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하청

梁河淸.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5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4년생이며 함경북도 경흥군 노서면 굴포동 출신이다. 그는 일찍이 만주에 망명했고 1910년경부터 중국 지린성에서 이범윤의 부하가 되어 삼마동에서 총기 관리를 담당했다. 그리고 1911년 지린성 황구에서 국민회(國民會) 평의원(評議員)을 맡았으며, 1912년엔 대별남구에 소재한 창의소(倡義所) 간부로 활동했다. 창의소는 중국과 러시아 혁명당과 합동하여 일제를 공격하는 것을 목적으로 했다. 또한 그는 이즈음에 대동협신회원(大東協新會員)으로 활동했다.

1912년 3월 훈춘현 간도영사분관 소속 조선인 순사보(巡査補)와 일본 밀정을 징치했다가 1913년 8월경 중국 관헌에 체포되어 국자가(局子街) 지방심판청(地方審判廳)으로 넘겨져 징역 10년을 받았다. 다행히 동지들과 중국인들의 탄원으로 수개월 만에 풀려났으며, 1914년경에는 황병길의 부하가 되어 훈춘, 왕청현, 나자구 등지에서 이동휘, 조상갑(趙尙甲) 등과 독립운동세력의 규합을 협의하고 배일선전 활동을 하였다.

1919년 조카인 양하구가 북일학교(北一學校)에서 일제의 조선인 순사를 징치한 일로 체포되자 훈춘분관 관헌을 처단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같은 해 6월 황병길 등과 나자구 등지에서 국내 침공 작전을 논의하고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20년 3월 15일부터 27일까지 훈춘현 밀강사 삼마동에 본부를 두고 국내 진공작전을 세웠으며, 같은 해 4월경 함북 온성군 일대에서 500여 명의 병력으로 일제 관공서 공격을 지휘하였다. 1921년 훈춘현 덕혜향 대황구에서 천황의 사진을 표적으로 삼아 사격 연습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의 행적 및 사망년도, 사망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5년 양하청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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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