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6.25 전쟁 시기인 1950년 6월 28일 육군사관학교 생도들이 불암산에서 창단하여 9월 21일까지 북한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한 부대.

배경[편집 | 원본 편집]

1950년 6월 25일 새벽을 기해 북한군이 일제히 남침했다. 포천을 담당하던 국군 (구)수도사단(현 제7보병사단) 제9연대는 포천 전투에서 전차를 상대로 기관총과 조그마한 대전차포로 처절하게 방어했고, 6월 26일 밤 포천에서 퇴각하여 육군사관학교에 집결했다. 다음날(6월 27일), 육군사관학교 교장 이준식 준장은 육군본부로부터 생도들을 전투부대로 편성하여 전방에 투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에 이준식은 생도 1기 262명과 생도 2기 277명 등 총 539명으로 생도대대를 편성해 (구)수도사단 9연대 1대대와 합세 후 6월 28일까지 내촌-태릉 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극심한 전력차를 극복할 수 없어 서울 수비가 불가능해지자, 이준식은 생도대대에 한강 이남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고, 생도들은 뒤늦게 철수하다가 북한군의 추격으로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

이무렵, 김동원 1기 생도는 태릉 전투를 치르던 중 철수 명령을 입수했지만, 이대로 후퇴하기만 하면 적의 기세만 올려주고 나라를 위태롭게 만들거라고 판단했다. 그는 서울에 남아서 유격전을 전개하기로 마음먹고,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1기 동기생 및 후배들을 규합했다. 그들은 총 13명으로, 신상명세는 다음과 같다.

1기 생도(10명): 김동원, 전희택, 홍명집, 박인기, 김봉교, 박금천, 이장관, 조영달, 한효준, 강원기


2기 생도(3명): 신원 미상.

김동원은 이들을 이끌고 불암사로 향했다. 그는 불교 신자로, 평소 불암사를 자주 방문하여 윤용문 주지스님과 친분을 쌓고 있었다. 김동원은 윤용문 스님에게 유격 활동을 할 의사를 피력하고 도움을 요청했고, 윤용문 스님은 기꺼이 도와주기로 하고 이들에게 은신처를 마련했다. 이후 불암산 기슭에 배치되었던 9연대 소속의 부사관 2명과 병사 5명이 합류하면서, 총 20명이 불암사에 집결했다.

편성[편집 | 원본 편집]

6월 28일 불암사에 집결한 생도 및 9연대 소속 장병들은 암호명을 '호랑이'로 정하고, 유격대장으로 김동원 생도를 만장일치로 추대했다. 이후 유격대장은 각 조장을 임명했는데, 제1조장에는 조영달 생도, 제2조장에는 박인기 생도, 그리고 제3조장에는 9연대 소속 부사관인 김만석 중사가 임명되었다. 또한 정보책으로 홍명집 생도를 임명하여 윤용문 주지스님과의 접촉을 전담하게 했다.

윤용문 주지스님은 주변 마을의 믿을만한 신도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여 유격대에 전달했다. 한편 불암사보다 높은 곳에 자리잡은 석천암의 김한구 스님은 유격대가 숨어서 지낼 수 있는 동굴 몇 곳을 안내했고, 여러 차례 식사를 제공하는 등 유격대 활동을 지원했다.

대원들은 뒤이어 휴대하고 있는 무장과 장비를 확인했다. 생도들은 대부분 소총과 수류탄만 가지고 입산했지만, 9연대 소속 부사관 및 장병 7명이 배치되었던 기관총 3정, 수류탄 50여 발, 탄약 3,000여 발을 추가로 확보했다. 이후 그들은 유격대의 구성 취지의 결의를 담은 '유격대 활동수칙'을 정했다.

첫째, 우리 유격대는 전원이 결사의 각오로 유격 활동에 임할 것을 다짐한다. 그것이 후일에 전쟁을 기피했다는 누명을 벗는 유일한 길임을 우리는 깊이 명심해야겠다.


둘째, 우리 유격대는 병력과 그 장비의 규모로 보나 본래의 목적으로 보나 적 병력의 살상이나 보급품, 기타 시설 장비의 파손보다는 적 교란을 주 임무로 한다. 그래서 우리 유격대는 가능한 유격활동의 범위를 넓혀 적 병력의 분산과 유인으로 그들의 일선 투입을 적극적으로 방해할 것을 다짐한다.

셋째, 우리 유격대는 자체 진지를 불암산과 그 북방 12km의 수락산 및 동북방 9km의 국사봉에 두고, 그 곳을 전진하면서 적의 수색을 피하기로 하고, 또한 그곳에 잠입한 반공인사와 접촉하여 그들의 지원도 받기로 한다.

넷째, 우리 유격대는 서로 강요당해 집결한 집단이 아니므로 기탄없는 의견과 토론은 환영하는 바이지만, 일단 결정된 사항에는 복종할 것을 다짐하며, 만약 이탈자나 결정을 어긴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을 천명한다.

활동[편집 | 원본 편집]

첫번째 작전[편집 | 원본 편집]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첫번째 목표는 퇴계원에 위치한 북한군의 보급물자 적치장이었다. 당시 북한군은 전선으로 가능한 빨리 보급물자를 보내기 위해 경춘선 퇴계원역 주변에 다량의 보급품을 쌓았다. 7월 5일과 8일 야간에 생도 2명이 민간인 복장으로 사전 정찰을 실시해, 북한군 야적소의 규모와 경계병력, 적재 물품의 종류와 위치 등을 확인했다.

7월 11일 새벽, 대원들은 주력조와 지원조로 나눠서 퇴계원의 북한군 보급기지를 급습했다. 그들은 그곳에 쌓여있던 보급품을 불태우고, 북한군 약 30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거뒀다. 하지만 철수하는 과정에서 북한군의 추격으로 생도 1기 김봉교, 박인기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생도 2기 1명 등 3명이 전사했고, 한효준 생도가 부상을 입었다.

두번째 작전[편집 | 원본 편집]

두번째 목표는 창동국민학교와 인근에 설치된 북한군 수송부대 및 보안소였다. 7월 31일, 유격대원 6명이 출격하여 수류탄과 화염병을 사용해 북한군의 숙영지, 보급 차량, 보안부대 사무실 등을 습격했다. 그러나 퇴각 도중에 북한군의 추격으로 작전 입안자였던 김만석 중사가 전사했다.

세번째 작전[편집 | 원본 편집]

세번째 목표는 생도들의 모교인 육군사관학교였다. 당시 육사는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 훈련소로 이용되고 있었다. 유격대장 김동원 생도는 육사를 습격해 북한군에 의해 억지로 끌려온 이들을 탈출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하지만 육사에 주둔하고 있는 적의 규모가 컸기 때문에, 보다 치밀하고 세밀한 준비가 필요했다.

유격대는 구체적인 공격 방향과 철수 방향을 설정했고, 습격 이후에는 적이 불암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할 것을 예측해 수락산의 반공인사 은거지로 근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또한 이번 공격에는 그때까지 생존한 15명 전부 참가하기로 했다.

8월 15일 밤, 유격대는 야음을 틈타 육사 부지를 급습했다. 그들은 교도대와 생도대 막사에 수류탄과 화염병을 투척했고, 혼란에 빠진 적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해 북한군 약 50여 명을 사살했다. 그러나 철수하던 중 유격대장 김동원을 비롯해 6명의 생도가 전사했다.

마지막 작전[편집 | 원본 편집]

9월 15일 수락산에서 불암산으로 돌아온 유격대는 정보원으로부터 북한군이 불암산을 대대적으로 수색하는 과정에서 윤용문 스님을 연행했다는 이야기를 접했다. 이에 그들은 동굴에 숨어서 상황을 지켜봤다. 그러던 9월 21일, 불암산에 입산한 정보원이 북한군이 인천에 상륙한 유엔군 및 국군의 공격에 대비해 주민들을 화물차에 싣고 북쪽으로 끌고 갈 계획이라고 알렸다.

유격대장 조영달 생도는 주민들을 구출하는 작전을 실시할 지를 놓고 대원들과 논의했다. 당시 유격대가 보유한 장비는 개인별 소총 1자루와 실탄 10여 발 뿐이었다. 이 정도 무장으로 작전을 감행하는 건 자살행위였고,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할 때까지 불암산에 숨어있는 게 현명해 보였다. 하지만 대원들은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 군인의 임무라고 판단, 주민 구출 작전을 개시하기로 결의했다.

9월 21일 밤, 대원들은 내곡리 마을 주변까지 이동한 뒤 도로 주변에 매복진지를 편성하고 북한군 수송부대가 통과하기를 기다렸다. 23시경, 내곡리를 출발한 북한군 수송대가 매복진지 앞을 통과했다. 그러자 대원들은 소총을 쏘면서 습격했다. 이때 조영달 생도가 사람들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육사 생도들이오. 여러분은 어서 피하시오!

이에 많은 이가 여러 방향으로 달아나 북한군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유격대원들은 탄약을 모두 소모한 뒤 도망쳐 불암산으로 복귀하려 했다. 그러나 북한군의 추격으로 강원기 생도를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강원기 생도는 오른팔에 관통상을 입고 굴러 떨어져서 의식을 잃었으나, 다음날 마을 주민들이 그를 발견하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는 서울 수복 후 국군과 합류해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보고한 뒤 국군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강원기 생도는 치료를 받으면서 문병 온 동기생들에게 불암산에서의 유격 활동 이야기를 자세히 전했다. 이때 동기생들의 참전 체험담을 수집하고 있던 남상선 생도(예비역 대령)가 이 이야기를 접했고, 그는 훗날 <불멸탑의 증언>에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상을 담았다. 그러나 강원기 생도는 부상이 악화되면서 1951년 7월 10일에 순국했다.

유격대를 지원했던 김한구 스님의 손자 김만홍 씨는 1996년 유격대의 활약상에 대해 증언했다. 1950년 당시 7살이었던 그는 유격대원들에게 식사와 물을 직접 날라주곤 했다고 증언했다. 육군사관학교는 김만홍 씨의 증언을 토대로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가 은신하던 은거지 3곳을 확인한 뒤, 그곳에 안내 간판을 설치했다.

추모[편집 | 원본 편집]

2013년 한국소설가협회 회원이자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이었던 이정우 씨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의 활약상을 주제로 한 장편소설 <대한민국 사관생도>를 출간했다.

2019년 6월 19일, 불암사는 육군사관학교, 남양주시와 함께 사찰 입구에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새 안내판 제막식을 개최했다. 불암사는 매년 호랑이 유격대의 나라사랑 정신을 기리고 극락왕생을 발원하기 위해 생명나눔실천본부와 함께 이들 영가를 천도하는 재를 봉행하고 있다고 한다.

2020년 6월 17일, 남양주시는 6.25 전쟁 70주기를 앞두고 불암산 입구에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충혼비 제막식을 개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