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버 R. 에이비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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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liver R. Avison. 영국장로회 선교사이자 연세대학교 설립자. 195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60년 6월 30일 영국 요크셔 주 웨스트라이딩 제거 그린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방직공작의 마감부 책임자였으나 공장에서 해고된 뒤 에이비슨이 6살이 되던 1866년 가족을 데리고 미국을 거쳐 캐나다 온타리오의 웨스턴으로 이주했다. 에비슨은 온타리오 동부의 몇 개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초등 교육을 받았고, 1871년 알몬트에서 모직공장에 취직해 2년 동안 일을 했다. 1872년에는 또래 아이들에게 야학을 가르칠 정도로 두각을 드러낸 그는 모직 공장의 노동자들이 비참하게 살아가는 것에 자극을 받고 제대로 된 교육을 받기로 결심했다.

이후 초등학교에 재입학한 그는 알몬트 고등학교에 진학했고, 1876년 알몬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교사 자격증을 받기 위해 퍼드의 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877년 가을 졸업하여 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이후 스미스 폴스의 허튼초등학교에서 3년 동안 교사 생활을 한 그는 1879년 높은 급의 교사 자격증을 받기 위해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했다. 그러다가 교사가 아닌 약사가 되기로 결심한 그는 1880년 스미스 폴스의 약방에 들어가 도제 생활을 했다.

그는 3년 간 도제 생활을 한 뒤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에 입학하여 1884년 6월 4개의 금메달을 받으며 50명 중 1등으로 졸업했다. 이후 온타리오 약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약물학과 식물학을 강의했으며, 교장의 권유에 따라 1844년 가을 빅토리아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되었다. 1887년 6월 대학을 졸업한 그는 1885년 7월 28일 제니 반스와 결혼했고, 7월 6일에 빅토리아대학교 의과대학의 약리학과 치료학을 강의했다.

이후 의과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면서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를 겸했던 에이비슨은 의과대학생들 사이에서 존스 홉킨스대학교의 토머스 컬렌(Thomas Cullen)과 루엘린 에프 바커(Llewellyn F. Barker), 그리고 토론토에서 가장 유명한 외과의사이며 온타리오주의 주지사를 역임했던 허버트 브루스같은 유명한 의사들 중 한 명으로 이름이 올랐다. 그는 대학 교수, 개업의 이외에도 기독교와 관련돼 해외 선교 모임, 개척 교회 성경지도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1892년 9월 하순, 에이비슨은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를 초청했다. 이때 언더우드가 에비슨에게 해외선교사로 나갈 생각이 없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이에 강한 자극을 받고 교수직을 사임했다. 사실 그는 캐나다 감리회를 다녔지만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기로 하고 1893년 2월 6일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 후 1893년 6월 아내와 세 아이들을 데리고 벤쿠버를 떠났고, 7월 16일 부산에 상륙했다.

에이비슨은 1893년 9월 상경한 뒤 제중원에서 일했다. 그러다 1894년 제중원의 운영을 두고 조선 정부와 6개월인 협상을 벌인 끝에 9월말 제중원을 선교부로 이관 받았다. 이후 그는 언더우드와 긴밀하게 협조하면서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제중원 원장으로 있으면서 콜레라 퇴치에 진력하였고, 10월 을미사변으로 생명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을 언더우드와 함께 도왔다. 1899년 3월 휴가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1900년 봄 루이스 H.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로부터 1만달러의 기부금을 기부받고 한국으로 귀환했다.

이에 대해 평양의 선교사들이 문제를 제기하자, 언더우드를 포함한 서울지부의 선교사들이 에이비슨을 옹호했고, 결국 에이비슨이 원하던 대로 1904년 9월 제중원을 새로 짓고,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병원이라고 부르게 했다. 그리고 제중원의학교는 세브란스 병원의학교로 불리게 했다. 그렇게 세브란스병원을 개원하고 병원장이 된 그는 1906년 세브란스 병원 내에 간호학교를 설립하고, 제중원의학교 교육도 계속하였다. 1908년 6월, 에이비슨은 한국인 최초의 면허 의사인 김필순을 비롯한 7명을 배출했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이 해산당하자, 이에 반발한 구한국 군인들이 봉기하면서 남대문 전투가 발발했다. 이때 많은 한인 병사들이 부상당했고, 에이비슨은 이들을 자신의 병원으로 이송시켜 치료받게 해줬다. 1909년 제중원의학교를 세브란스의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1916년 10월 언더우드와 함께 연희전문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맡았다. 그러나 교장을 맡았던 언더우드가 얼마 안가 병사하자, 부교장을 맡았던 그가 대신 교장으로 취임했다.

경신학교 대학부의 교장으로 취임한 에이비슨이 가장 먼저 나선 것은 전문학교 승격이었다. 그리하여 1917년 4월 조선 총독부로부터 재단법인과 사립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을 인가받았다. 이때부터 경신학교 대학부는 연희전문학교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넓은 교지와 교사 확보가 문제였다. 경비는 언더우드의 형 존이 기부했다. 에이비슨은 1917년 9월 당시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에 송림이 울창한 토지 29만 320평을 교지로 매입했다. 이곳이 현재 연세대학교가 위치해 있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신촌동 134번지이다.

1919년 3월 3.1 운동이 발발하자, 그는 3월 13일에 귀국 중이던 캐나다 장로회 해외선교부 총무 A.E. 암스트롱에게 전보를 보내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후 3월 16일에서 17일까지 열린 선교사 대책회의에 참석한 그는 한국의 상황을 해외에 알리도록 했다. 그리고 3월 9일 내무부장관 우사미 가츠오(宇佐美勝夫)를 비롯한 총독부 고위 관료들의 요청으로 열린 수차례 회합에 선교사 대표로 참여하여 총독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한국인에게 자유와 자치를 허용하도록 요구하였다. 특히 3월 9일 회합에서 한국인 지도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불평 사항으로 다음 사항을 들었다.

1. 두 민족 간의 독특한 민족적인 다른 점에 대한 충분한 배려


2. 한국어 교육의 특권

3. 언론의 자유

4. 출판의 자유

5. 공공 집회의 자유

6. 여행의 자유

7. 사회 정화(일본 정부가 매춘 조직을 한국인을 상대로 강제하고 있으며, 한국인은 이에 대하여 자구책이 없음)

8. 한국인 차별 철폐

그는 이러한 불만 사항을 들면서, 한국인들이 이런 것들 중 어느 것이라도 요구하면 감옥에 가야하고 범죄인처럼 취급을 받아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우사미에게 한국인들의 이러한 청원을 허용할 것인지 물었고 우사미는 대답을 회피했다.

한편 에이비슨은 3.1 운동의 부상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보호하고 치료하게 하였으며, 일본 헌병 경찰의 가택 수색과 환자 이송에 저항하고 항의하였다. 5월 26일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양한묵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하여 그 시신이 유족에게 인도되자, 그의 집을 방문하여 시신을 다시 검안하고 유족들을 위문하였다.

3.1 운동 후, 에이비슨은 종합대학교를 설치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총독부는 허가를 내주지 않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설립했다. 1934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나 명예 교장에 추대된 그는 선교사에서 은퇴했고, 1935년 12월 서울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1942년부터 1943년까지 기독교인친한회 재무를 맡았으며, 열강을 대상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과 한국독립운동을 지원할 것을 호소하는 활동을 했다. 1956년 8월 29일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병사했다. 향년 96세.

대한민국 정부는 1952년 올리버 R. 에이비슨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