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애 (독립운동가)

朴愛.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08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생으로 알려졌지만 출생지는 알 수 없다. 그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하바롭스크에서 수립된 극동소비에트 집행부에서 비서장을 역임했다. 1918년 2월 열린 해외망명자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에 조직된 한국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제2차 대회에서 박진순, 이한영과 함께 코민테른 교섭 대표로 선출되어 11월 말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박애는 모스크바에서 박진순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의 코민테른 가입을 요청했고, 제7차 전 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 참석하였다. 1920년 4월 러시아 모스크바를 출발해서 돌아오던 도중 러시아 옴스크에 머물며 옴스크 한인공산당 간부 그룹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중반 지역 국민회와의 협력 문제로 옴스크 한인공산당이 분열하였을 때 안경억·이다물과 함께 국민회와의 협력을 주장하였지만, 이성·이괄·채성룡 등 반대파에 패퇴하였다. 1920년 7월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된 전로한인공산당대표자회의 참석하여 이르쿠츠크파에 맞서 한인사회당의 입장을 개진하였다.

박애는 1920년 12월 2일 러시아 치타에서 극동공화국 영토 내에 있는 한인 사회주의 단체들의 대표자 회의를 소집하였다. 대표자 회의를 통해 러시아 공산당 극동국 한인부가 조직되었고, 박애는 계봉우·장도정·김진·박창은과 함께 중앙집행부에 선출되어 서무부장을 맡았다.

1921년 1월 전한의병대회 소집위원회 위원으로 선정되어 3월 열린 전한의병대회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극동국 한인부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결정에 따라 3월 29일 극동국 한인부 중앙집행부 전원이 당에서 제명되었고 아무르주 한인공산당도 해체되었다.

4월 말에는 코민테른 극동비서부의 요청으로 명령 불복종에 따른 반혁명 혐의로 극동국 한인부 중앙집행부 전원이 체포되었다. 박애는 5월 21일 열린 임시특별혁명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1921년 11월 15일 확정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한국 문제 결정서에 따라 석방되었다.

1923년 중국 상해에서 열린 국민대표회에 고려혁명군 적위장교단 대표 자격으로 참석하였고, 그 후 러시아 연해주에서 코민테른 극동국 고려부장 겸 소수민족부장 등을 맡았다. 그러나 1927년 일본의 밀정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총살형에 처해졌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박애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