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키독:고종수

영광의 수원 삼성 시절

1998년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에 출전한 고종수

수원 삼성의 창단 멤버이자 구단 지정 공식 레전드 중 한명 앙팡테리블

수원의 원조 왼발의 달인이자 백넘버 22번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

하지만 '재능에 비해서는' 꽃을 못다 피웠던 비운의 천재

그러나 현재는 지도자 커리어 최악의 흑역사를 쓸 위기에 놓인 인물

프로필[원본 편집]

생년월일

1978년 10월 30일 1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전라남도 여수시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왼쪽 윙어
선수시절 신체 176cm, 72kg
주발 왼발
프로 데뷔 1996년
학력 여수서초 → 구봉중 → 금호고
등번호

수원 삼성 블루윙즈-22 교토 퍼플 상가-30 전남 드래곤즈-8 대전 시티즌-10 국가대표-8, 14, 22 2

소속팀 수원 삼성 블루윙즈 (1996~2004)

교토 퍼플 상가 (2003, 임대) 전남 드래곤즈 (2005~2006) 대전 시티즌 (2007~2008)

지도자 매탄고 코치 (2011)

수원 삼성 블루윙즈 트레이너 (2011~2012)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 (2013~2017) 수원 삼성 블루윙즈 스카우터 (2017) 대전 시티즌 감독 (2018~2019)

국가대표 38경기 6골
별명

앙팡테리블 3  , 고길동 4  , 고쌤

2. 클럽 경력[원본 편집]

유소년 시절[원본 편집]

고종수는 현재까지도 선천적인 재능만을 따졌을 때 한국축구 사상 손에 꼽히는 축구천재였다. 유소년 시절때부터 또래 선수들과는 차원이 다른 플레이를 선보였다고 알려져있는데, 금호고 1학년이었던 1993년에는 시도대항 축구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하며 금호고의 준우승을 이끌었고 2학년인 1994년에는 모교에게 백록기 고교축구대회 트로피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고교 시절부터 이미 또래애들로부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잠재력을 뽐내고 있던 고종수였다.

수원 삼성 블루윙즈 시절[원본 편집]

고종수 커리어 최전성기 이렇게 고교 무대를 평정하고 있던 고종수는 수원삼성의 초대 감독 부임을 준비하던 김호의 눈에 들었고, 결국 고교 졸업 이후 수원의 사상 첫 시즌인 1996시즌부터 팀에 합류하여 프로무대로 직행하게 된다. 지금은 축구선수가 대학 무대로 가지 않고 바로 프로 데뷔를 하는 것이 종종 발생하는 일이기에 그리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고교 졸업 이후 대학을 거치지 않고 바로 프로로 간다는 것은 굉장히 놀라운 일이었다. 고종수는 96시즌 7월 4일 매북과의 경기에서 프로 데뷔전을 치뤘고, 이 뒤에도 프로데뷔시즌을 맞이하는 신인치고 꽤나 많은 기회를 부여받았다. 11월 2일에는 데뷔전 상대였던 매북을 상대로 프로데뷔골을 터뜨렸는데, 이 득점은 현재까지도 수원 역사상 최연소 득점 기록(만 18세 3일)으로 남아있다. 그의 1996 시즌 스탯은 14경기 1골 4도움이었고, 바로 다음 시즌에도 준수한 활약을 펼치며 1997시즌에는 15경기 3골 5도움을 기록하였다. 2시즌동안 유망한 모습을 보여주던 고종수는 1998시즌부터 비로소 완성형의 모습을 보여주기 시작한다. 이 때부터 플레이메이커로써 그의 미친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되었고, 그는 한 시즌동안 팀을 진두지휘하며 수원의 사상 첫 리그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인 덕분에 월드컵 이후로는 전국구 스타로 발돋음하였고 이와 더불어 월드컵 이후 펼쳐졌던 K리그 보기 운동으로 인해 당시 부산 대우 로얄즈5  소속이었던 안정환, 그리고 포항 스틸러스 소속이었던 매동국과 더불어 'K리그 트로이카'라 불리우며 리그 관중몰이에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고종수가 출전하여 골을 기록했었던 98년 8월 16일 K리그 올스타전- 고종수의 98시즌 총 스탯은 20경기 3골 4도움. 시즌이 끝난 뒤 그는 팀을 사상 첫 리그 우승으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샤샤와 함께 해당 시즌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면서 프로 커리어 첫 베스트일레븐 선정이라는 기쁨을 맛보았을 뿐만 아니라, 98시즌 K리그 MVP에까지 선정되는 영광도 누리게 된다! 이 수상은 현재까지도 K리그 역사상 최연소 리그 MVP 수상(만 20세)으로 남아있다. 팀의 창단 이후 첫 리그우승에다가 만 20세에 얻은 리그 MVP 트로피까지... 고종수에게 98시즌은 잊을 수 없는 순간일 것이다. 고종수는 1999시즌에도 자신의 천재성을 마음껏 뽐내며 팀 공격의 중추를 도맡았다.99시즌 5월에 열렸던 부천 SK와의 경기에서 고종수의 활약상을 보도했던 MBC뉴스 영상

7월에 열린 매북과의 경기에서는 멀티골을 넣으며 팀의 3대1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해당 경기를 보도했던 MBC뉴스 영상

 이후 8월 11일에는 아디다스컵 결승으로 안양LG치타스와의 지지대더비가 펼쳐졌는데, 고종수는 2대2로 비기고 있던 상황에서 데니스의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결승골로 연결시켰고 이후 한골을 추가한 수원은 안양을 4대2로 꺾고 아디다스컵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해당경기를 보도했던 KBS뉴스 영상 99시즌 수원은 리그 두 시즌 연속 우승과 해당 시즌에 개최되었던 아디다스컵을 포함한 두개의 리그컵을 모두 우승하였고, 고종수는 이러한 팀의 트로피 수집에 큰 공헌을 하였다. 그의 99시즌 총 스탯은 21경기 4골 7도움이었고,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다시 한번 시즌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어 두 시즌 연속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하였다. 당시 그와 같이 베스트일레븐에 선정되었던 수원 선수로는 샤샤, 서정원, 데니스, 신홍기, 이운재가 있었다. 2000 시즌에도 경기에 나올 때마다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특히 해당 시즌에 산드로가 합류하면서 기존에 팀에 있던 데니스와 함께 지금까지도 수원 올드팬들에게 회상되는 전설적인 고데로 트리오를 형성되게 된다. 5월 17일에 열린 울산과의 경기에서는 고종수 혼자 2골 1도움을 기록하면서 팀의 3대1 역전승을 이끌기도 하였다. 하지만 크고 작은 부상과 시즌 중간에 시드니 올림픽 남자 축구 대표팀에 차출되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인해 2000시즌에는 8경기밖에 출전하지 못하였다. 근데 8경기에 나와서 4골 3도움을 기록한건 함정....

2000 시즌이 끝난 뒤에는 한일월드컵 홍보를 위해 개최된 한일올스타와 세계올스타6  간의 친선경기에 출전하여 파라과이의 전설적인 골키퍼 칠라베르트가 반응도 하지 못한 프리킥 골을 성공시키기도 하였다. 칠라베르트도 경기 후에 고종수의 프리킥을 칭찬하였다. 관련 기사

바로 직전 시즌에는 수원 경기에 거의 못나온 고종수였지만, 2001 시즌에는 시즌 초반부터 경기에 지속적으로 출전하여 여전히 훌륭한 플레이를 보여줬다. 특히 3월에는 아시안 클럽 챔피언십7 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어 AFC가 선정한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또한 5월 2일 안양LG치타스와의 리그컵 경기에서 결승골을 득점, 팀의 1대0 승리에 일조하여 20-20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록은 현재까지도 K리그 최연소 및 최소경기 출장으로 탄생한 20-20 클럽 가입으로 기록되어있다.

고데로 트리오가 모두 득점하여 팀의 3대2 역전승을 이끌었던 01시즌 7월 15일 부산전

하지만 한참 잘나가던 고종수를 단한번에 추락시켜버린 커리어 최대의 위기가 찾아온다. 그것은 바로 시즌 중반 경기 중에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시즌아웃을 당한 것이다. 장기 부상도 부상이었지만 이것이 고종수에게 더욱 치명적이었던 이유는 이 부상이 완치되기까지 약 1년이나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고, 그렇게 되면 다음해에 개최되는 한일월드컵에 낙마할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89   그전까지 히딩크 당시 대표팀 감독에게 꽤나 중용을 받아왔던 그였기에 더욱 안타까웠던 상황. 결국 고종수는 01시즌을 20경기 10골 6도움으로 조기마감하였고, 다음 해에 발생한 한일월드컵 4강 신화를 그저 TV로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고종수는 긴 재활 끝에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인 2002 시즌 중반에야 수원에 복귀할 수 있었다. 9월 4일 매북과의 경기에서는 서정원의 선제골을 어시스트하더니, 경기 종료 직전에는 57m짜리 장거리 골을 성공시켜 팀의 2대1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이 경기 덕분에 고종수는 30-30 클럽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K리그 사상 최단 경기 30-30클럽 가입(114경기)으로 기록되어있다. 또한 고종수의 이 장거리 골은 당시에 종전 K리그 최다길이 장거리골이었던 1999시즌 울산 김종건의 기록(54m)을 뛰어넘는 기록이었다. 현재 이 골은 역대 K리그 장거리골 5위에 랭크되어 있다.10 

하지만 이와 같은 기록을 세운 것과는 별개로 고종수의 폼은 부상 직전에 비해 확실히 떨어져있었다. 아무래도 1년이나 경기를 못 뛰었던 것이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02시즌 중반에 복귀하여 20경기 4골 3도움이라는 스탯을 기록하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선발이 아닌 교체출전이었고 무엇보다도 경기력이 부상 전의 그 고종수보다 확연히 떨어진 모습이었다. 02시즌 이후 수원과의 계약이 만료된 고종수는 이미 수원에서 주전에 밀린 상황이었으니 새로운 팀을 모색하였고, 때마침 J2리그 소속의 교토 퍼플 상가가 고종수에게 입단을 제안하게 된다. 하지만 수원 측이 FA 선수의 이적에도 이적료가 발생한다는 국내 룰을 근거로 하여 이적 거부권을 행사하였고, 고종수는 이에 반발하여 구단과 합의없이 교토 퍼플 상가의 훈련 캠프에 합류해버리는 등 수원과 고종수 사이에서 분쟁이 발생해버린다. 결국 수원 측과 고종수가 우여곡절 끝에 합의를 보면서 분쟁은 일단락되었고, 이렇게 고종수는 커리어 처음으로 수원과 K리그를 떠나게 된다.

이렇게 2003 시즌에 일본에서 뛰게 된 고종수였지만, 일본에서의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교토의 감독은 한일월드컵 당시 한국국대의 수석코치를 지내기도 했던 핌 베어벡이었는데, 베어벡은 고종수를 2선이 아닌 스트라이커로 기용하려고 했고 이에 고종수가 반발하면서 베어벡과의 갈등이 깊어졌다. 결국 고종수는 반년만에 교토에서 방출되었고 이후에도 남은 반년동안 수원과 복잡한 계약문제때문에 복귀협상이 쉽게 끝나지 않아 사실상 무직 상태로 2003시즌을 보냈다. 당시 수원과 고종수 간 분쟁의 핵심은 고종수의 일본 진출이 완전이적 형식이었는지, 아니면 수원에서의 임대 형식이었는지의 여부였다. 자세한 사항은 다음 기사 참조. 당시 분쟁을 설명한 기사 이렇게 속절없이 시간만 보내고 맞이했던 2004년 초, 북패11 가 고종수와 계약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수원에서 코치직을 수행하며 고종수와 연을 맺은 적이 있었던 조광래 당시 북패 감독12 이 고종수에게 적극적으로 러브콜을 보냈고, 곧이어 고종수와의 개인 합의까지 마쳐버렸던 것. 만약 고종수의 일본 진출이 완전이적 형식이었다는 결론이 나오면 고종수는 그대로 북패 선수가 되어버리는 최악의 사태에 이를 수도 있었다. 이에 수원은 고종수는 수원 소속이라는 입장을 고수하면서 두 팀간의 입장차가 팽팽하게 맞서고 있던 상황이었다.다음 기사도 이 상황을 이해하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해당 기사

이 상황은 리그 선수등록일 직전까지 지속되었고, 자칫 잘못하여 등록일 전까지 이 문제가 해결이 안되면 고종수는 계속 무직 상태로 지내야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조광래가 고종수의 선수생활을 막으면서까지 영입하고싶지는 않다는 뜻을 밝히게 되고, 맘이 급해진 고종수 측도 일본 진출이 임대 형식이었다는 것을 사실상 수용함으로써 등록일 직전 극적으로 수원에 복귀하게 된다. 아마도 당시 고종수는 일본 진출때부터 이어진 수원과의 긴 분쟁으로 인해 수원에게 많이 맘이 상했던 것 같고, 이러한 상황에서 옛 스승이었던 조광래의 부름을 받자 수원팬들의 분노를 감안하더라도 조광래의 품으로 가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고종수의 선수시절 에이전트가 곽희대13 였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중간에 그의 농간도 있었을꺼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아무튼 우리에겐 다행히도 북패와는 달리 팀의 레전드를 라이벌 팀에게 뺏기는 흑역사가 생기지는 않았다.... 또한 이 파동 덕분에 FA선수의 이적 시에도 원 소속팀에게 이적료가 발생한다는 국내 룰은 국내팀간의 이적시에만 적용시키고 해외 진출시에는 적용시키지 않기로 국내 룰이 바뀌게 된다.

이러한 한 차례 홍역 끝에 2004 시즌 수원에 복귀한 그였지만, 수원에서 그의 자리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04시즌은 김호 체재에서 차범근 체재로 넘어간 첫 시즌이었고, 고종수 본인의 잦은 부상과 차범근과의 갈등으로 인해 예전의 전성기 때와 달리 그의 입지는 굉장히 좁았다. 수원으로 복귀하기까지의 맘고생, 그리고 새 감독과의 갈등으로 인해 멘붕이 왔던건지 고종수는 맘을 다잡지 못하면서 부상 재활도 게을리하였고 훈련에도 자주 불참하는 등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며 팀분위기만 저하시키는 선수가 되어버렸다. 결국 이를 보다못한 구단은 10월 고종수에게 임의탈퇴를 때려버리기에 이른다. 그는 04시즌에 5경기 출전에 그쳤고, 이마저도 모두 교체 출전이었다. 결국 고종수는 2005시즌 시작 전 조병국과 함께 당시 전남 소속이었던 김남일과 트레이드되어 창단때부터 함께해온 수원과 씁쓸한 이별을 하게된다. 북패 이적 소동과 직전 시즌 보였던 실망스러운 모습에도 불구하고 당시 이 트레이드에 대한 수원 올드팬들의 반발이 꽤나 심했던 것을 보면 고종수가 수원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선수였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 이 시기 수원 삼성 10주년을 기념하여 진행된 역대 베스트일레븐 팬투표에도 당당히 선정되었던 고종수였다. 수원에서의 총 스탯은 130경기 33골 32도움. 2015년 수원 삼성 20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이 뽑은 역대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이와 동시에 발표된 구단 선정 공식 레전드로도 뽑히며 구단 역사상 최고의 프렌차이즈 스타로 인정받게된다.

전남 드래곤즈 시절 & 대전 시티즌 시절[원본 편집]

김남일과 트레이드되어 2005시즌에는 전남 드래곤즈에서 뛰었으나 최근 몇 년간 그의 발목을 잡아온 부상 때문에 별 활약을 하지는 못하면서 16경기 2골에 그쳤다.14  기대 이하의 활약에 결국 시즌 종료 후 전남과의 재계약에 실패하였고, 이후 1년을 팀을 구하지 못한채 무직 신세로 지내야했다.

1년을 쉬게된 고종수는 2007시즌 대전 시티즌에 입단하면서 커리어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시즌 시작 직전 다시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며 시즌 중반까지 경기에 나서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시즌 중반 자신의 수원시절 은사였던 김호가 대전의 새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고종수도 조금씩 살아나는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그는 재활을 마친 뒤 시즌 중반부터 출전하였는데, 11경기에 출전하여 1골 1도움을 기록하고 경기력 면에서도 많이 향상된 모습을 보여주면서 약체였던 대전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 때까지만 해도 고종수는 다시 살아나는 듯 보였다. 2008 시즌에는 팀에 온지 두 시즌만에 주장으로 임명되면서 큰 기대를 받았지만, 연봉협상 과정에서 대전 측이 고종수를 우선협상 대상에서 제외하는 등 푸대접을 하자 고종수가 이에 불만을 표하면서 선수단을 무단 이탈하면서 또다시 구설수에 오르게 된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08 시즌에도 고종수는 대전 선수로 뛰게 된다.

여담으로 5월 18일 북패와의 경기에서 동점골을 넣은 뒤 세러머니를 하다가 다리에 쥐가 난 적이 있었는데....

한 기자의 어이없는 오타와 그 오타에 걸맞게 특정 부분이 부담스럽게 튀어나온 사진 덕분에(....) 해당 세러머니는 네티즌들 사이에서 'X레머니'라 불리우며 굉장한 유명세를 탔다.... 문제는 이것이 와전되어 이 세러머니로 입은 부상 때문에 고종수가 현역을 은퇴했다는 헛소문까지 펴져 있다는 것. 이 세러머니로 인해 고종수는 쥐가 났던 것 뿐이고 그의 현역 은퇴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이 팩트이다. 또한 이 세러머니는 고종수가 옛날부터 덤블링과 함께 즐겨하던 세러머니였는데, 그닥 멋있지 않은 이유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게 되었으니 고종수 입장에선 그리 달갑진 않을꺼같다.... 시즌 중반에는 부상 치료 과정을 놓고 다시 대전 구단과 마찰이 생기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이렇듯 고종수는 08시즌 내내 대전과 갈등관계에 놓여있었고, 해당 시즌을 13경기 1골15  1도움이라는 스탯으로 마친 뒤 김호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2009년 2월 6일 한국나이 32살이라는 꽤나 이른 나이에 현역 은퇴를 선언하였다. 이 은퇴에 대해 대전팬들은 구단이랑 시즌 내내 불협화음만 내면서 팀 분위기만 저하시키다가 도망치듯 은퇴했다면서 고종수에 대해 그렇게 좋게 보지 않고 있다. 그리고 둘 간의 악연은 먼 훗날 고종수가 대전 감독으로 취임했을때까지 이어지게 된다.... 아무튼 이렇게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풍운아 고종수는 프로 통산 171경기 37골 34도움이라는 기록을 남기고 축구화를 벗게 되었다.

국가대표 경력[원본 편집]

수원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1997년부터 차범근 당시 대표팀 감독16 의 눈에 들어 만 18세라는 어린 나이에 국대에 발탁되기 시작하였고, 그해 1월 18일 노르웨이와의 경기를 통해 국대 데뷔전을 치뤘다. 그리고 국대로서의 세번째 경기였던 1월 25일 뉴질랜드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골을 기록하면서 한국의 3대1 승리에 일조하였는데, 이 골은 지금까지도 한국국대 사상 최연소 A매치 데뷔골(만 18세 87일)로 기록되어있다.17  이 뒤에도 고종수는 국대에 창의성을 불어넣어줄 선수를 원하던 차범근의 중용을 받으면서 국대경기에 꾸준히 출전하였다. 1998년 1월 29일 태국과의 킹스컵18  경기에서 자신의 A매치 두번째 골을 넣으며 한국의 2대0 승리를 이끌기도 하였다. 이렇듯 어린나이부터 국대에 자리를 잡게된 고종수는 1998년 프랑스월드컵 엔트리에도 들면서 수원삼성 창단 이후 수원 소속으로 월드컵에 나서는 첫 선수가 되었다. 고종수는 한국의 조별예선 세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는데,19  특히 1차전인 멕시코전에서 한국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홀로 고군분투하면서 한국의 조별예선 탈락에도 월드컵 이후 국내에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된다. 이 기세를 몰아 고종수는 위에서도 언급했다시피 역시 프랑스월드컵에서 인상깊은 모습을 남겼던 매동국, 그리고 프로데뷔시즌이었던 1998시즌부터 엄청난 실력과 외모를 자랑하던 안정환20 과 함께 K리그 트로이카로써 리그 관중몰이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게 축구스타가 되었던 고종수였지만 프랑스월드컵 직후에는 한동안 국대에 발탁되지 못하기도 하였는데, 그 첫번째 이유는 크고 작은 부상 때문이었고 두번째 이유는 차범근의 후임으로 국대감독을 맡았던 허정무가 축구외적인 구설수가 많았던 고종수를 탐탁치 않게 여겨 그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정무의 이러한 결정은 당시 국민들 사이에서 많은 찬반논란을 낳았었다. 결국 고종수는 프랑스월드컵 이후 약 1년뒤인 1999년 6월 5일 벨기에와 친선전에서야 국대경기에 다시 나설 수 있었고, 고종수는 이 경기에서 자신의 세번째 A매치 골을 성공시키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하지만 한국은 이 골에도 불구하고 1대2로 패하였다. 2000년은 시드니 올림픽이 열렸던 해인데, 당시 부상으로 컨디션 난조를 보이던 고종수를21  올림픽 남자 축구 대표로 발탁할지에 대해서 찬반여론이 팽팽히 맞서기도 하였다. 결국 허정무는 고종수를 발탁하였고, 이렇게 그는 그해 9월에 열렸던 시드니 올림픽의 남자 축구 대표팀으로 나서며 조별예선경기 세경기에 모두 출전하였다. 하지만 올림픽 대표팀은 2승 1패라는 조별예선 성적에도 불구하고 골득실에 밀려 토너먼트 진출에 실패하였다. 그리고 고종수 또한 올림픽 직후 10월에 열렸던 아시안컵에는 결국 부상으로 인해 엔트리에서 탈락하게 된다. 아시안컵 우승 실패의 책임을 지고 허정무가 사퇴하고, 그 뒤 2001년 히딩크가 국대감독으로 부임하게 된다. 히딩크 부임 이후 고종수는 그의 중용을 받으며 자신이 출전했던 1월 24일 노르웨이전과 27일 파라과이전, 그리고 2월 11일 UAE전에서 세경기 연속골을 넣으면서 히딩크의 확실한 눈도장을 받게된다. 특히 파라과이전 동점골은 AFC 이달의 골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근데 정작 이 세경기 중 파라과이전만 영상 못찾겠는건 함정....

1월 24일 노르웨이전에서의 고종수 활약상.22 

2월 11일 UAE전 골모음 영상. 23 

히딩크는 국대 주전이 되려면 고종수처럼만 하라면서 그를 극찬한 적도 있었다.

고종수는 그 뒤 한일월드컵 전 한일 양국에서 개최된 컨페더레이션스컵에도 참가하여 5월 30일 프랑스전과 6월 1일 멕시코전에도 출전하였다. 이렇게 별 무리없이 한일월드컵에 출전할 것으로 기대받던 그였지만.... 위에서 언급했던 2001시즌 십자인대 파열로 인해 1년동안 재활에 힘써야했고, 결국 이로 인해 한일월드컵 엔트리에서 낙마하게 된다. 히딩크의 중용을 받던 그였기에 더욱 안타까웠던 상황. 히딩크는 월드컵 엔트리를 발표하면서 불운하게 엔트리에서 탈락하게 된 고종수에게 애정어린 충고를 건내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부상에서 회복한 고종수였지만 위에서 서술했다시피 장기부상의 여파로 인한 폼 저하와 수원과의 이적분쟁 등 축구외적인 문제들로 인해 축구에 온전히 집중할 수 없었던 그였고, 결국 더 이상 대표팀 유니폼을 입지 못하게 되었다. 그의 A매치 총 기록은 38경기 6골.

지도자 경력[원본 편집]

수원 삼성 블루윙즈 코치진 시절[원본 편집]

현역 은퇴 이후에는 지도자 자격증 취득을 위한 공부를 시작하였다. 2010년 창단을 앞둔 광주 FC로부터 코치직 제안을 받기도 했으나 본인은 아직 코치직 경험이 없으니 유소년팀부터 맡고 싶다며 고사한 적이 있었다. 그 뒤 다음해인 2011년 매탄고 코치로 부임하면서 2005년 수원을 떠난 이후 6년만에 수원과의 인연을 다시 맺게 된다. 그리고 반년만인 그 해 6월 노경환 수석코치가 사임하자 1군 코치진에 공백이 생긴 윤성효의 부름을 받고 1군 트레이너로 합류하였다. 2011시즌 10월 19일 알 사드와의 아챔 4강 1차전에서 알사드 선수가 그 유명한 비매너 골을 넣은 뒤 알사드 감독이 수원 벤치를 향해 도발을 시전하였고, 이에 격분한 고종수가 그에게 거세게 항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 뒤 벌어졌던 난투극에도 참전하여 알사드 선수 한명을 흠씬 두둘겨 패주었다.... 물론 폭력 자체는 잘못된 행동이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던만큼24  수원팬들은 속시원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고종수는 이로 인해 아챔 6경기 출장정지라는 중징계를 받았다. 2013 시즌 서정원 체재로 바뀐 이후에는 1군 코치로 정식 임명되었고, 2015시즌에는 염기훈에게 킥 특훈을 가르쳐 염기훈의 킥이 더욱 정교해지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2017 시즌부터는 스카우터와 R리그팀을 동시에 전담하기도 하였다. 17시즌이 끝난 뒤에는 새로 영입할 브라질 선수를 찾기 위해 브라질로 출장을 떠났었는데....

대전 시티즌 감독 시절[원본 편집]

브라질로 출장을 가있던 중 대전 시티즌의 대표 이사이자 옛 스승인 김호의 급한 부름을 받고 2018시즌부터 대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자신의 첫 감독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 이 소식은 꽤나 뜬금포였는데, 옛 스승의 부탁이기도 하고 수원과의 코치직 계약도 2017년을 끝으로 만료되던 상황이라 감독직을 수락했던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고종수가 수원을 떠나기 전 브라질에서 스카우트해 온 선수는 크리스토밤이었고, 이 영입은 결국 실패한 영입이 되고 말았다....

이렇게 2009년 선수시절 대전에서 현역 은퇴를 선언한 뒤 9년만에 감독으로 다시 대전에 돌아온 고종수였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대전과 워낙 안좋게 끝났던 그였기에 대전팬들은 거센 반감을 보였다. 더군다나 김호도 고종수를 지도했던 대전 감독 시절, 워낙 대전에 개판을 쳐놨던 이력(?)이 있기에 구단 수뇌부와 코치진을 보는 대전팬들의 시선은 고을 수가 없다. 사실 김호가 원래 감독으로 선임하려했던 사람은 고종수가 아닌 이기범이었는데, 이기범도 선수시절 2000시즌에 잠깐 김호의 지도 아래 수원 삼성에서 뛰었던 경력과 선수 은퇴 이후 김호가 총감독으로 있었던 용인시축구센터에서 코칭스텝진을 맡는 등 김호의 최측근 중 한명이었기에 대전팬들이 사실상 바지감독이라고 주장하며 거세게 반대하였고, 이로 인해 결국 이기범은 1군이 아닌 2군 감독을 맡는 것으로 하고 1군 감독으로 고종수를 선임했던 것이다. 하지만 둘다 김호의 애제자라는 점과 프로축구팀 감독 경험이 없다는 점에서 대전팬들 입장에선 이기범이든 고종수이든 다른 것이 없었고, 결국 분노한 일부 대전 강성팬들은 '대전 시티즌 정상화 추진 위원회'까지 결성하여 구단의 운영방식에 거세게 항의하기까지 이른다. [현 상황을] [보여주는 기사들]

고종수 감독 선임 당시 대전팬들의 생각을 잘 보여주는 사진. 뭐 '수원 레전드'가 틀린 말은 아니다....25 

고종수는 감독 부임 후 역시 수원의 레전드인 김진우를 수석코치로 임명하면서 감독으로서 자신의 첫 시즌인 18시즌을 시작하였다. 고종수는 3월 3일 부천FC와의 경기를 치르며 자신의 감독 데뷔전을 가졌지만 1대2로 패하였다. 바로 다음 경기였던 11일 안산 그리너스와의 경기에서는 안산이 2명이나 퇴장당했음에도 불구하고 2대3이라는 충격적인 역전패를 기록, 대전팬들에게 큰 비난을 받았다. 그 다음 경기인 18일 서울 이랜드와의 경기에서는 1대0으로 승리하면서 감독으로서 첫 승리를 따내기는 했지만, 경기력 자체는 여전히 졸전이었고 대전팬들의 여론은 바뀌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대전이 승리를 따내는 경기가 많아지기 시작하였고, 특히 시즌 중반 이후로는 급격히 페이스를 타면서 8, 9월에는 두달 연속으로 K리그2 이 달의 감독에 선정되는 등 점차 성과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26  결국 18시즌을 4위로 마친 대전은 승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대전을 승강플옵에 올려놓은 고종수는 11월 28일날 펼쳐진 광주FC와의 준플레이오프를 앞두고 결혼식을 올리며 대전팬들 사이에서 잠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지만,27  결과적으로 해당 경기를 1대0으로 승리하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는데에 성공한다. 하지만 12월 1일날 가진 부산 아이파크와의 플옵경기에서는 0대3으로 패하며 K리그1 승격에는 실패하게 된다. 비록 승격에는 실패하였지만, 대전팬들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내자 대전팬들 사이에서는 잠시나마 고종수에 대한 긍정적인 시선이 생기기도. 또한 이 성과를 인정받아 2018 K리그2 올해의 감독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였다.28 하지만 일각에서는 K리그1의 대구와 매남보다도 많은 예산을 가지고 K리그2 4위를 기록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이냐는 의견도 있었다. <고종수 감독의 18시즌 성적>

• K리그2: 승점 53점으로 4위 (36경기 15승 8무 13패)

• 승격플옵: 준플옵 광주전 1대0 승리, 플옵 부산전 0대3 패배

• FA컵: 3라운드에서 성남에게 탈락 (0대1)

어찌되었던 나쁘지는 않은 성적으로 자신의 감독 커리어 첫시즌을 마친 고종수였으나, 2019시즌을 준비하는 프리시즌 기간인 1월부터 신인선수 공개테스트 불법행위에 연류되면서 그의 감독 커리어가 점차 삐걱거리게 된다(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조).29  더군다나 대전 코치진들이 리그 벤치에 앉을 수 있는 자격증인 1급 이상의 지도자 자격증을 획득하지 못하면서, 해당 시즌에는 대전의 벤치에 고종수와 외국인 피지컬코치 둘만 있는 촌극을 빚기도....30  이렇게 시즌 시작 전부터 팀의 분위기가 어수선해지자 경기력도 당연히 좋을 수가 없었는데, 특히 3월 27일날 열린 단국대와의 FA컵 3라운드 경기에서 승부차기 끝에 패하는 대굴욕을 겪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고종수는 뻔한 전술과 사실상 없다시피하는 전술적 유연성, 그리고 매경기마다 거의 똑같다 봐도 무방한 선수교체만 보이며 감독으로서의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하였고, 이는 리그에서의 부진으로 이어지게 된다. 특히 5월 5일 어린이날에 열린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에서는 0대5로 대패하며 대전팬들의 맹비난을 받기도. 당시 대전이 개막 이후 리그 12경기에서 단 9골을 득점하는 극악의 빈공을 선보인 K리그2 최소 득점팀이었다는 사실은 이 팀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결국 고종수는 성적 부진과 밑에서 후술할 사건의 여파로 인해 5월 21일 대전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선수 시절과 마찬가지로 감독으로서도 대전과는 영 좋지 못한 이별을 하고 말았던 고종수였다. <고종수 감독의 19시즌 성적>

• K리그2(경질 전): 승점 12점으로 당시 9위31  (12경기 3승 3무 6패)

• FA컵: 3라운드에서 단국대에게 탈락 (2대2 무승부, 승부차기에서 3대4 패배) 이렇듯 고종수의 첫 감독직은 성공적이었다고는 보기 힘들다. 사실 18시즌 중반부터는 팀의 조직력과 압박이 좋아진 모습을 보이며 일말의 기대감을 갖게 만들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종수의 대전은 19시즌에 완전히 무너져버렸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경기에 코치진이 참가할 수 없는 병크짓이 가장 컸던 것으로 보인다. 사실 고종수는 수원에서 잠시 코치직을 지낸 경험만 있었지, 감독직은 처음인 초보감독이었다. 이렇게 경험이 부족한 감독이 경기 중 코치진들과 상의도 못한 채 독단적인 결정을 내려야했는데, 이는 감독 고종수의 능력 밖으로 벗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 일은 사전에 이에 대해 미리 확인을 하지 못한 고종수의 책임도 피하기는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결국 고종수의 대전 감독직은 경기내외적으로 그가 아직 감독으로서는 많이 부족하다는 사실만 확인시켜준 자리였다고 볼 수 있다. <고종수 감독의 대전에서의 총 전적>

• 통산: 52경기 19승 12무 21패 (승률 약 36%)

 K리그2: 48경기 18승 11무 19패 (승률 약 37%) • 승격플옵: 2경기 1승 1패

• FA컵: 2경기 1무32  1패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능력도 능력이지만 밑에 후술할 사건 때문에 고종수의 감독 커리어는 현재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인데....

2.1. 대전 신인 선수 공개테스트 불법 행위 논란[원본 편집]

2019년 1월, 대전 측에서 2018년 12월에 진행했던 신인선수 공개테스트에서 점수조작이 있었다는 의혹보도가 올라왔다. 테스트에서 높은 점수를 받고도 선발되지 못한 선수가 두명이나 된다는 것. 이에 대전시는 경찰 측에 수사를 의뢰하기에 이른다. 관련 기사 이 사건의 배후로는 김호 대표이사가 강한 의심을 받았는데 그 이유로는 김호가 대전의 대표이사로 부임한 후 대전의 선수단을 50명 이상으로 꾸리는(....) 기이한 행보를 보였고, 이 이해하기 힘든 영입의 배경에는 특정 에이전트와의 유착관계가 있다는 의혹을 이미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경찰은 2월, 고종수를 비롯한 대전 코치진들과 몇몇 프런트 직원들을 참고인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는데 이 과정에서 고종수와 코치 한명을 입건하여 피의자 신분으로 전환한 뒤 수사를 진행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김호에 대한 대전팬들의 비난이 거세지자, 김호는 3월에 결국 대표이사직을 사임하였고33  이후 경찰에 참고인 신분으로 소환되어 조사를 받았다. 김호는 경찰 조사에서 언론을 통해 점수조작 사실을 알았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이렇게 수사가 진행되던 중 5월에 사건과 관련하여 새 보도가 올라왔는데, 그것은 바로 대전의 한 유력 정치인이 고종수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특정 선수를 추천했다는 내용이었다. 실제로 해당 선수는 2차 테스트를 통과하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해당 정치인은 구단이 좋은팀으로 성장하기 바라는 마음에서 좋은 선수를 추천해준게 무슨 죄가 되냐는 개소리를 시전하기도.... 관련 기사 이후 후속보도를 통해 해당 정치인이 김종천 대전시의회 의장이라는 것도 드러났다. 경찰은 김종천도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하여 조사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관련 기사 이 사건은 결국 19시즌 대전의 부진과 맞물려 고종수 경질의 결정타가 되어버린 사건이다. 최악의 경우, 고종수의 혐의가 인정된다면 앞으로 그의 지도자 커리어는 장담할 수 없을수도 있는 상황. 다만, 지금 수사가 진행중에 있으니 섣부른 판단은 아직 금물이다. 이 역대급 병크짓을 지켜보며 속을 썩히고 있는 대전팬들은 이제라도 팀을 제대로 쇄신시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상황이다. 한편, 이 사건으로 인한 고종수 경질에 대해 대전 구단의 꼬리 자르기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고종수는 일방적인 통보만 받았을 뿐인데 대전 구단이 그의 경질을 통해 사건을 무마하려한다는 것이 그 내용. 현재로서는 경찰 수사 결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는 것 외에는 딱히 다른 방도가 없어보인다. 관련 기사

플레이 스타일[원본 편집]

팀 공격에 창의성을 불어넣는 플레이메이커였다. 위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최연소'나 '최단기간' 등의 수식어가 붙은 기록을 다수 보유하고 있을 정도로 역대급의 재능을 가지고 있던 선수였다. 정확한 볼 배급과 크로스, 뛰어난 테크닉, 준수한 스피드, 그리고 몇 수 앞을 내다보며 경기의 흐름을 읽던 시야는 그를 한국축구 역사상 최고의 플레이메이커 중 한명으로 올려놓았다. 슈팅 또한 훌륭했기 때문에 찬스메이킹 못지 않게 골도 곧잘 넣었던 선수. 그리고 고종수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왼발 킥력인데 이 때문에 소속팀이든 국대에서든 전담 키커를 도맡았고, 특히 멋있는 프리킥 골을 다수 넣었던 그였다. 페널티 아크 바로 오른쪽은 당시 K리그 팬들 사이에서 '고종수 존'이라고 불렸을 정도로 엄청난 프리킥 성공률을 자랑하던 선수가 바로 고종수였다. 다만 고종수가 (어디까지나)'재능에 비해서는' 기대만큼의 대성을 못한 것이 사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96시즌에 프로데뷔를 하여 엄청난 모습을 보여줬던 그였지만, 그의 전성기는 01시즌 중반 십자인대 파열 부상을 당하기 전까지라 할 수 있다. 즉, 불운한 장기 부상으로 인해 기량이 더욱 더 만개했어야 할 20대 중반부터 그의 커리어는 점차 내리막길을 걷게 되고 결국 이는 고종수의 이른 현역 은퇴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리하자면 고종수는 조지 베스트나 폴 개스코인 등과 같이 전성기 자체는 길지 않았으나, 자신의 재능을 이용한 젊은 시절의 임팩트로 인해 후세에도 계속해서 회자되는 '비운의 천재' 유형의 선수였다고 할 수 있다. 십자인대 파열만 아니었으면 이보다 훨씬 큰 족적을 남길 수 있는 선수였기에 부상이 두고두고 안타까운 선수.

플레이 영상[원본 편집]

스포츠 스타로서 고종수의 위상, 그리고 언론과의 트러블[원본 편집]

위에서도 계속 언급했다시피 고종수는 프랑스월드컵 이후 안정환, 매동국과 더불어 K리그 내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선수 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 말을 현재 K리그의 현실에 대입하여 그냥 소수의 리그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정도라고 이해하면 곤란하다. 당시 이 셋은 리그팬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정말 말 그대로 전국구급 스타였으며, 이들이 관중몰이를 하던 98년부터 2002년 한일월드컵때까지의 기간동안 열렸던 K리그는 지금까지도 리그의 전성기였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관중 수 면에서 큰 흥행을 이루던 시기였다. 이 때의 고종수는 경기장에서뿐만 아니라 방송, CF 등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었는데, 현역 축구스타가 축구외적인 연예활동을 병행하는 것은 지금이야 너무나도 익숙하지만 당시 국내에서는 굉장히 이색적인 행보였다. 이러한 행보는 팬들에게 색다른 팬서비스를 하고싶다는 고종수 본인의 의지와 그의 유명세를 적극적으로 마케팅에 썼던 수원 삼성 간의 손발이 잘 맞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시 트로이카의 인기를 엿볼 수 있는 기사 십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연예잡지에서도 취재를 할 정도로 고종수의 인기는 대단했었다.

이 때 고종수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직접 본인의 입을 통해 알아보자 또한 가수 홍경민의 98년도 곡인 '내 남은 사랑을 위해'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한 적도 있었다. 당시 무명이었던 홍경민을 띄우기 위해 소속사 측에서 뮤비에 축구스타를 출연시키길 원했었고, 이에 따라 고종수가 섭외되면서 뮤비의 주인공으로 출연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고종수가 나온 이 뮤비 덕분에 홍경민의 인지도도 올라가게 되었다. 아래 뮤비를 보면 알겠지만 고종수가 특정 배역으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고종수 본인 역으로 나왔으니 당시 그의 인지도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는 부분. 참고로 상대 여배우는 당시엔 무명신인이었던 김정은이다.

같은해 말, 당시 인기리에 방영했던 MBC시트콤 '남자셋 여자셋'에 특별출연하기도 하였다. 당시 무명이었던 소지섭의 친구로 출연하여 신동엽의 여친에게 반해 여친을 뺏으려는 역할이었는데, 고종수 특유의 어눌한 발음과 해맑은 표정을 볼 수 있다. 물론 90년대 특유의 감성은 각오하고 봐야 한다.... 해당 회차 2000년에는 11월에 발매되었던 축구 비디오게임 '피파 2001'의 한국 정발판 표지 모델로 나서기도 하였다.34  당대 최고의 축구스타들만 할 수 있는 축구게임 모델이었으니 그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는지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례이다.

하지만 고종수는 특유의 말투와 숨기는 것 없이 자신이 생각하고 느낀걸 가감없이 말하는 스타일로 인해 현역 시절 내내 언론의 타겟이 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그의 성향이 당시 젊은층에게 많이 어필된 것도 사실이지만, 이로 인해 언론과의 원만한 관계 형성에는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당시 기레기들의 수준은 요즘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진 않았기 때문에 고종수는 이 인간들 때문에 꽤나 고생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리니지 폐인 루머. 이 사건의 발단은 여가시간에 주로 뭘 하냐는 한 기레기의 질문에 고종수가 스타크래프트1과 리니지를 한다고 말한 것을 기레기가 고종수는 리니지에 중독되었다고 부풀려서 기사를 썼고, 이것이 점점 커져 나중에는 고종수가 수원 구단에게 연봉을 리니지 내 게임머니로 지급하라고 요구했다는 지경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완벽한 헛소리였다.

이것 외에도 기레기와 유명세 때문에 고종수가 겪었던 고충은 다음 기사에서 읽어볼 수 있다. 해당 기사 2003년에는 당시 최고 인기를 구사하던 가수 조성모와 술자리에서 싸움이 붙을 뻔했다는 기사가 뜨기도 했었다. 그런데 문제는 기사에 의하면 먼저 주먹을 휘두른 것은 조성모였고, 고종수는 일이 커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는데 당시에 욕은 오히려 고종수가 더 많이 먹었었다.... 이미 그동안의 악성 기사들로 인해 이미지가 상당히 안 좋아진 고종수였고, 거기다가 이 기사가 나왔던 2003년은 고종수가 J리그에서 실패한 뒤 수원과 한참 이적분쟁을 겪고 있던 상황이었기에 고종수가 억울하게 욕을 더 먹었던 걸로 보인다. 그리고 훗날 본인이 해명하기를 당시 주변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분위기 때문에 조성모와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주먹으로 살짝 툭툭 치는 등 남자들끼리 흔히 하는 장난끼 있는 액션을 했던 것 뿐인데, 다음날 기사가 그따구로 나왔던거라고 밝혔다.... 이 역시 기레기들의 소행이었던 것. 물론 고종수가 현역 시절 아예 사고를 안 쳤던 것은 아니다. 위에서도 서술했다시피 한때 부상 재활을 게을리하고 훈련에도 불성실하게 임했던 적이 있었고, 이로 인해 04시즌 수원 구단으로부터 임의탈퇴를 받았던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당시의 유명세 때문에 주변에 연예인이나 그의 유명세를 보고 들러붙었던 사람들이 많아서 축구에 온전히 집중하지 못했었다고 고종수 본인이 훗날 직접 밝히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레기들이 그에 대해 어이없는 악성 기사를 지속해서 써왔던 것은 사실이고, 이것이 쌓여 그가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맘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하게 되는데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여겨지는 바이다. 고종수의 짧은 전성기에 대해서 당시 기레기들도 책임을 면하기는 힘들 것이다.

이야깃거리[원본 편집]

• 현역 시절에는 발음이 꽤나 어눌했었다. 현재는 나이를 먹으면서 많이 나아졌다. • 현역 시절, 유명인의 첫사랑이나 은사, 동창 등등을 찾아주는 KBS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한 적이 있다. 고종수의 초등학생 시절 첫사랑 사연을 볼 수 있다. 90년대 특유의 연출은 각오하고 보시길...

• 2011년 수원 트레이너 재직 당시 염기훈과 프리킥 내기를 하여 이겨버리는 위엄을 보인 적이 있다. 고종수는 수원 코치진 시절에 이 외에도 선수들을 자극시키기 위해 종종 프리킥 내기를 제안했고, 대부분을 이겼다고 한다....

위로부터 시간이 한참 지난 2018년에는 대전 시티즌의 감독으로서 슛포러브에 출연하여 자신의 제자인 황인범과 프리킥 대결을 펼치기도 하였다. 근데 사실 이 대결은 고종수 몰래카메라였는데, 고종수가 차는 공만 진짜 선수들이 차는 공이고 황인범이 차는 공은 무회전과 낙차가 더 걸린다는 헬륨공이었던 것.35  하지만 이런 조건에도 불구하고 고종수는 현역인 황인범을 이겨버리는 위엄을 보인 바 있다....

• 2012년 당시 수원 서포터즈였던 '그랑블루'의 응원음반 3집에 참여하여 '수원의 레전드가 되는 법'이라는 노래를 녹음했었다. 노래를 아예 못 부르지는 않는다.

• 2017년 수원 스카우터 재직 당시 수원삼성 팬즈데이때 한 어린 팬에게 '오다 주웠다'를 시전하는 츤츤함을 보이기도 했었다... 글 링크 • 고종수와 같이 K리그 트로이카였던 안정환과 이동국이 20대에 결혼한 것에 반해 고종수는 늦게까지 싱글이었으나, 2018년 11월 24일 드디어 결혼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 결혼에 대해 대전 팬들 사이에서는 말이 좀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결혼날로부터 4일 뒤인 28일에 대전의 K리그1 승격 플레이오프 경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대전 선수들은 통영에서 전지훈련을 했는데 고종수의 결혼식은 서울에서 열리니 경기 준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겠냐는 것이 당시 대전 팬들의 의견. 관련 기사 하지만 고종수 입장에서 보자면 결혼 날짜를 오래 전부터 잡아놓은 상황이라 뒤로 미루기가 곤란한 상황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신 결혼식이 끝난 직후에 바로 팀으로 복귀했고 신혼여행도 뒤로 미뤘다고. 새신부도 이를 이해하고 응원한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관련 기사 그리고 결과적으로 대전은 해당 경기를 이기며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였다.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