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화점

개요[편집 | 원본 편집]

고려가요 중에서 현재까지 그 내용이 전해져 오는 것들 중 하나이다. 지어진 시기는 고려 충렬왕시기로 추정되며, 남녀간의 애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한 노래로 자유분방한 여인의 사랑을 표현하였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이를 "남녀상열지사"라 하여 당시의 퇴폐적이고 문란한 성윤리를 노골적으로 그린 노래라고 하기도 한다. 여담으로 쌍화는 만두를 음차한 말이라는 말이 통설이지만 이에 대해 다른 해석도 존재하기 때문에 명확하게 밝히기는 어려울 수도 있다.

내용[편집 | 원본 편집]

쌍화점(雙花店)에 쌍화(雙花) 사라 가고신댄
회회(回回)아비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점(店)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광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덤ㅅ거츠니 업다.


삼장사(三藏寺)에 블 혀라 가고신댄
그 뎔 사주(寺主)ㅣ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뎔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삿기 상좌(上座)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덤ㅅ거츠니 업다.


드레우므레 므를 길라 가고신댄
우믓 용(龍)이 내 손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우믈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드레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덤ㅅ거츠니 업다.


술팔지븨 수를 사라 가고신댄
그 짓아비 내 소모글 주여이다
이 말사미 이 집 밧긔 나명들명
다로러거디러 죠고맛감 싀구바가 네 마리라 호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자리예 나도 자라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긔 잔 대가티 덤ㅅ거츠니 업다

현대 한국어 번역[편집 | 원본 편집]

만두집에 만두 사러 갔더니만
회회 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가게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광대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 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또는 덩거친) 곳 없다


삼장사에 불을 켜러 갔더니만
그 절 지주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이 절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새끼 상좌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두레 우물에 물을 길러 갔더니만
우물 용이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우물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두레박아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술 파는 집에 술을 사러 갔더니만
그 집 아비 내 손목을 쥐었어요
이 소문이 이 집 밖에 나며 들며 하면
다로러거디러 조그마한 시궁 박아지야 네 말이라 하리라
더러둥셩 다리러디러 다리러디러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잠자리에 나도 자러 가리라
위 위 다로러거디러 다로러
그 잔 데 같이 답답한 곳 없다

해석[편집 | 원본 편집]

대부분의 현대어 번역에서 ‘쌍화점’을 ‘만두 가게’로 번역하고 있다. 일단 그 해석을 인정하고 보면, 1연에서 만두가게에 만두 사러 갔더니 그 주인(회회아비)이 손목을 덮석 잡아 끌고 은밀한 데로 끌고 갔다는 내용이다. 뭘 하려고? 그 일이 소문이 나서 저마다 ‘만두가게’에 몰려 갔다나 어쨌다나... 2연에서는 ‘만두 가게’가 ‘삼장사’란 절로, 3연에서는 ‘우물’가로, 4연에서는 ‘술 파는 집’으로 장소가 바뀐다. 특이하게 3연에서는 ‘회회아비’ 대신 ‘용’이 등장하지만 전체 내용은 각 연이 모두 동일하다.(아무래도 용은 당시 왕실과 연결된 귀족을 의미하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쌍화가 무엇인가 하는 문제[편집 | 원본 편집]

  • 쌍화는 과연 만두인가? :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쌍화는 "① 성에, ② 서리 모양의 細工(세공)"으로 풀이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고려가요 <쌍화점>에서의 ‘쌍화’는 만두가 아니라 ‘세공품’이고, 따라서 ‘쌍화점’은 ‘세공품 가게’임을 밝혀냈다. 자연스럽게 아라비아인인 ‘회회아비’는 세공품 가게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쌍화’를 세공품으로, ‘쌍화점’을 세공품 가게로, ‘회회아비’를 세공품을 파는 아라비아인으로 해석해 보면, 보다 고려가요 <쌍화점>에 대해 해석이 자연스러워 진다. 박덕유 교수는 "회회인들이 광대를 두고 만두를 팔았다기 보다는 당시 부녀자들을 상대로 악세서리의 일종인 물건을 팔았다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고 주장한다. ‘쌍화’가 세공품이란 증거는 다양하다. 『삼국사기』를 보면 신라시대에 회회인과 교역을 시작했음을 알 수 있고, 이때의 교역 상품은 로마형 유리기구였음을 알 수 있다. 신라고분에서도 "서역계 상인들에 의해 전래"된 각종 유리기구들이 출토되었으며, "중국에서는 사치품 중의 하나로 여자들의 빗장식으로 사용"되는 등 다양하게 세공품들이 이용되었음을 여러 사료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고려시대 <태종실록>에는 "회회인이 수정으로 다는 구슬을 만들어 드리니 왕이 기뻐하였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 당시 "무슬림들은 이러한 뛰어난 보석 세공 기술을 바탕으로 왕과 왕실에 가공된 각종 보석을 진상하고 상당한 수준의 사회, 경제적 입지를 마련"했다고 한다. 이렇게 볼 때, "광대를 두고 서역인들의 세공품을 판매한 ‘쌍화점’은 분명 고려 여인들의 관심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고 볼 수 있다.[1]


각주

  1. 박덕유, ‘<쌍화점>의 운율 및 통사구조 연구’, <어문연구>(통권 110호 2001년 제29권 2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