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담 후세인(아랍어: صدام حسين عبد المجيد التكريتي 사담 후사인 압둘 마지드 앗 티크리티, 1937년 4월 28일~2006년 12월 30일)는 이라크의 정치인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37년 4월 28일 이라크 티그리트에서 태어났다.
1968년 범아랍민족주의를 신봉하는 바트당이 쿠데타를 일으켜 알-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은 아레프를 축출했다.
이후 혁명지도평의회(RCC) 부의장으로 임명됐고 부통령을 거쳐 1979년 7월16일 이라크공화국 제5대 대통령에 오르면서 2003년 미국에 의해 전범으로 몰려 처형될 때까지 20여년간 후세인은 1인 독재 체제를 하여 공포정치를 하게 되었다.
취임 후 후세인은 미국의 지원하에 시아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소비에트 연방과 연합한 시아파 국가 이란과 맞서 80년 반대파인 시아파를 지원한다는 이유로 이란을 선제 공격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이 일어났다. 이 때 미국은 이라크를 지원했다.[1] 1988년 이란 측이 정전제의를 수락하면서 이란·이라크 전쟁은 끝났다.
이후 이라크는 중동의 군사대국으로 부상했다. 이번에는 석유 자원이 풍부하고 근대 이라크 성립 이후부터 이라크의 민족주의자에 의해서 이라크령이라고 주장되어 온 이웃나라 쿠웨이트로 향했다. 90년 8월 후세인 정권은 쿠웨이트를 침공, 병합을 선언하면서 걸프 전쟁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는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반발을 불러왔고 미국을 위시한 다국적군에 패배했다.
걸프 전쟁 종결 이후, 미국을 주도로 하는 국제사회로부터 경제 제재가 부과돼 이라크는 경제적으로 궁핍한 지경에 처했다. 2003년 3월20일, 미국은 이라크 전쟁을 개시한 후 후세인은 이라크 최고 항소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돼 2006년 12월30일 수도 바그다드에서 생을 마쳤다.
가족[편집 | 원본 편집]
각주
- ↑ 그 당시 만약에 이란이 이길 경우 이란의 이슬람 혁명이 아랍권 전역에 번질 가능성을 두려워한 미국과 석유 이권을 노린 영국·프랑스·네덜란드 등 국가들이 이라크를 지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