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삼척 척주동해비 및 평수토찬비
건축물 정보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삼척시 정라동(정상동) 82-1
문화재 정보
종목 강원특별자치도 유형문화재
지정일 1971년 12월 16일

척추동해비가 아니다
척주동해비와 평수토찬비가 묶여서 하나의 문화재로 등록이 되어있어 한 문서에 기재한다. 문서의 이름은 상대적으로 조금 더 알려진 척주동해비로 하며, 이 문서는 평수토찬비로도 들어올 수 있다. 참고로 척주(陟州)는 삼척(三陟)을 뜻하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척주동해비[편집 | 원본 편집]

조선 현종 2년에 삼척부사를 지낸 허목이 세운 비석으로 삼척항 남쪽의 육향산[1] 정상에 자리하고 있다. 본래 정라진[2] 앞 만리도에 있었는데 비석이 파손되자 숙종 36년에 현 장소로 옮겨온 것이다.

본래 삼척의 해안가 일대는 해일이 심하여 바닷물이 마을까지 올라오고, 해일로 인한 홍수가 발생하여 지역 주민들의 피해가 극심하였다고 한다.[3] 아무튼 이를 안타깝게 여겼던 당시 삼척부사 허목이 동해송이라는 시를 짓고 특유의 전서체로 글을 써서 비석을 세우니 바다가 조용해지고 해일이 물러갔다고 한다. 이 때문에 조수를 물리치는 비석이라 하여 퇴조비(退潮碑)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관련 일화[편집 | 원본 편집]

이 척주동해비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져 오고 있다.

비석을 세운지 49년이 지난 숙종36년(1710년), 새로 삼척에 부임한 부사, 박래정이 이 비석의 영험함을 전해듣고, 미신이라며 철거해 버렸다. 그 후 다시 해일이 일어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하자 박 부사가 근심에 쌓여있었다. 그런데 허목이 비를 세울 당시에 같은 문자의 비를 별도로 하나 더 만들고백업 죽서루 밑에 몰래 묻은 다음[4], 마을의 아전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은 뒤 때가 되면, 서인 수재로, 나와 원수간에 있던 자가 와서 이 비를 파쇄할 것이오. 그렇게 된 즉, 조환(해일)이 여전하겠기에 네게 별도의 비석 뭍은 곳을 알려 주는 것이니 너는 명심코 누설치 말라"고 하였던 것. 실제로 비석이 뽀개지는 일이 일어나자 이 일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박부사에게 이를 알려주어 묻혀있는 비석을 다시 세우게 되니 다시 해일이 멈추었다고 한다.

비문[편집 | 원본 편집]

洲古悉直氏之地 在濊墟 南去京都七百里 東臨大海 都護府史 孔岩 許穆書

瀛海茫瀁 百川朝宗 其大無窮
東北沙海 無潮無汐 號爲大澤
積水稽天 渤潏汪濊 海動有曀
明明暘谷 太陽之門 羲伯司賓
析木之次 牝牛之宮 日本無東
鮫人之珍 涵海百産 汗汗漫漫
奇物譎詭 宛宛之祥 興德而章
蚌之胎珠 與月盛衰 旁氣昇霏
天吳九首 怪夔一股 颮回且雨
出日朝暾 轇軋炫煌 紫赤滄滄
三五月盈 水鏡圓靈 列宿韜光
搏桑砂華 黑齒麻羅 撮䯻莆家
蜑蠻之壕 爪蛙之猴 佛齊之牛
海外雜種 絶黨殊俗 同囿咸育
古聖遠德百蠻重譯 無遠不服
皇哉凞哉 大治廣博 遺風邈哉

— 顯宗二年 先生來守是邦 撰篆東海碑 立於汀羅島 爲風浪澈沈 先生聞而改書 今參考兩本 大字用舊本 小字用新本 刻竪于竹串島 時 上之 三五年 乙丑春三月也

해석은 대략 다음과 같이 할 수 있다. 편의상 위의 4구체씩 끊은 것을 /로 구분했다

척주는 옛날에 실직씨의 땅이요, 예나라의 터 남쪽으로, 서울로부터 700리요,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임하여 있다. 도호부사 공암 허목 쓰다

큰 바다 한없이 일렁이고 / 온갖 냇물이 흘러드니 / 그 큼이 끝이 없어라
동북은 모래바다 / 밀물썰물 없으므로 / 대택이라 이름했네
쌓인 물은 하늘에 다다르고 / 출렁임이 넒고도 아득하니 / 바다의 움직임엔 음산함이 서려있네
밝고도 밝은 양곡은 / 해뜨는 문이로다 / 희백이 공손히 해를 맞으니
석목의 위차요 / 빈우의 궁으로 / 해 돋는 동쪽의 끝이로다
교인의 보배와 / 바다의 온갖 산물 / 많기도 하여라
기이한 조화를 부려 / 너울대는 그 상서는 / 덕을 일으켜 나타남이로다
조개는 진주를 잉태하고 / 달과 함께 성하고 쇠하며 / 기운을 토하고 김을 올린다
머리 아홉 천오와 / 외발 달린 기는 / 센 바람 일으키고 비를 뿌리네
아침에 돋는 햇살 / 찬란하고 눈부시니 / 자색 붉은 빛이 일렁거린다
삼오야 둥실 뜬 달 / 물은 거울이 되어 신령스레 비추니 / 늘어선 별들이 빛을 감추네
부상의 사화와 / 흑치의 마라와 / 상투튼 보가며
단만의 굴과 조개 / 조와의 원숭이 / 불제의 소들은
바다 밖 잡다한 종류로 / 무리도 다르고 풍속도 다른데 / 한 곳에서 함께 자라네
옛 성왕의 덕화가 멀리 미쳐 / 모든 오랑캐들에게 거듭 알려져 / 멀리까지 복종치 않는 곳이 없네
아아, 크고도 빛나도도 / 큰 다스림은 널리 퍼져 / 남겨진 풍모는 끝이 없어라

— 현종 2년 선생이 이 곳에 태수로 와서 동해비를 짓고 써,정라도에 세웠으나 풍랑에 물 속으로 잠기니,선생이 이를 듣고 다시 써주었다. 이제 신,구의 두 가지를 참고하여,"척주동해비"라는 큰 글자는 구본을 사용하고,작은 글자인 비문은 신본을 써서 각하여 죽관도에 세운다. 때는 숙종 35년 을축년 봄 3월이다.

[5]

여담[편집 | 원본 편집]

이 비문의 전서체가 워낙에 인기인데다 수화불침이라는 민간신앙까지 들어가면서 비석의 탁본 가격이 못해도 장당 수십만원에서 백만원 내외를 호가한다. 이런 까닭에 이걸 노리고 전국 각지에서 탁본을 뜨러 온 사람들이 바글거렸으나, 지나치게 많은 탁본은 비석의 보존에 있어서는 최악인지라 결국 비각에 울타리를 치고 문을 잠그게 되었다.

평수토찬비[편집 | 원본 편집]

대한평수토찬비(大韓平水土贊碑)라고도 한다. 마찬가지로 삼척부사 허목이 짓고 쓴 것인데 중국 형산비의 대우수전 77자 가운데 48자를 가려서 새긴 것으로, 임금의 은총과 수령으로서 자신의 치적을 기린 글이다. 현종 원년(1661) 목판에 새기어 관아에 보관되어 오다가 240여년 후인 광무 8년(1904년) 칙사 강홍대와 삼척군수 정운철 등이 왕명에 의해 석각하여 죽관도에 건립하였다. 비의 높이는 145cm, 폭 72cm, 두께 22cm이며, 비각의 전면에 "우전각(禹篆閣)" 제액이 게판되어 있다. 위치는 척주동해비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다.

비문[편집 | 원본 편집]

大韓平水土贊碑
久作忘家翼輔承帝
勞心營智裒事興制
泰華之定池瀆其平
處水犇麓魚獸發形
而罔不亨伸欝䟽塞

明門與庭永食萬國

이 비문의 해석은 대략 다음과 같다.

대한평수토찬비 오래도록 자기 집을 잊고 임금의 뜻을 받들어 보좌하였네
마음을 쓰고 지혜를 내어 사업을 모으고 제도를 흥성케 하니
온 세상이 안정되고 바다와 하천 모두 평온하구나
물과 땅에는 물고기와 짐승이 모습을 나타내니
형통하지 않은 것이 없어 답답한 것이 해결되고 막힌것이 뚫린다

민가와 궁성이 모두 밝아져 만국의 백성이 길이 먹고 살리라

참고로 이 비석의 비문을 보면 글씨체 자체가 상당히 괴이한 모양을 가지고 있다. 동시대 사람들이 허목에 대해 남긴 기록을 보면 괴이한 것에 관심이 많았다고 하니 당시 그런 것을 기록한 산해경에서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내용을 보면 알겠지만 평안과 형통을 기원하는 내용이 들어가 있어 무당들의 부적에도 저 글귀[6]가 종종 인용되고는 한다.

각주

  1. 산이라기 보다는 작은 언덕이 가깝다. 본래는 죽관도라는 작은 섬이었으나 삼척항을 개발하면서 매립되어 육지가 되었다.
  2. 삼척항의 본래 이름
  3. 해일의 원인은 서일본 해안의 지진으로 인한 쓰나미이거나 높새바람이 불어올 때 종종 일어나는 너울성 파도가 영향일 것으로 보인다
  4. 동헌 마루 아래라는 얘기도 있다.
  5. [1]내용 참조
  6. 정확히는 원전인 형산구루비(신우비)의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