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타 벤츠

베르타 벤츠
Bertha Benz
인물 정보
출생 1849년 5월 3일
바덴 대공국, 포르츠하임
사망 1944년 5월 5일 (95세)
바덴 공화국, 라덴부르크
배우자 카를 벤츠

Bertha Benz
베르타 벤츠

개요[편집 | 원본 편집]

1888년에 최초로 자동차로 장거리 운행을 한 드라이버이자, 초기 자동차사를 개척한 인물이다. 카를 벤츠의 아내로 알려져있지만, 사실 카를 벤츠가 성공할 수 있던 건 다 베르타 벤츠 덕분이기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초기 자동차사에 있어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베르타 벤츠는 1849년 독일 서남부 포르츠하임에서 유복한 가정의 딸로 태어났다. 이러한 배경 덕분에 카를 벤츠와 결혼하기 이전에도 그와 그의 회사의 투자자로 있었을 뿐더러, 1872년 카를 벤츠와 결혼한 뒤로 카를 벤츠가 자동차를 개발할 수 있게끔 재원을 대줬을 뿐만 아니라[1] 기술적으로도 여러 도움을 주었다. 당시 법률상 아내라고 해도 특허를 소유할 수는 없었지만, 현재의 법률상[2]으로는 카를 벤츠가 소유한 특허는 베르타 벤츠도 소유한 것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

세계 최초의 드라이브[편집 | 원본 편집]

카를 벤츠는 가솔린 엔진 자동차를 개발한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카를 벤츠는 1885년 최초의 자동차를 개발한 뒤, 그것을 개량해 2호, 3호 자동차를 개발하였다. 그러나 3호 자동차를 개발할 무렵 카를 벤츠는 사람들의 나아지지 않는 자동차에 대한 인식으로 지쳐가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자동차의 시연이란 것은 도시 내에서 짧은 구간을 운행하는 것에 그쳤다. 사람들은 자동차가 자신들이 통제하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기계로 인식하고 있었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3륜의 수레가 자동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매우 낯선 개념이었고, 마차에 익숙하던 사람들에게 자동차는 기이하고도 경원시할만한 기계였다. 그도 그럴게 스스로 움직이는게 악마의 소행이다 하는 헛소문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은 기계에 익숙하지 않았고, 그것을 몹시 복잡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살 엄두를 못 냈던 것이다.

그러던 1888년, 남편의 좌절을 보다못한 베르타 벤츠는 자동차로 장거리 드라이브를 할 계획을 세운다. 베르타 벤츠는 8월 어느 날 아침 카를 벤츠 몰래 3호 자동차를 끌고 나와 두 아들―15살의 오이겐 벤츠와 13살의 리하르트 벤츠―과 함께 길을 나선다. 당시 벤츠 가족이 머물고 있던 곳은 독일 서남부의 만하임이었으며, 베르타 벤츠는 그곳에서 약 100 km 남쪽으로 떨어진 카를스루에 인근의 포르츠하임의 친정집까지 차를 끌고 갈 계획을 세운다. 다만 친정집에 가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고, 사실 베르타 벤츠는 사실 이동하면서 자동차를 대중에게 유용한 것이라 홍보할 수 있을 것이며, 남편의 발명품이 신뢰성이 있으며 미래가 있다는 것을 알릴 목적으로 드라이브를 계획한 것이다.

그래서 베르타 벤츠는 두 아들과 함께 자동차를 끌고 길을 나선다. 그러나 당연히 초기 자동차로 문제 없이 가는 일이란 없었고, 연달아 트러블이 발생하였다. 비슬로흐에 이르러서는 4.5 리터 들이 연료통의 연료가 떨어졌다. 그는 비슬로흐의 한 약국[3]에 들러 연료를 구입하였다. 이 약국은 세계 최초의 주유소로 기록되어 있으며, 지금도 비슬로흐에 남아있다. 더불어 베르타 벤츠와 그의 두 아들, 그리고 카를 벤츠의 자동차를 모티브로 한 조형물도 인근에 설치되어 있다.

아무튼, 기름을 넣고 가다 보니 이번에는 연료선이 막혔고, 기계줄 간에 간섭이 일어났다. 그러자 그녀는 모자에 달려있던 핀으로 구멍을 뚫었으며, 가터를 사용하여 기계줄 간의 간섭을 막았다. 그 이후로 잘 가다가 이번에는 목재 브레이크가 듣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자 베르타 벤츠는 인근의 구두 수선인에게 들러 가죽을 구입하여 브레이크에 덧대었다. 이게 바로 세계 최초의 브레이크 패드다. 가장 골치를 썩였던 것은 엔진의 수냉각 시스템이었는데, 베르타 벤츠와 그녀의 두 아들은 이곳 저곳에서 물을 길러다 수시로 물을 채워야만 했다.

또 한 가지 골치점은 오르막길이었다. 2마력의 차량에 달린 것은 한 쌍의 기어가 전부였다. 변속기 없이는 세 사람을 싣고 오르막길을 올라갈 수 없었기 때문에 오르막길에서는 두 아들이 내려 차를 밀고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베르타 벤츠의 이 시험 운행으로 차량의 변속기의 필요성을 증명한 셈이다.

만하임에서 아침에 출발한 세 사람 일행은 그렇게 반나절을 꼬박 달려 어둑해질 무렵 포르츠 하임에 도착하게 된다. 그 시각, 베르타 벤츠가 남긴 친정집으로 간단 쪽지와 함께 빈 차고를 본 카를 벤츠에게 전보 한 통이 도착한다. 바로 베르타 벤츠가 "성공적으로 도착했다"고 보낸 것. 3일 뒤 베르타 벤츠는 만하임으로 복귀한다. 복귀하는 길은 포르츠하임으로 올 때의 길과 일부러 다른 길을 선택했다.

아무튼 이 운행으로 베르타 벤츠는 목적을 이루었다. 베르타 벤츠는 개발자인 카를 벤츠 없이도, 스스로만으로도 자동차로 100 km가 넘는 장거리를 어렵지 않게 이동할 수 있다는 것, 즉 자동차가 대중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대중에게 성공적으로 증명하였다. 또한 베르타 벤츠가 도중에 발견한 몇 가지 개선점―브레이크 라이닝의 개선과 언덕길을 위한 차량 변속기―은 현대 자동차 기술의 가장 기초가 되는 것이다. 여러모로 베르타 벤츠는 자동차사에서 중요한 업적을 남긴 셈.

여담으로, 근대 산업사, 자동차사에 기여한 공로로, 베르타 벤츠가 다녔던 194 km의 길은 베르타 벤츠 메모리얼 루트라는 이름으로 지정되어 현재까지도 기록되고 있다.

이후[편집 | 원본 편집]

그 뒤로도 베르타 벤츠는 카를 벤츠와 함께 자동차사에 기여하였다. 베르타 벤츠는 상당히 장수한 편인데, 1944년 그녀가 세상을 떠날 때의 나이는 95세였다. 죽기 직전, 카를스루에 공대의 명예 의원으로 추대되었으며, 카를 벤츠와 함께 명예 박사 학위를 받았다.

카를 벤츠[4]는 그의 회고록에서 "가라앉을 운명이었던 삶이라는 이름의 작은 배에서 나와 마지막까지 있어준 단 한 사람은 내 아내였다. 그는 용감하고도 확고하게 희망이라는 이름의 출항을 이끌었다."라고 남겼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당시 법률상으로는 아내가 남편의 투자자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결혼 지참금 형태로 지원하게 되었다.
  2. 기술 개발의 핵심 아이디어를 냈을 뿐더러 재무 투자까지 했으니 요새 기준이라면 카를 벤츠보다도 특허 기여율을 더 받아도 할 말이 없을 수준이다. 브레이크 패드나 변속기 같은 건 다 베르타 벤츠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이다.
  3. 비슬로흐의 슈타트아포테케(Stadt-Apotheke, 직역하면 "도시약국", 상호명임에 주의)
  4. 베르타 벤츠보다 15년 먼저, 1929년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