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식 (1896년)

박종식 (1896년).jpg

朴琮植.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9월 15일 경상남도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경남 함안군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3년 봄 경성으로 상경하여 사립 중앙학교 중등야학교(中等夜學校)에서 교육을 받았다. 졸업 후 대종교를 신봉한 그는 대종교를 국교로 하는 신대한제국을 건설할 것을 계획했다.

그는 만주에 독립운동 기관을 설치하여 각지에 있는 독립운동가를 모으고, 국내의 청년을 고무 격려하고 비밀리에 군사를 훈련시켜 한국의 독립을 도모하고 노예의 상태에 빠진 동포를 구제하며 자손들을 위해 일신을 꾀하고자 하였다. 이에 1916년 5월 서울에 거주하는 친일파 부호 민영휘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요구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거사에 찬성하고 이에 요구되는 비용의 제공을 허락할 것이요, 만약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에는 토멸대를 조직하고 와서 징벌을 가할 것이다. 정안(正眼)과 정재(正財)로써 정의의 사업에 사용하지 않고 비열한 사업을 하는 자는 징벌을 하더라도 도리에 통하고 천리(天理)에 합치하는 것이다

민영휘는 편지를 받고 종로경찰서장에게 제출하였고, 박종식은 이 일로 체포되어 1916년 7월 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공갈,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의 옥고를 치렀다.[1] 출옥 후 1919년 3월 19일 함안읍내에서 안갑중·안재성(安在成)·조영규·조동락, 매형 안재형과 함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다가 이 시위를 지도하던 안지호가 구금되자 이를 구출하였다.

이후 1920년경 경남 마산 등지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군자금 모집책 송두환과 함께 활동하던 중, 음 12월 23일 경북경찰부 고등경찰과에 검거되어 석 달 동안 혹독한 취조를 받았으나 완강한 부인과 묵비로 인해 1921년 3월 29일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2]

1923년 또 다시 독립운동자금 모집책으로 활동하다가 1924년 1월경 일경에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강도죄로 징역 7년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함안군에서 여생을 보내다 1950년 9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종식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국가기록원 - 독립운동관련 판결문
  • 독립유공자 공훈록[1]
  • 디지털함안문화대전[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