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창호 (1884년)

安昌鎬.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4년 1월 5일 한성부 서서 반송방 지하계 송정동(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송월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공주에 소재한 기독교계 학교인 영명학교(永明學校)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던 1919년 4월 김관회(金寬會) 등과 회합을 갖고 4월 1일 장날에 독립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하고 독립선언서 등을 인쇄해 공주 일대에 배포했다가 체포되어 1919년 5월 상해로 떠나 망명정부로서 임시정부를 어떻게 하면 효율적이게 운영할지 고민하던중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과 민족 유일당 운동을 전개하여 지속적인 통합을 위해 노력하였다.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취조를 받다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무죈 판결을 받고 석방되었다.[1]이후 1920년 9월 20일 국내를 비롯한 중국, 연해주,국내,일본을 총괄하는 지부조직으로 흥사단 원동 임시위원부를 결정 하였다.

이후 하와이로 건너가 감리회 목사로 재직한 그는 1932년 5월 22일 상하이에서 건너온 현순 목사로부터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전말을 소상히 들은 뒤 감리교당에 40여 명의 한인들을 모아놓고 임시정부 후원회를 조직하고 매년 12원 씩을 출연(出捐)할 것을 약속했다. 또한 1934년 4월에는 원동(遠東)의 특무공작활동을 후원하던 비밀결사로 1932년부터 하와이지방에 조직되어 있던 하와이 애국단에 가입하고 애국단의 사업을 더욱 확장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1919년 부터 1932년까지 윤봉길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으로 체포되어 국내로 압송되기 전까지 중국에서 활동하여 60년 생애중 절반에 해당하는 기리를 해외에서 독립 활동하였다.그 후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을 전개하다 1969년 12월 31일 호놀룰루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안창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1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