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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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亨武.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22년 5월 5일 전라북도(현재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출생했다. 일찍이 일본으로 유학가서 1941년 4월부터 1942년3월까지 관서대학 상과를 다녔으며, 금산군 세무서에서 1년간 근무하다 학병에 동원되어 버마 전선에 투입되었다. 1945년 4월 일본군을 탈출해 영국군에 투항한 뒤, 박순동, 이종실과 인도 뉴델리에서 합류했다. 그들은 영국군의 포로로서 각각 포로 번호를 받았는데, 박형무는 #M-1371번을 부여받았다. 세 사람은 일본군 포로들이 하는 궁성요배를 거부하고 반일감정을 서슴없이 토로했다.

이에 뉴델리 주재 미 첩보기관 OSS가 이들을 주목했다. 그들은 OSS/인도-버마지대 소속이던 최창수 하사의 통역으로 탈출과정, 출신지역, 항일의지 등에 대한 심문을 받았다. 이들에 관한 기록은 1945년 4월 말부터 OSS문서에 등장했다. OSS 인도지부의 윌킨슨은 1945년 4월 26일 OSS 워싱턴의 아이플러에게 전보를 보내 최근 영국군에 투항한 한국병사 2명(박순동, 이종실)이 적극적인 반일 의지를 표명하며 연합군 작전에 동참하길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윌킨슨은 또 이들이 도쿄를 떠난 지 불과 18개월밖에 되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최신 정보를 갖고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OSS 워싱턴은 1945년 4월 28일 답전을 보내 이들을 냅코 프로젝트에 참가시키길 원한다며, 이들의 이동에 필요한 조치가 무엇일지를 문의했다. OSS 인도지부는 박순동, 이종실이 대학교육을 받은 인물들로 영어를 하지 못하지만 최근 일본과 일본의 정보에 민감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OSS 워싱턴이 필요하다면 이들을 보내겠다고 회신했다. 또한 이들을 미 본토로 보내는 데 있어서 미 국무부의 입국허가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후 OSS 인도지부는 박형무가 영국군에 투항했다는 소식을 추가로 워싱턴에 전달했고, 박형무가 "일본군 제49사단에 약 500명의 한인 병사들이 있으며, 이들은 연합군에 투항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고 덧붙였다. 미군은 이들의 존재를 중요시해 영국군에게 박순동, 이종실을 워싱턴으로 보내달라고 요청했고, 영국군은 동의했다. 그러나 인도-버마전구 사령관의 정치고문 막스 비숍(Max Bishop)은 이들을 워싱턴으로 보내기 위해서는 미 국무부와의 접촉이 이뤄져야 하며, 이들에 대한 무여권, 무비자 입국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당시 포로 대우에 대한 제네바 협약에 따르면, 포로를 전쟁 수행의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는 모두 영국군에 투항한 포로이므로, 이들을 미국까지 데려가서 특수작전에 투입하는 것은 제네바 협약에 위배되는 것이었다. 미 국무부는 이들을 기용하는 것에 강하게 반발했고, 냅코 프로젝트 담당자 아이플러는 이 문제를 놓고 고심했다.

하지만 OSS는 전쟁 기간 내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한 것을 만회하기 위해서는 이들을 활용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OSS는 국무부에게 세 사람의 무비자, 무여권 입국허가를 내려줄 것을 강력히 요구했고, 국무부는 5월 17일 허가했다. 이후 세 사람은 미국 동부 항구로 수송되었다. 하지만 국무부가 정말로 허가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며, OSS가 국무부의 문서를 위조하거나 임의로 행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무튼 우여곡절 끝에 5월 22일 워싱턴행 비행기에 탑승한 세 사람은 뉴델리, 카라치, 카이로, 카사블랑카, 대서양을 거쳐 5월 24일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들은 5월 29일 로스앤젤레스에 이동하여 아이플러의 환영을 받은 뒤 훈련장이 설치된 샌타 카탈리나 섬에 도착했다. 그 후 박형무 등 세 사람은 1945년 6월부터 9월까지 외부와 격리된 채 고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 훈련 등을 이수했다. 훈련과정에서 이들의 국적, 성명, 경력은 비밀에 붙여졌고, 이들은 각각 조(Joe, 이종실), 찰리(Charley, 박형무), 톰(Tom, 박순동)으로 불렸다. 그들을 가리킨 교관 중에는 친일외교관 스티븐스를 처단한 전명운(田明雲)의사의 사위인 이태모(李泰模)도 있었다. 이태모는 매분당 20단어를 수신하고 분당 25단어를 송신할 수 있는 무선기술을 가르쳐 주었다.

종전 무렵, 세 사람은 전체 훈련의 3/4 과정을 이수했다. 박형무는 평균 87점을 받으며 1급 무전전문가로 평가되었고, 이종실은 평균 80점을, 박순정은 평균 90점을 받았다. OSS는 이들을 LA와 샌프란시스코 등지에 실지로 가상 침투시키기도 했으며, 침투용 잠수정에 태워서 LA 항구에 잠입하는 훈련을 수행하게 하기도 했다. 또한 세 사람은 LA 빌트모아에 무선 송출기를 설치했고, 센디에이고로 파견되어 무선국을 설치하다 현역 군인에 체포되어 FBI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이렇듯 그들은 거의 모든 훈련을 이수하고 이제 조국으로 침투할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이 도래하면서, 그들의 운명은 기로에 놓였다. OSS는 연합군이 제네바 협약을 무시하고 한인 포로들을 전쟁에 동원했다는 비난을 받을 것을 우려해 박순동, 이종실, 박형무를 하와이 포로 수용소로 보내버렸다. 그들에게 주어진 거라고는 아이플러가 발급한 감사장 한 장 뿐이었다. 훗날 박순동은 저서 '모멸의 시대'에서 자신이 한국과 미국을 위해 헌신하고자 사력을 다했거늘 돌아온 것은 포로 취급이었다며 분노를 토로했다.

박형무는 하와이 포로수용소에서도 한인들의 의사를 적극적으로 반영했다. 그는 박순동, 이종실과 함께 2,700명에 달하는 한인 포로들의 별도 관리를 요청했고, 그 속에서 한인포로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자유 한인보>라는 주간지를 발행했다. 이 주간지는 60쪽 정도로 매주 1,350부가 발행되었다. 세 사람은 모두 편집인으로 활동하며 한인 포로들의 이익을 도보하고 단결을 유지하는 데 힘썼다. 또한 포로수용소장 하월 대령은 이들이 다른 포로들과는 다르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적지 않은 편의를 제공했고, 하와이에 거주하는 한인 동포들 역시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한인 포로들을 지원했다. 그래서 박형무는 포로수용소에서 나름대로 편하게 살 수 있었다. 그렇게 총 7회의 <자유 한인보>를 발간하던 세 사람은 한국 송환이 임박하자 <정간의 말>을 게재했다. 그들은 이때 포로 생활의 소회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가 포로였다는 것을 수치로 생각치 말자는 것이다. 우리의 포로됨은 그 성질이 달르거니와 또한 구테혀 포로의 수치를 느낀다면 그는 우리 동포 3천만 전부의 수치이여서 우리는 이 수치 위에서 설욕의 건설에 힘써야 할 껏이다. 따라서 우리 2천 7백명만이 3천만명 중에서 수치의 자책심에 얼킬 필요가 없는 것은 물론이요 오히려 나어가서 우리의 심각한 정신적인 단련을 뻐처서 씩씩하게 일해야 할 것이다. 실상 우리가 완전하게 13도 강산의 하늘에 태극기를 날리는 날까지는 전선의 고초와 철망 내의 부자유한 생활이 우리 2천 7백면 뿐만이 않이요 3천만 조선동포 전체의 마음과 몸을 속박하고 잇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않될 껏이다.

1945년 12월 21일 박순동, 이종실과 함께 하와이를 출발한 그는 1946년 1월 11일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후엔 여생을 조용히 지내다 1982년 10월 2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형무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정병준, <박순동의 항일투쟁과 미 전략첩보군(OSS)의 한반도침투작전>, 역사문화학회, 2003.[1]
  • 독립유공자공훈록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