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 태조

태조(太祖)
생몰년도 852년 ~ 932년
즉위 전 오왕(吳王)
부모 아버지 전관(영현왕)
재위 907년 ~ 932년
시호 무숙왕(武肅王)
묘호 태조(太祖)
국적 오월
(신하국으로써) 후량 -> 후당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중국 오대십국시대 오월의 초대 황제. 자는 구미(具美)이다.

당나라 말기, 군벌 동창(董昌)의 부하로 들어가 부장이 되었으며 황소가 난을 일으켰을 때, 임안을 성공적으로 방어한 공으로 절도사로 임명받아 그곳을 흡사 지방 정부 세력으로 변화시켰다. 이후 자신의 상관이었던 동창을 제거하고, 그의 땅을 흡수한 다음, 후량의 주전충으로부터 오월왕에 봉해졌다.

재위 기간동안 백성을 징발해 가뭄과 홍수에 대비하여 치수사업을 실시했으며 댐을 만들어 해당 지역의 농업 발전에 기여한 명군이었다. 전류가 세운 오월은 약소국인데다가 옆의 양오와 사이가 나빠 국정이 안정되지 못해 세력이 강한 중원 왕조(오대)의 제후국 행세를 했다. 하지만 오월은 전쟁이 자주 일어나지 않아 백성들은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별칭은 해룡왕(海龍王)인데, 이는 전류의 치수 사업을 기리는 존칭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비천한 출생과 초기[편집 | 원본 편집]

전류는 당나라 말기 저장성 항저우 대관산(大官山) 아래의 임수리(臨水里)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한미하고 가난한 출신으로 소금 밀매, 고기잡이, 농경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전설에 의하면 전류는 태어나자마자 홍조를 띄었고 외모도 못생겨서 아버지 전관(錢寬)[1]이 그를 버리려고 했으나 전류의 할머니가 말려 그대로 키우게 되었다고 한다. 별명중 하나인 파류(婆留)[2]도 이 전설에서 비롯된 것이다.

어릴때부터 문(文)보단 무(武)를 좋아했으며 마을의 큰 나무[3] 아래에서 동네 또래 아이들과 놀때 그 아이들의 대장 노릇을 하는 등 무에 자질을 보였다. 가난한 사정으로 16살에 학업을 포기하고 소금 밀매를 업으로 하는 생계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당나라는 소금 밀매를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소금은 당시엔 없어선 안 되는 필수품이였다. 소금을 팔면 얻는 이득이 컸기에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함에도 소금 밀매를 비롯한 곡식들을 팔아 돈을 모았다. 전류는 이때의 경험으로 살아남는 법을 배웠고 재산을 모아 출세할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무장 활약기[편집 | 원본 편집]

등창을 따르다[편집 | 원본 편집]

17살부터 꾸준한 훈련, 손자병법을 읽으면서 머리를 채워 나갔고 21세가 되자 동창을 따라 의병 활동을 하면서 전류로 이름을 바꿨다.

전류는 앞서 말했듯 임안의 석경진지휘사(石鏡鎭指揮使)로 있던 동창이 왕영의 난을 진압하기 위해 그곳의 청년들로 의병을 구성했는데 전류도 그 의병 조직에 참가했고 왕영을 비롯한 반란 진압에 두각을 드러내면서 여러 관직에 봉해지고 이어서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적은 병사들을 효율적으로 지휘해 매복 등 전술로 임안을 지켜냈고 희종은 그의 공을 인정해 전류를 항주 지역의 절도사로 임명한다.

이후 880년 당나라가 혼란기에 접어들자 전류는 지방의 안정을 위해 주군인 동창과 함께 각 현(縣)들과 연합해 8도군(都軍)을 조직했다. 전류는 이듬해 도지병마사(都知兵馬使)에 봉해지고 각 도들의 단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아들 전원관을 비롯한 친족들을 군인으로 근무하게 하면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절도사를 평정하다[편집 | 원본 편집]

882년 7월 저장을 점령한 유한굉(劉漢宏)이 군대를 이끌고 절서(浙西)까지 점령하려 하자 동창과 전류는 팔도군을 거느리고 첸탕장에서 유한굉의 군대들을 막았다. 전류는 이때에도 밤을 틈타 기습해 대승했고 계속해서 유한굉군을 패퇴시켰다. 이에 화난 유한굉이 직접 선두에 서서 십만 대군과 이동해 산시에 주둔했으나 치열한 전투 끝에 전류의 승리로 끝났고 유한굉은 백정인 척 하고 도망가 버렸다.

서릉에서의 대첩 역시 전류의 실력을 공고히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를 계기러 전류는 산시를 서흥(西興)으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한편 도망간 유한굉은 재기해 저장성을 약탈했고 만행을 보다못한 동창과 전류는 886년 월주(越州)를 침략한 유한굉을 붙잡아 그를 참수시켰다. 유한굉을 처형한 전류는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해지는 영광을 누린다.

주군을 배반하다[편집 | 원본 편집]

주군 동창은 날이 갈수록 거만해졌으며 당나라가 주는 작위에 만족하지 못했고 결국 895년 국호를 대월나평(大越羅平)이라 칭한뒤 황제를 참칭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그가 반란을 일으켰단 소식에 당 조정은 동창의 부하인 전류를 토벌사로 보내 반란을 진압하도록 명했다. 전류는 자신이 따르던 주군의 은혜를 생각해 망설였지만 그 사이에 동창이 양행밀과 연합해 쑤저우와 항저우까지 쳐들어오자 결국 동창을 공격해 동창을 체포하는데 성공한다. 동창은 항저우로 압송되는 도중 수치심에 자살했고 저장성은 전류의 소유가 된다.

아무리 반군을 토벌한 전류라지만 그 역시 한때 동창의 부하였기에 연좌죄로 안좋은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소종이 그가 동창 토벌에 앞장섰다는걸 감안해 처형과 삼족멸을 면했다.

전류는 처형을 면하면서 소종에게 철권(鐵卷)[4]을 받았는데 이 철권은 후대에 육유, 유기를 비롯한 시인부터 송태종, 송인종, 송신종, 명태조, 명성조, 청고종에게까지 전해졌다. 또한 그의 공을 인정한 당나라가 사람을 보내 전류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그 초상화는 능연각에 등재되는 영광을 누렸다.

오월의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이후 동창 및 여러 반란을 진압한 후 징집을 중단했으나 상황은 사방이 적이였고 국경, 신주까지 전투를 치르기도 했다. 그 적들중 한명이자 라이벌은 바로 양행밀인데 양행밀과 전류의 관계는 우호적이기도 하고 적대적이기도 했다. 둘의 대립은 약 30년간 지속되었다. 양행밀이 회남절도사 손유(孫儒)와 안인의(安仁義)를 공격할때 양행밀에게 지원군을 보내주고 서로 통혼했지만 양행밀이 동창을 지원하자 그때부터 적대 관계가 되었고 낭산강전투를 계기로 둘의 대립관계는 끝이 난다. 저장 지역이 평온을 찾은 것이다.

전류는 자신의 세력권이 평온을 맞자 사치스러워졌고 임안에 호화로운 궁궐을 지었으며 외출할땐 천자처럼 수레나 말, 수많은 부하들을 동원하며 다녔는데 그 모습을 본 아버지 전관이 그를 꾸짖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농업고기를 잡던 백성 집안이다. 이때까지 너 외엔 벼슬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그러기에 네가 지금 높은 벼슬자리에 있어도 너를 도와줄 사람이 적고 주변에는 모두 너와 원수진 적들뿐이다. 그런데도 너는 만족을 모르고 남과 땅, 성을 다투고 있으니 우리 전씨 가문이 이로 인하여 큰 재앙을 받을까 봐 걱정된다.

아버지의 말을 계기로 자신을 되돌아보게된 전류는 매사에 신중해졌고 사치행각을 그만두었다. 잠잘때도 한쪽이 둥글어 잠에 깊이 들면 머리가 베개에서 떨어져 깨어날수밖에 없는 일명 경침(警枕)을 베고 자는 등 경각심을 지니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처소를 순찰하는 병사 한명이 담 아래서 졸자 탄환으로 정신을 깨우치게 하는등 매사에 신중을 기울였다.

전류는 904년 오왕(吳王), 이후 후량주전충에 의해 오월왕(吳越王)에 봉해졌고 정식으로 907년 오월의 초대 국왕으로 즉위했다. 왕의 아래인 절도사의 부서를 왕국의 조정처럼 바꿨고 국왕의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승상 등의 관직을 두었다.

축조사업[편집 | 원본 편집]

중원의 오대에게 충성한 그의 오월은 비록 황제를 칭하진 못했지만 오대의 지지로 상당히 안정적이게 되었다. 전류는 나라가 안정되자 대규모 축조 사업을 개시했고 항저우를 정비했고 전류가 정비한 항저우는 훗날 남송의 수도가 된다.

또한 저장성의 첸탕강에 제방과 수문을 축조하여 바닷물이 거슬러 들어오는걸 막아냈고 배가 왕래하기 편하게 암초를 제거했다. 오월의 수리사업에 기여한 그의 업적을 기려 민간에선 그를 해룡왕(海龍王)이라 칭했다. 또한 식수를 얻어내기 위해 연못을 파냈고 항저우에 여러 성을 재건, 축조하고 확대하는등 오월을 발전시켜 나갔다.

불교 전파[편집 | 원본 편집]

전류는 나라의 통합을 위해 불교를 채택했고 사찰 불탑의 축조에도 힘을 기울여 불교를 널리 전파시켰다. 당시 오월은 민간에서 불국(佛國)이라 불렸고 그 당시 전류가 축조한 탑중 유명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 영은사(靈隱寺)
  • 정자사(淨慈寺)
  • 소경사(昭慶寺)
  • 뇌봉탑(雷峰塔)
  • 육화탑(六和塔)
  • 보숙탑(保俶塔)
  • 감구백탑(閘口白塔)

이 외에 공신탑, 오월 건국 초기에 건설된 여러 건축물들이 있다.

무역과 징세[편집 | 원본 편집]

항저우를 개발시켰을뿐만 아니라 당시 고려와 일본과도 교류했고 전류의 오월은 막대한 이익을 벌어들이게 된다. 그 이익으로 문인의 보호에 힘썼고 백성들에게 닭, 물고기, 계란 같은 생활용품에 소비세를 걷기도 했다. 세금을 내지 못한 백성은 태형으로 다스렸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이후 후량이 망하고 후당이 세워지자 후당의 신하를 자처했고 후당 명종때 후당의 안중회(安重誨)와의 불화로 잠시 오월왕의 칭호를 빼았겼지만 금세 복직받았고 오월의 발전에 신경쓰다가 932년 3월 81세로 사망했다. 생전 신하들의 추천을 받은 5남 전원관이 오월왕 작위를 계승했으며 비록 오월은 제국이 아닌 왕국이였지만 그의 묘호를 태조로 정했으며 후당은 그에게 무숙왕(武肅王)의 시호를 내렸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후대 북송, 명나라에는 전류의 사업을 높게 평가하며 나라의 경제발전을 촉진하고 서민의 안정을 보장했다고 평했다.

钱立国,置营田数千人于松江,辟土而耕,…民老死无他缠累,且完国归朝,不杀一人,则其功德大矣!” 전류가 나라를 세우니, 수천명이 송강에서 농사를 짓고, 백성들은 힘들어 하지 않았으며 나라를 탄탄히 하고 조정에 돌아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 그 공덕이 매우 크도다.

- 명의 주국정(朱國禎, 1557 ~ 1632)

현재 시후에선 전왕사를 지어 전류의 업적을 기리고 있다.

참고 항목[편집 | 원본 편집]

둘러보기[편집 | 원본 편집]

역대 오월 황제
오월 건국 초대 태조 전류 2대 세종 전원관

각주

  1. 주전충이 영현왕(英顯王)이란 시호를 내렸다.
  2. 할머니 파, 머무를 류.
  3. 이 나무는 전류가 오월 황제로 즉위후 장군목(將軍木)으로 봉해진다.
  4. 공신에게 내렸던 증거물. 기와 모양의 쇠로, 겉에는 이력 사항을 새기고 안에는 면죄, 감봉 등의 횟수를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