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계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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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桂月.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소설가, 여성운동가. 2019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12월 10일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면 신창리에서 출생했다.[1] 송계월 심문조서에 따르면, 그녀의 부친은 송치옥(宋治玉)이고 모친은 이순희(李順姬)이며, 오빠와 언니, 여동생이 각 1명, 남동생이 2명 있었다고 한다. 심문조서에는 그녀의 가족이 전답을 소작하고 그 수입에 의해 중류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고 기재되어 있다. 하지만 송계월의 '자기서사'에 따르면, 그녀의 집은 매우 가난했다고 한다. 비료회사에서 일하던 남동생 송창옥에게 보낸 서신 <어촌 있는 동생에게>에는 추운 겨울 북극의 매서운 한파를 맞으며 비료공장에서 노동하는 동생에 대한 애달픔이 그려져 있고, 죽음을 무릅쓰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와도 모든 것을 배 주인에게 빼앗기는 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배여 있다.

산산이 찢어진 옷 틈으로 부비고 들어가는 찬바람에 너의 여윈 삶을 이어내는 그 등에는 한 섬에 비료섬이 업혀 있는 것과 깔깔한 조밥 덩어리를 떨면서 깨무는 그 형상이 지금 편안히 앉아 이 글 쓰는 나의 온 몸뚱이와 가슴 한 편을 꽉 찔러주는 듯하다.


- 송계월, <어촌 있는 동생에게> 1931.12.

부친 송치옥은 가난한 어부였지만 신창 사회청년구락부 소속이자 북청 노동연맹 집행위원으로서 사회주의 활동을 전개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사상 방면의 책과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였고, 자신의 지식과 신념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동주의적 성향을 갖게 되었다. 그녀는 신창공립보통학교를 재학했을 때 은사 김용식(金龍植)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김용식은 3.1 운동 때 신창 일대 만세시위를 주도하여 신창시장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김용식이 옥고를 치른 후 사망한 뒤 아들 김경이 쓴 글에 따르면, 송계월이 귀향할 때마다 김용식의 집을 찾아와 유족과 시간을 함께하면서 은사를 추억했다고 한다. 송계월은 함경도에서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식민지 여성의 유토피아적 지향으로 '함경도 여성'의 강인한 생활력과 경제력, 이를 통한 여성의 주체적 자립을 강조하였고, 함경도적 '기질'을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는 '탈식민'의 유효한 가치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내가 특별이 여기에 있어 일천만 여성 동무에게 자랑삼아 소개들일 것이 있으니 함경남북도 여성으로는 가장 자랑하지 아니하여서는 안 될 경제적 독립 그것이다. 첫째로 이 부인들의 머리는 깨끗하게 청산(淸算)하여 오히려 온 우주라도 혼자 정복하리라는 이러한 위대한 포부를 가졌다는 것을 말하여두려 한다. 더욱 이것을 구체적으로 들어 이야기할 것은 어린애 네 다섯 더 많이 일골 여덟 둔 부인들이 집안일 다 보아가면서 구루마 끌고 다리를 넓적다리까지 옷을 걷고 팔은 소매 없는 양복모양으로 걷고 다리를 넓적다리까지 옷을 걷고 팔은 소매 없는 양복모양으로 걷고 머리에는 머릿수건 쓰고는 온 시가를 함박 이고 구루마 끌고 다니는 것은 아마 이곳이 아니고는 보지도 듣지도 못할 형상일 것이다. (중략) 그 다음 어떤 부인은 자식 공부시키기 위하여 또한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 입고 여름이나 겨울이나 이러한 무수한 고생을 하여나가 좋은 인물 많이 내는 예(例)가 여간 많은 것이 아닙니다.


- 북청의점묘

신상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26년 15세의 나이에 경성으로 향했고, 1927년 경성여자상업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28년 4월 교무주임을 맡고 있던 신상철이 별다른 이유없이 파면되자, 그녀는 동창생들과 함께 교장에게 신상철의 복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때 동맹휴학을 반대하는 학생들이 그녀가 흰 저고리와 흰 치마 차림으로 다니는 것을 보고 기생이라 조롱했다. 마침 그녀의 이름이 '계월(桂月)'인 점도 고향에서 기생을 했다는 소문이 도는 원인으로 작용했다.[2] 그녀는 이에 분노하여 동맹휴학 반대 학생들과 수차례 충돌했다. 급기야 5월 2일 수업중인 2학년 교실에 침입하여 수업을 방해했다.

이 사건으로 체포된 송계월은 폭행 및 수업방해 혐의로 5월 12일 검사국에 송치되고 서대문형무소에 9일간 구류되었다가 5월 19일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되었다. 이후 경찰로부터 요시찰 대상으로 지정되었으나, 이에 개의치 않고 학교의 불법적 행위(교장의 친인척 교사채용, 교사의 부당해임, 학교설비 미비)에 강하게 저항했으며, 학생들의 피해, 면학분위기 침해 등을 이유로 여러 차례 학교당국에 건의를 하였으나 변화가 없자 동맹휴학을 3차례 단행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2번 구류되었다. 그러던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벌어지자, 1930년 1월 서울에서 이에 호응하고자 20여 개교에 달하는 각급 여학교와 남학교의 연합시위운동이 추진되었다. 송계월 역시 이에 적극 가담하여 1930년 1월 14일 자신의 하숙집을 만세운동을 도모하기 위한 회합의 장소로 제공하였고, 제2차 여학생 만세운동을 계획하여 1월 15일 여학생 만세운동을 벌였다.

이 일로 1930년 1월 31일 체포된 그녀는 검사국에 송치되었고, 사상전문 이등(伊藤) 검사의 담임으로 취조를 받았다. 이때 이등 검사는 송계월에게 1928년의 동맹휴학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여학교 생도들은 모두 그대를 알고 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에 송계월은 “동맹휴학 사건이 신문에 게재되었으므로 모두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이등 검사가 물었다.

그대는 이전에 기생을 한 일이 있었는가.

송계월이 답했다.

그런 일은 절대 없다. 나의 이름이 계월(桂月)이라고 하는 데에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으로 고찰되지만 나는 향리의 보통학교에서 6년을 다녔고, 그리고 곧바로 상경하여 현재의 여자상업에 입학하였으므로 기생이나 무엇인가 될 틈도 없었다.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고 있는데 나는 몹시 서운하다.

1930년 3월 22일 징역 6개월,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공소권을 포기하여 당일로 출옥할 예정이었으나, 공소권 포기 수속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출옥이 연기되었고, 3월 26일에 출감했다. 그녀는 약 2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면서 일기를 썼는데, 거기엔 "감옥에서 맞는 봄은 서럽기 그지 없다. 함께 입간된 동무들로 위안을 얻지만 계이 주는 '센티멘털'에게 '헤게모니를' 전취당한다"라는 표현이 있다. 이때 은사 김용식으로부터 계절과 일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말고 마음을 굳게 단련시켜 후일을 위해 더욱 단단해지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1932년 4월 '봄과 감옥여성'에서 그때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의 편지는 나의 약한 심장을 콱 찔렀다. 나는 그 편지를 몇 번이고 나의 볼에 대고 감사함을 외쳤다. 나와 몇 동무들은 마치 꿈에서나 깨듯이 새 정신을 말쑥이 얻었다. 비록 철인(哲人) 간디가 가지고 있는 냉정한 이지를 근본적으로 못 가졌다고 할지라도 가지려고 애를 많이 썼었고 그러한 이지의 인간이 되려고 무한히 애썼던 것이다. 그 후부터는 오히려 이 감옥에서 봄을 맞는 것이 한층 더! 그 의미가 심각하고 새로웠고 통쾌미가 아우성치며 나의 마음에 흐르는 것이었다.

출옥 후 학교에 복귀하여 1931년 2월 경성여자상업학교를 졸업하였고, 부모의 도움 없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자 정자옥[3]의 데파트걸(백화점 점원)로 취직했다. 데파트걸은 일제강점기 당시 여성들에게 최고의 상품을 다루는 화려한 직업으로서 선망의 대상이었으나, 평균 노동시간은 10시간에서 14시간이었고, 임금은 20, 30원 수준으로 그리 높지 않았다. 수많은 고객에게 하루 종일 웃음을 띠고 친절을 다해야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모욕뿐이었으며, ‘상품과 애교’를 함께 팔아야 한다는 고백처럼 고객들의 성희롱에 노출되어 있었다. 그녀는 훗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학교에서 사회를 바라볼 때는 몰랐었지만 사회에 나와서 보니까 사회는 너무나 험악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사회 에 나와서는 마음이 여러 갈래로 방황하게 됩니다. 그럼으로 사회에 처음 나올 때는 마음의 무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각 방면에 대한 수난이 퍽 많습니다. 여성들에게 쓸데없는 호기심을 가지고 대하는 남성들이 많기 때문에 자기 자신에게 불리한 점이 많습디다. 이런 때에 잘못하면 타락되기 쉽습니다. 그런고로 이런 점을 잘 주의하여야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직업여성의 좌담회>, '매일신보' (1933.1.1 ~1.5)

2개월간 데파트걸로 활동하다 이직을 결심하고 1931년 4월 <신여성> 잡지의 기자로 취업했다. 그녀는 개벽사에서 발간하는 '혜성', '별건곤', '신여성', '어린이'에서 기고문과 소설, 논설 등을 기고했다. 특히 신여성에서는 기자, 작가, 편집 등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고 송계월 입사 후 신여성은 여성주의적 기사나 문예가 훨씬 더 강화된 양상을 보였다. 1931년부터 1933년까지 2년간 신여성 기자로서 기고한 작품은 약 50여 편으로, 소설 4편, 일기ㆍ수기ㆍ서한 7편, 평론 4편, 수필 9편, 칼럼 5편, 방문기ㆍ참관기 9편, 인터뷰 3편, 좌담회 5편 등이다. 그녀는 필명으로 '적성(赤城)'을 썼다. '붉은 별'이라는 뜻의 이 필명은 자신의 이론을 사회주의 또는 계급주의적 여성에 두고 현실의 문제점을 전투적으로 서사화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한 것이었다.

그녀는 기자로서 첫번째 글인 <내가 신여성이기 때문에>에서 신여성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표명했다. 신여성이라는 용어는 신진 여성, 신진 선구자, 책임 많은 소수부대의 선구자로 풀이되는데, 신여성 스스로의 자발적 각성과 함께 가정적, 사회적 폭력과 압제 속에 놓인 후진여성들의 해방을 위해 투쟁해야 할 책임을 지닌 새로운 여성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신여성이 이 책임을 짊어질 때, 신여성과 후진여성은 동지가 될 수 있으며 투쟁의 강도 또한 높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처럼 그녀는 첫번째 글에서부터 '책임감 있는' 신여성과 신진과 후진의 여성 연대를 강조하는 사회주의,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자신의 뜻을 밝혔다.

또한 송계월은 당대의 여성 문제를 개인의 성격적, 개인적 ‘하자’라기보다 사회 구조적 문제와 결부하여 제시했다. 가난한 여성이 아이를 업둥이 시키는 것에 대한 세간의 비난에 대해 ‘가난한 어머니가 자식을 왜 부잣집 대문간에서 몇 시간을 떨게 하지 않아서는 안 될 원인의 그 끝은 사회 제도의 불합리로 생긴 죄’라고 지적했다.[4] 그리고 여성이 가정과 사회에서 노예로 전락할 수밖에 없음을 봉건적 관습으로 인한 폐해라고 선언했다.[5] 한편, 그녀는 여성의 문제에 계급적 이해를 우선했다. ‘가난한’ 어머니가 ‘부잣집’ 대문간에 아이를 버리는 것이며 ‘약혼 중 애인에게 정조를 허락’함에 대한 선행 조건은 그 남성이 부르주아냐 프롤레타이라냐에 따라 다르다. 즉 금일의 역사적 현실성은 남성 대 여성의 성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의 도래와 맞물린 부르주아 계급 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계급적 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여성 해방은 노동자 농민 해방이 있는 데서 되어진다는 것’이며 계급 해방을 위해 강력한 투쟁과 집단적 연대를 주장한다. ‘사회적 임무를 어깨에 메고 집단적, 조직적 행동을 통해 착취와 계급이 없는 새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문제를 계급적으로 분리시켜 1. 부르주아 내지 소부르주아들의 모여진 결합이 있겠고 2. 프롤레타리아들이 엉키어진 결합의 약혼 형식이 있을 것이다. 먼저 전자의 입장에 관한 (중략) 정조 요구를 받았을 때에 약혼 그것으로써 정조 그것을 허락하는 것이 좋지 못하다는 것으로 결론을 맺고 싶다. 왜 그러냐 하면 부르주아 ‘향락’ 그것으로 인하여 진정한 성적 요구가 아닌 성적 유희, 호색적 자극 때문에 첨예화한 퇴폐적 육욕에 취한 부르주아 남성들이기 때문이라고 한 말로 하고 싶다.


(중략)

또한 후자에 처한 두 남녀가 부르주아 사회의 소위 이름 붙인 약혼이란 형식 중이나 혹은 애인 중에 있다고 할 때에 역시 이런 환경에 있을 때에는 나는 허락하여도 좋다는 것으로 말하고 싶다. 첫째로 부르주아들의 행하는 혼인식이란 그것으로써 일반에게 표시할만한 경제 토대가 없는 것이 첫 조건이다. 그런 까닭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아무 실현 형식도 없이 가장 진정한 결혼이 성립되는 동시에 프롤레타리아에 사명을 매고 분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남성들이 자기 개인들의 이욕을 만족시키려고 만들어 놓은 성도덕을 파괴하려고 싸우는 것이 이들의 새로운 사회적 투쟁의 무기가 될 것이다.

- 송계월, '약혼 중 애인에게 정조 허락함이 죄이냐?' 삼천리 3권 10호, 1931.10.

송계월의 소설이나 수필은 사회주의 노선에 동조하는 이데올로기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였다. 송계월의 소설 4편은 모두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창작정신으로 하여 강력한 계급의식과 투쟁의식으로 무장한 프로문학적 성격을 지녔다. <공장소식>(1931.12)은 여직공을 주인공으로 노동현장에서 받는 억압의 젠더적 특수성을 실화적으로 보여준 여성주의 노동소설이며, <가두연락의 첫날>(1932.3)은 여직공에 계급성에 눈을 뜨고 진정한 프롤레타리아의 해방을 위해 위대한 용사가 되길 다짐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젊은 어머니>(1933.2)는 부르주아 계급의 허위의식을 비판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투쟁의식을 고취시키고자 하는 작가의 목적의식이 주인공의 목소리를 통해 직설적으로 전달된다. 마지막으로 <신창 바닷가>(1932.11)는 ‘벽소설’의 형태로 창작된 것으로 일본 식민지 수탈의 대표적 사례로 주목되는 온유비업과 관련하여 작가의 고향인 신창의 영세어민들의 투쟁을 보여줌으로써 강한 선동성을 갖는다.

송계월의 수필은 자기 고백적이며 감상적인 제재를 다룸에 있어서도 뚜렷한 목적의식과 비판성, 지향의식을 드러낸다. 더불어 소설에서 다룬 주제를 연속하여 연작의 형태로 맞물리는 수필이 많다. 이러한 형태의 수필은 ‘르포’적 형태를 취하는데 노동 현장에서 발생하는 폭력을 다루거나,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묘파(描破)하거나 함경도 여성들의 강인한 생활력을 점묘하는 가운데 제국에 저항하는 여성적 지향을 제시하기도 한다. 계절 수필 중 ‘봄’이 주제인 <봄과 추위>에서는 일시의 안정기(봄)에 안주하지 말고 ‘무섭고 험악한 폭풍’, ‘곤란과 위험의 과정’을 염두에 두고 모든 준비 태세를 갖추어야 함을 주장한다. <우리 가을은 내일 아침에>에서는 ‘가을’을 풍요, 여유, 아름다운 단풍잎으로 묘사되는 ‘부잣집 정원’과 ‘가을이 온 줄도 모르고 땀과 추위에 잠겨 일하는 노동자 농민’의 우울한 삶으로 대조한다. 같은 계절이라도 계급적 차이에 따라 맞이하는 심상이 다르듯 ‘우리 사는 세상은 이렇게 같은 사람으로서 틀린 생활을 하고 있다.’

고향이 주제인 수필에서는 과거의 고향과 현재의 고향이 대조된다. ‘사공의 딸이나 지주의 딸이나 시기, 질투, 암투 없이 평탄하던 옛날 고향의 설날 정경’은 이제 ‘명문가 집의 손녀가 인육시장에 팔려가고, 처녀들이 정어리 공장에서 인금 인상 투쟁을 하는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옛날 평 화와 행복을 노래하는 고향 어부들의 뱃노래는 현재 통곡과 비탄으로 변하였다. 폭풍우가 진동치고 함박눈이 퍼붓는 날에도 배주인의 압력으 로 바다에 나갈 수밖에 없는 영세 어민들, 배가 엎어지고 어부들이 죽어가는 과정과 그들을 부두에서 바라보는 가족들의 애끓는 심정을 생생하 게 묘사하는 <난파선>은 벽소설 <신창 바닷가>와 함께 고향 북청 어민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다뤘다. 송계월은 수필을 통해 사실적 현장을 핍진히 묘사하고 이에 대한 자신의 감상과 의견을 비판적으로 개진했다. 그러면서 계급주의적 현실을 진단하고 묘파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언제나 그 마지막은 강한 ‘새 힘의 결심’으로 충전되거나 ‘열과 피에 가득 찬 손을 합하여’ 프롤레타리아의 힘을 결속하자는 투쟁의식을 고취했다.

이렇듯 개벽사 여기자로서 맹활약하는 와중이던 1931년 5월 27일 모교인 경성여자상업학교 2학년생들이 부정교사의 복직 문제로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에 송계월은 동교 졸업생들과 함께 동창회를 열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그녀는 동창회 대표의 자격으로 교장을 방문하여 항의문을 전달했지만, 교장이 이를 거절하자 '매일신보' 1931년 5월 29일자 기사에 <학교의 반성 없으면 사회에 호소>를 기고하였다. 이로인해 동맹휴학 선동자로 낙인찍혀 체포되었다가 며칠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건강을 돌보지 않고 동분서주한 여파로 1932년 2월부터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광주학생항일운동 동조시위 때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할 때 얻은 위병과 폐렴이 겹쳐 폐결핵 진단을 받은 것이다. 여동생과 친우들은 고향으로 내려가 공기 좋은 곳에서 요양을 하고 돌아오라고 권했지만, 송계월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그러나 건강이 갈수록 악화되자 어쩔 수 없이 낙향하였고, 고열과 심한 기침, 각혈, 위통, 신경통까지 겸하여 몸을 움직이지 못할 만큼 위독하였 다. 잠깐의 쪽잠 속에서 “결코 죽을 수 없다”는 잠꼬대를 연발하였고 북청의 가족들은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온갖 정성으로 간호하였다. 다행히 가족의 헌신 덕분에 병이 호전되었고, 1932년 6월 <신여성>에 '병상의 편상-북국 어촌에서'을 기고하여 자신의 근황을 밝혔다. 그런데 경성에서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떠돌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 S모라는 사람이 출판회에서 “송계월이 아이를 출산하러 고향에 내려갔다"는 소문을 퍼트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극도로 흥분하여 경성으로 올라가려 했지만 의사와 가족의 만류에 그만두고 4개월간 더 정양한 후 1932년 9월 재상경했다.

개벽사에 복귀한 뒤 기자로서 활동하던 중, 여러 곳에서 자신과 관련한 소문을 접했다. 특히 이갑기가 <여인> 가십난에 'S처녀의 옥동자 운운하며 아기 아버지가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있다'는 기사를 실은 것을 알게 되었다. 이갑기는 좌익계열 단체 카프의 맹원이자 사회주의 비평가였다. 그녀는 평소 카프에 입단하고 싶어했는데, 정작 거기서 활동하던 자가 자신에 대한 소문을 마치 실화인양 옮겨 적고 세간의 관심을 끌고자 한 것에 분노했다. 그녀는 곧장 '여인' 잡지사로 달려갔지만, 이갑기는 이미 시골에 내려가면서, 잡지사에 "이번 가십난에 쓴 글은 여류문인 C의 이야기를 듣고 쓴 것인데 사실이 아닌 듯하니 취소하여라"라고 적힌 엽서를 보냈다. 하지만 잡지는 이미 발행된 뒤였기에 취소가 불가능했다.

송계월은 자신이 '처녀 임신'하고 출산하여 아이를 숨겼다는 악소문에 심히 분노하였다. 그녀는 실체 없는 정체불명의 소문을 공론화한 것을 ‘데마고기'(Demagogy)[6]로 규정짓고, <데마에 항(抗)하여>(신여성, 1932.11), <역선전에 대한 일언>(제일선, 1932.11)을 잇달아 발표하여 소문을 전면적으로 반박했다. 두 글은 이갑기의 글을 조목조목 반박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갑기의 저널리스트로서의 추악함을 가치론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갑기는 더 이상 카프의 멤버이자 동료가 아니라 ‘구두 끝에 먼지’, ‘일개 여성의 앞잡이’, ‘주책없는 행동을 일삼는’ 불량 청년으로 타락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송계월의 비난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갑기가 엽서에서 밝힌 '여류문인 C'로 향했다. 이 C라는 여인은 바로 최정희로, 송계월과 더물어 당대를 대표하는 여류 문인이자 여기자였다. 그녀는 그런 그녀가 자신의 뒤통수를 친 것에 극도로 분노하여, 최정희의 실명을 공개적으로 밝히고 자신을 모해하려 든 것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그러나 그녀의 적극적인 대응에도 불구하고, “S모 양이 옥동자를 안고 청량리 역에 내렸다”는 새로 운 소문이 더해져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7] 게다가 그녀가 영호, 음악, 스포츠를 취미로 가지고 있는 것을 문제삼아 "입으로는 푸로를 말하지만 그 사생활은 몹시도 호화로운 허영의 여성", "이중인격자"라는 비아냥을 샀다.[8]

이러한 현실에 정신적 고통을 심히 받은 그녀는 각혈과 혼절을 반복하였다. 하지만 병원과 잡지사를 오가는 와중에도 소설과 수필을 연속하여 발표하였고, ‘어떤 그룹의 멤버로서 조직을 통하여 연구하고 창작'하기를 희망했다.[9] 그러나 의사로부터 다시 일어설 수 없다는 선고를 듣고 1933년 3월 귀향하였고, 병상에 누워서 꼼짝도 하지 못하다가 1933년 5월 31일 북청군 신창면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23세. 사인은 장결핵이었으며, 유해는 장진 공동묘지에 묻혔다. 사후 여러 잡지사에서 특집 기획을 통해 그녀의 요절을 애도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9년 송계월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송계월의 출생년도에 대해 1910년생과 1911년생, 1913년생 등 세 가지 설이 제기되었는데, 1931년 경성여자상업학교 제3회 졸업대장에서 송계월이 명치(明治) 43년, 즉 1910년생임이 명시된 사실이 확인되었다.
  2. 송계월과 함께 여성운동을 전개했던 윤성상의 글 '그 길이 그렇게 바뻣소'에 따르면, 송계월의 본명은 따로 있었지만 어머니가 천한 이름을 가져야 오래 산다며 계월이라고 바꿨다고 한다.
  3. 현재 롯데백화점
  4. 송계월, '세상 일기', 삼천리 3권 11호, 1931.11.
  5. 송계월, '악제도의 철폐', 동광 29호, 1931년 12월
  6. 특정한 집단, 세력 또는 그것을 대표하는 인물에 관하여 대중 사이에 유포시키는 소문의 일종으로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정치적인 허위 선전이나 인신공격
  7. 사우춘, '거리의 굴뚝새! 풍문제조업자' (신여성 6권 12호, 1931.12)
  8. 이찬, '송계월 양의 삼주기에', (조선중앙일보, 1935.5.30~6.2)
  9. 송계월, '부인기자의 일기', (신동아, 193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