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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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泰哲. 창씨명은 이하라 야스아키(井原泰哲).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8년 12월 10일 경상북도 대구부 남면 남산동에서 출생했다. 그는 대구 농림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가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기계기술양성소에 입소했다. 그러나 현지에서 한인 학생들이 일본인들로부터 차별대우를 받는 것에 분개하여 귀국 후 인천에 있던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에 취업하여 독립운동을 꾀했다. 그는 동지 김은도(金恩道)와 함께 독립운동의 방도로서 민족전통의 풍속과 한글을 수호하는데 힘을 쏟았다. 또한 1943년 7월 경, 그는 조선기계제작소(朝鮮機械製作所) 동료직원 임창빈(任昌彬)·이도열(李道烈)·노명일(盧明一) 등 3명에게 한글로 문학작품을 써서 책자로 만들기로 합의하였다. 그리하여 민족의식이 강한 작품을 게재한 <목양>이란 잡지를 제작·배포하여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배하고 조선은 곧 독립을 이룰 것이라고 하여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1944년 6월 '목양 2호'를 제작하기 위해 원고를 모아 등사하다가 동료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되었다. 이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재판을 받았고, 1945년 5월 14일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1] 8.15 광복 직후 석방되었다. 이후 기독교 신자로서 종교 활동에 매진하다 199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고, 2000년 먼저 미국에 건너간 자녀의 초청으로 이민하였다.

2008년 8월 14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 베이징 올림픽에서 금메달이 잇따라 나오는 것만 봐도 대한민국 국민의 우수성을 알 수 있다"면서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세계 어디에 살건 대한민국을 알리는데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2] 2009년 8월 15일 뉴욕한인회 광복절 기념식에 참석하여 한인회 감사장을 수상했다.[3]

2014년 7월 14일 경기도 용인시 분당구 차병원에서 사망했다. 7월 18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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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