아빠를 이어 축구선수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담아서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공격수 라울 곤잘레스의 이름을 본따 '곽라울'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보통 운동선수들이 자기 자식만큼은 운동을 안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것과 대조적인 부분.
  • 2020년에 포포투 코리아와 가졌던 인터뷰 영상.
  • 2021년에 가졌던 인터뷰 영상.
  • 선행 행위에 적극적인 선수로 유명하며, 타 프로선수들에게 귀감이 되었다. 워낙 선행 사례가 많은지라 아래 항목에 후술한다.

선행[원본 편집]

  • 2007년부터 알로이시오 초등학교에 축구용품을 기증하고 있다. 곽희주의 이같은 선행 사실을 안 수원 구단 측은 '이런 선행은 기사화해서 알려야한다.' 라고 했지만 곽희주 선수가 극구 거부하였다고. 어렸을적 장애를 극복한 것 때문에 사회봉사나 기부에 관심이 많다고 한다. 2011년에는 다문화가정에 기부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 2008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리그 우승 후, 그랑블루에서 주최한 나눔의 행사 선수 용품 경매 행사에서 곽희주가 2008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에서 신었던 축구화가 62만원에 낙찰되면서 이 행사 최고가를 기록한 적도 있다. 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