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프 브로즈 티토

요시프 브로즈 티토(세르보크로아트어: Јосип Броз Тито Josip Broz Tito, 1892년 5월 7일~1980년 5월 4일)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제2대 대통령이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건국하고 대통령의 자리에 올라 연방을 이끌었으며, 비동맹 운동을 결성하기도 했다. 참고로 티토의 본명은 요시프 브로즈로, 티토는 <너(Ti)가 이것(To)을 해라>라는 어구에서 따왔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티토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던 현 크로아티아 자골리에 지방의 크론붸츠에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7번째 자식으로 태어났다. 티토는 1905년에 초등학교 졸업 후 1907년에 시골을 벗어나 시사크의 열쇠점 견습공으로 일하게 되었는데 여기서 티토는 노동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1910년에 금속노조에 가입한 동시에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사회민주당에 참가하게 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11년부터 1913년에 걸쳐 티토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떠돌며 일했다.

1913년 가을에 징병된 티토는 1914년 5월에 오스트이라 헝가리 제국군 주최의 부다페스트 펜싱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해 은메달을 획득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보이보디나에 이동한 후 티토는 그곳에서 반전유인물을 유포하며 선전활동을 벌이다가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1915년에 러시아 공격을 위해 중앙 유럽의 갈리츠어로 파견된 티토는 부고비나에서 유탄의 파편에 맞아 중상을 입었다. 4월에 부대원 전원은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는데 병상에 있던 티토는 완쾌 후인 1916년 가을에 우랄 산맥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졌다.

1917년 4월에 티토는 전쟁포로들로 데모를 벌이다가 체포되었지만 탈주에 성공해 1917년 7월 16일부터 17일에 일어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위(7월 혁명)에 참가했다. 경찰에게서 벗어나기위해 핀란드까지 달아났던 티토는 결국 체포되어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감옥에 3주간 갇혔다. 그는 다른 수용소로 이송되던 중 호송열차에서 탈출했다.

1917년 11월에 티토는 시베리아의 옴스크에서 적군(赤軍)에 가입했다. 1918년 봄에 러시아 공산당에 가입한 티토는 이 때 첫번째 아내인 헤르타 하스와 만나 1941년 5월에 첫 아이를 얻었었다. 이후 러시아에서 활동한 티토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1943년 12월에 독일점령하의 유고슬라비아에서 저항운동의 지도자가 되어 민주적인 임시정부 수립을 선언했다.

이 때 티토는 연합국의 직접적인 지원을 받아 1944년 6월엔 발칸반도에서 활동하던 영국 공수부대가 그를 돕기위해 편성되기도 했다.

그러나 티토가 스탈린과도 접근했기 때문에 연합군의 장교들은 그와 거리를 두기 시작해 전쟁이 끝나자 티토의 지원군을 철수시켰다.

그러자 전후 티토는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기 위해 유고슬라비아의 자립을 결의했는데 이에 화가 난 스탈린은 1948년에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을 코민포름에서 퇴출시고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상호원조조약을 파기했다. 그 후 소련에선 티토를 암살하기 위한 부대를 보냈지만 티토는 비밀경찰을 동원해 암살단을 모두 검거했다. 그래서 1953년에 북대서양 조약기구와 우호협약을 체결한 티토는 스탈린주의자들은 반체제 인사숙청의 구실이 되었다.[1]

티토는 각 공화국에 대한 자치권을 대폭으로 부여하여 연방제 유지하고 사회주의 체제면서도 여당 안에 제한적으로 야당을 두어 독재적인 성격에서 벗어났다. 신문 및 언론의 체제비판도 어느 정도는 허용했다. 또 민족주의에 의한 사상가들은 비밀경찰에 의해 감시하여 사회주의 체제비판은 용서해도 민족주의는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티토의 이러한 지배행위는 훗날 그가 사망한 후 각 민족들이 내전을 일으키며 유고 연방이 분열하는 원인이 되었다.

티토는 1980년 5월 4일에 슬로베니아의 병원에서 사망했다. 그의 장례엔 세계의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2]

각주

  1.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다른 공산국가들과는 달리 스스로 비동맹국을 선언했기에 소련의 위성국가로는 보지 않는다.
  2. 라멧 사브리나, 유고슬라비아 - 티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