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병철 (1893년)

徐丙轍(또는 徐丙喆, 徐炳徹).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3년 7월 6일 충청남도 서산군 해미읍 억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8년 4월경 대한독립단으로서 군자금을 모금해 해외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송금하던 이종성(李鍾聲)의 소개로 대한독립단에 가담했다. 이후 서산군 일대의 유지들에게 독립운동을 해야 하는 이유를 설파하고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했다. 그해 8월 서산군과 안면도를 근거지로 삼고 안면면, 태안면, 부석면, 남면 등 4개면의 유지 4명을 포섭해 대한독립단 서산지단, 일명 결사단(決死團)을 조직했으며, 단장엔 안면도 승언리에 거주하는 사립 광영학교장 이종헌(李鍾憲)을 추대했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하자 서산에서 벌어진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으며, 그해 4월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 단원 권인채(權忍采)와 서울에서 만나 활동 계획을 협의한 뒤, 8월 16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원으로 가입했다. 이후 그해 9월에 서산지단원 임정호(林楨鎬)를 권인채에 소개해 임시정부에 가도록 주선했으며, 사비 120원을 여비로 지급했다. 1920년 초에는 서산군 인지면 아당리의 부호 박준용(朴準用)의 집에 들러 독립운동자금 1,000원을 요구, 현금 200원을 수령하여 영수증을 교부하고 나머지는 후일 송금할 것을 약속받았다.

1920년 5월, 서병철은 서울 인의동에 있는 전기봉(全基奉)의 자택에서 김상옥, 김동부(金東浮) 등과 함께 암살단을 조직해 친일 부역배들을 처단하고 군자금을 수합해 길림군정서(吉林軍政署)를 지원할 것을 계획했다. 그해 8월 미국 의원단이 한국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국내에 잠입한 한훈 등과 함께 미 의원단이 한국에 방문한 때에 맞춰 총독 등 일제 고관을 처단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알리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사전에 탄로나고 말았고, 결국 그는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 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사기 혐의로 징역 2년(미결구류 일수 중 150일 본형에 산입)을 선고받았다.[1]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1922년 4월 28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고[2]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엔 서울에서 조용히 지냈으며, 1977년 2월 2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서병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또한 그의 유해는 2014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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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